비구니 인명사전

정화스님(淨華, 1922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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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화(淨華)스님은 비구니 최고 법계 명사 품수 받았으며 개심사 비구니스님 강원 주지등 후학 양성과 한평생 청정수행자로 수덕사 견성암 선원장등을 지낸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2 강원도 회양 출생
1933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 표훈사 돈도암에서 원각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4 일우(一愚)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39~1944 고성군 외금강면 금강산 온정리 여여원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사미니과 수료
1944 대원암 안거
1944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0~1951 견성암 안거
1952 부산 범어사 범어사 대성암 안거
1954 대성암에서 운허스님 문하에서 능엄경을 수료
1950년대 말 종단정화운동 동참
1961~1962 개심사 비구니강원 총무
1962~1970 개심사 비구니스님 강원 주지 개심사 도감(주지)
1970년대 초 수덕사 극락암에서 안거를 보내고
1970~1994 서울 광진구 화양동 광림선원 창건
1973~1994 20여년이 넘도록 화양동 광림선원에서 안거
1986 비구니 이부승 존증아사리에 추대
1994~1996 수덕사 견성암 안거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6회 존증아사리)
1996~1999 견성암 제일선원 선원장
2007 조계종 비구니 최고 법계인 명사법계를 품수
2016.4.29. 수덕사에서 입적 (세수 95세 법납84세)
문중 법기(法起)문중
수행지침 청정수행
수계제자 진우(眞宇)・진성(眞性)・진오(眞悟)

활동 및 공헌

[정화스님 다비식]
사진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서울 화양동 광림선원]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서울 독립문 광림선원(현저동; 16.01.11)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서 이전]
사진촬영:김은희 2021년
[광림선원안내석(현저동)] (출처: 여행과 인생)
[광림선원 극락보전]
사진촬영:김은희 2021년
[광림선원 극락보전]
사진촬영:김은희 2021년


출가 인연

정화(淨華)스님은 1922년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이며, 속명은 강삼인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원래 경남 진주가 고향이었고, 어머니와 은사스님은 서울 출신으로 세 분은 친분이 매우 두터웠으며 불심 또한 깊었다. 서울에 살면서 삼남매를 낳은 스님의 부모님은 당시 은사스님이 계시던 금강산 표훈사 근처로 낙향을 하게 되었고, 이후 막내인 정화스님이 태어났다. 표훈사에 재가 있는 날이면 어머니는 법문을 들으러 자주 다녔는데, 그때마다 어린 꼬마였던 정화스님 역시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다. 그러나 재를 지내는 스님의 말씀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어 지루하기만 했고, 어린 소녀는 꼬박꼬박 졸기 일쑤였다. 어린 아이가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을 어여삐 보신 한 스님이 하루는“나 따라와서 잘래?” 하고 말씀하셨다. 어린 정화스님은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가서 목침을 베고 한참 동안 달디 단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다가 잠이 깨어 자신이 스님을 따라왔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고서 깜짝 놀라 울먹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사이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둑어둑한데,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방안 풍경은 생경하기만 하였다. 설상가상 목침을 베고 잔 탓에 목은 떨어질 듯이 아파왔다. 문득 서럽고 두려운 마음에 큰 소리로 울자 스님께서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길을 나섰다. 그날 밤 집에 도착하였을 때 시계는 벌써 자정이 가까운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어린 꼬마를 데려다 주었던 스님은 나중에 정화스님의 은사스님이 되셨고, 은사스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훗날 일대사 인연으로 다시 이어진다.
당시 원산에는 갈매수녀원이 있었다. 수녀원에서 수행하던 수녀님들은 병이 나면 수녀원 밖으로 내보내져 요양을 하였는데, 어느 날 건강이 악화된 수녀님 한 분이 스님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어린 정화스님은 수녀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자상한 말씨와 다정한 모습에 자신도 수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어린 딸이 수녀가 되겠다는 뜻을 거듭 나타내자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던 스님의 집안은 실로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이에 정화스님의 어머니가 절에 찾아가 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스님께서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그 아이를 자신에게 데려다 놓으라 하셨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정화스님에게 말했다.
“수녀원에 가지 말고 너 절에 한번 안 가볼래?”
절에 가자는 어머니의 말에 정화스님은 불현듯 목침 때문에 고생했던 일이 생각나 얼른 베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정화스님을 보고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건 뭐 하러 만드니?”
그러나 정화스님은 지난 일이 부끄러워 “그냥......”이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절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넌 여기 있을래?” 하고 말하자 당돌하게도 "있겠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스님의 어머니는 막내이면서 유난히 별난 막내 아이가 낯선 곳에서 하루나 제대로 견딜 수 있을까 염려하면서 어린 딸을 절에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내린 이 결정은 곧장 스님의 출가로 이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절에 스님을 데리러 간 어머니가 집으로 같이 가자고 손을 아무리 잡아끌어도 어린 정화스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깜찍한 어린 소녀는 만약 자신이 집에 가게 되면 다시는 절에 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며 한 달 가까이 버텼다. 그러자 끈질기게 절에 찾아와 귀가를 종용하던 어머니도 포기하고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막상 절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집과는 달리 끝도 없이 심부름을 해야 했다. 그러나 속으로 불평을 하다가도 문득 ‘이걸 해내야지 절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리하여 스님은 어려운 중노릇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게 되었다.

출가 및 교육

정화스님은 1933년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강원도 회양군 표훈사 돈도암에서 원각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출가 이듬해인 1934년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신계사에서 김일우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은 출가 직후부터 19살 때까지 표훈사에서 머물다 임대원 스님, 성공스님, 은사스님과 함께 만주로 들어가서 백용성 스님을 모셨고, 성공스님이 광명고등여학교를 설립하신 뒤에도 꾸준히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정화스님은 만주에서 신계사 입구로 돌아왔고, 성공스님은 효봉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여여원이란 선방을 개설하셨다. 그리고 은사스님은 자족원(진여선원)을, 뒤이어 임대원 스님은 신계사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곳에 법기암이라는 선방을 창건하셨다.

1939년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온정리 여여원에서 효봉화상을 계사로 보살계를 수지한 정화 스님은 1944년까지 5년 동안 여여원에서 효봉화상을 모시고 사미니과를 수료하였다. 이렇듯 정화스님은 어른스님들의 독립의지를 받들어 성심껏 시봉을 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에 일제치하 당시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냈던 여여원이 해방 후에 적산으로 몰려 그대로 두고 나오게 되었다. 이때가 스님 세수 23세였다. 그 후 서울 대원암에서 한 철 안거를 나고, 1945년 3월 선학원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은 6·25전쟁이 발발한 뒤 1·4후퇴 때 피난을 나와 수덕사 견성암에 머물면서 2년여 동안 수선안거를 성만하는 등 참선수행에 전념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스님은 출가 직후부터 19살까지 표훈사에서 머물다 임대원스님, 성공스님, 은사스님과 함께 만주로 들어가셔서 백용성스님을 모셨고, 성공스님이 광명고등여학교를 설립한 뒤에도 꾸준히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정화스님은 만주에서 신계사 입구로 돌아왔고 성공스님은 효봉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여여원이란 선방을 개설하였다. 은사스님은 자족원(진여선원)을, 뒤이어 임대원스님은 신계사에서 십리정도 떨어진 곳에 법기암이라는 선방을 창건하였다.
정화스님은 어른스님들의 독립의지를 받들어 성심껏 시봉을 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일제치하 당시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냈던 여여원과 지족원이 해방 후에 적산재산으로 몰려 그대로 두고 나오게 되었다. 이 때가 스님 세수 23살 때의 일이었다.

한국불교정화운동에 참여

1952년 범어사 대성암에서 안거를 마친 후에는 정화의 거센 바람이 종단 안팎에 불어 닥쳤다. 정화 당시 조계사 마당에는 전국에서 모인 비구스님들과 비구니스님들이 가득했다. 모두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일어서라면 일어섰다. 오줌이 마려워도 그 자리에서 해결하라고 할 만큼 엄중한 상황이었고,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해야만 했다. 조계사 총무원에 들어가 회의를 해야 하는데 대처승들이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자, 비구니스님들이 밀치고 들어가게 되었다. 만약 비구스님들이 들어가면 양측 간에 폭력사태가 발생할 게 분명하기에 내린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비구니스님들이 총무원으로 우르르 몰려가자 대처승들은 차마 비구니스님들에게 폭력을 행사 하지 못하고 욕을 하였으나 결국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정화운동 당시 스님은 큰스님들과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이때 정화스님은 단식을 하면 물 한 모금도 마시면 안 되는 줄 알고 만 이틀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굶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어지럽고 힘겨워서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잠시 쉴 요량으로 선학원에 도착해보니 단식을 하는 스님들을 위해 미음과 죽을 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스님은 자신의 어수룩함과 올곧기만 한 성격이 너무 허탈해 한바탕 웃고 말았다. 이런 일면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정화 당시 비구니스님들의 노고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광림사 창건

정화가 끝난 후 스님은 후학들의 학구 의지를 드높여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데 일익이 되고자 1961년 개심사 비구니 강원 총무로 2년간 재직하였으며, 곧이어 강원의 주지를 맡아 8년 정도 소임을 보았다. 열성을 다해 가람을 수호하고 신심을 다해 후학을 양성하던 스님은 1970년 주지 자리를 내놓고 서울로 돌아와 광진구 화양동에 광림사를 창건하였다. 도량 불사를 거듭하여 불국토의 가람으로 표표히 그 모습을 드러낸 1994년에 이르기까지 꼬박 24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남은 여생을 선(禪)수행에 전념

이렇듯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도량을 가꾼 후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스님은 남은 여생을 선공부에 전념해야겠다는 일념을 세웠다. 소유욕에 걸림이 없이 일생을 보내온 그 모습이 거룩하기 그지없다. 1994년부터 2년간 수덕사 견성암에서 안거 정진을 한 뒤 1996년에는 견성암의 선원장 소임을 맡아 3년 정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입적

묘각당 정화 스님은 2016년4월29일 오전 5시 세수 94세 법랍 82세로 원적에 들었다. 분향소는 일산 동국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며 영결식은 4월30일 오후 7시발인은 5월1일 오전 6시에, 다비식은 오전 9시 수덕사에서 전국비구니회 장으로 엄수되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정화(淨華)스님 본항목 정화스님(淨華, 1922~2016) 淨華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화스님(淨華,_192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정화스님(淨華)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정화스님(淨華) 원각스님(圓覺) ~의 수계제자이다
정화스님(淨華) 표훈사 돈도암 ~에서 출가하다
정화스님(淨華) 일우스님(一愚)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정화스님(淨華)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정화스님(淨華) 명사법계(明師法階) ~을(를) 품수하다
정화스님(淨華) 불교정화운동 ~에 참여하다
정화스님(淨華) 서산 개심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정화스님(淨華) 서울 광림선원 ~을(를) 창건하다
정화스님(淨華) 수덕사 견성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선원장(제일선원)
정화스님(淨華)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6회 존증아사리)
정화스님(淨華) 안거 ~을(를) 성만하다 밀양 표충사 대원암, 예산 수덕사 견성암,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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