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스님(性文, 1893生, 비구니)
성문(性文)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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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성문(性文) |
법호 | 혜월(慧月) |
속명 | 정성문(鄭性文) |
출생 | 1895년(수행담록 1893.05.22). |
출가 | 1904년 |
입적 | 1974.01.24. (세수82세, 법랍71세) |
사찰 | 해인사 삼선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치인리 38(치인리 1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성문스님은 삼선암 반야선원 개원을 개원하고 비구니스님으로서는 최초로 교구본사인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팔공총림인 동화사 주지스님을 역임했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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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경남 합천 출생 |
1904 | 해인사 삼선암에서 보찬(普讚)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14 | 호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26 | 해인사 국일암 강원 졸업 |
1928 | 직지사 서전, 동화사 부도암 선방 개설 |
1945 | 삼선암 반야선원 개원 |
1954 |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
1955 | 비구니 최초로 교구본사 동화사 주지 역임 |
1974. 1.24 | 해인사 삼선암에서 입적(세수 82세, 법랍 71세) |
문 중 | 계민(戒珉)문중 |
수행지침 | 언어보다는 진실한 실천자가 참수행인이다. 무무무(無無無)자 화두(話頭)로 일관 |
생활신조 | 교육 없이 교화 없다. 배워야 한다. |
수계제자 | 수한·태호·태희·광우·태경·태응·태현·태민 |
활동 및 공헌
출가
혜월(慧月) 성문(性文)스님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승산리에서 1893년 5월 22일 아버지 정형오 거사와 어머니 묘법화보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이고, 이름은 정성문이며, 보월당 정행(淨行)스님의 언니이다.
집안의 권속들 중에 해인사와 가까운 지연(地緣)으로 불문(佛門)에 계신 분이 몇 분 되었는데, 스님의 나이 10살 때 부모님이 한 해에 모두 돌아가시게 되자, 2년 뒤에 스님도 인연 출가를 하였다.
20세에 삼선암의 창건주이신 정보찬(鄭普讚)스님을 은사로 호월스님을 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수지하셨으며 국일암에 계시던 타불스님으로부터 대교과를 마쳤다.
스님은 어린 시절에 이미 ‘말 없는 앞산이 변할지라도 내 마음은 결코 변치 않으리’라는 입지를 세우고 젊은 시절부터 운수행각을 하였다. 어떤 때는 불사(佛事)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머물고 떠남의 지혜를 알았던 스님은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는 일은 오직 신심 납자가 자성의 자리를 보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직지사 서전, 동화사의 부도암에 선방 개설
36세 때에는 직지사 서전(현재 화재로 소멸)을, 다음에는 동화사의 부도암을 선방으로 개설하여서 후학의 공부를 도왔다.
동화사 주지 역임
종단에서 정화불사로 불교계가 어수선하던 때, 스님은 동화사가 정화되자 초대 주지로 취임하였다. 취임 후 백일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새로 짓는 등 도량불사를 마쳐놓고 1년 만에 부처님 탁자 위에 사직서를 써 놓고는 나왔다.
정토발원
스님은 선(禪)을 하시는 중에서도 정토(淨土)발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해제 철만 되면 잡담을 자제하고 염불할 것을 독려하며 염주 바구니를 들고 앉았다. 그러면 도반스님들과 함께 백만 독을 목표로 기도에 들어갔다. 끝나고 나면 또 시작해서 손톱이 갈라지고 살갗이 벗겨져서 반창고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후학들에게 배움을 장려
스님은 손주 상좌들에게도 ‘요즈음은 공부를 해야 포교도 하고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다.’고 하며 학교에 다니는 것을 장려하였다. 비구니 강사와 포교사가 드물던 시절에 현재 운문사 강주스님이 서봉사에서 법화경 산림 법회를 하시면, 우리 비구니가 법문하는 것은 우리가 들어야 한다.’고 무더위도 고사하고 땀을 흘리며 고개를 넘어 와 청강을 하였다. 당신의 문도들에게 ‘비구니도 법맥을 알고 계보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였는데, 일찍부터 선지자적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세연(世緣)이 다해서 자리에 누웠을때도 본연(本然)의 자리를 챙기는 것을 잊은 적이 없으며,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더욱 용맹정진하였고 대중운력이 있으면 나와서 함께 김치 거리를 다듬곤 하였다.
입적
입적하기 사흘 전, 이미 정신이 없을 때에도 자리에 누운 채 허공을 향해 활개 합장을 하였다. 옆에서 시봉하던 스님이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어 보니 “인로왕보살이 날 데리러 반야 용선을 타고 오셨어”라고 대답하였다.
1974년 1월 24일, 가야산 봉우리 한 언저리에는 흰 눈이 아직 쌓였고 양지에는 제비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 이른 봄날, 성문스님은 만물이 소생하는 소식을 전하는 곳으로 떠났다. 세수는 82세세요, 법랍은 71세였다.
수계 제자로 수한·태호·태희·광우·태경·태응·태현·태민스님 등이 있다.
- 운문회보 발취 : 불기 2530년 (1986년 7월 15일) 제 17호
삼선암
삼선암(三仙庵)은 해인사 산내암자로 가야산 삼선봉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학사대 서쪽 해인사 강원의 운동장 북편 채전(菜田)자리에 자홍(慈洪)스님이 최초로 창건하였으나 큰절 뒤쪽이라는 이유로 1893년에 현 위치로 옮기고, 삼선봉 밑에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삼선암으로 지었다. 1905년 보찬(普讚), 지승(智崇)스님이 확장하였으며, 1955년 혜안(慧眼)스님이 도감에 취임하여 1957년 요사채를 80평으로 확장했다. 1961년에 인법당을 중수하고, 1963년에 칠성각을 중창했으며, 1981년에는 선원 15평을 42평으로 증축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선불장과 후원 요시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선암 반야선원(般若禪院)은 1945년 정성문 스님이 개원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이 선방에서 참선에 들었다고 한다. 성문스님은 삼선암에 선원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뒷방에 달마상을 걸어놓고 몇 명이 함께 모여, 안으로는 입·방선의 죽비를 쳐서 인(因)을 쌓고 밖으로는 지장계를 결성하고 화주를 하여 시중에 들어놓는 연(緣)을 맺음으로써 지금의 삼선암이 어엿한 선원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08~111.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69.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2』, 예문서원 (2009년, p101~114)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36~138.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42~52
삼선암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81-24(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38)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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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性文)스님 | 본항목 | 성문스님(性文, 1893~1974) | 性文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문스님(性文,_1893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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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性文)스님 | 계민(戒珉)문중 | ~의 일원이다 | |
성문(性文)스님 | 보찬(普讚)스님 | ~의 제자이다 | |
성문(性文)스님 | 해인사 삼선암 | ~에서 출가하다 | |
성문(性文)스님 | 호월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
성문(性文)스님 | 직지사 서전 | ~에 선빙을 개설하다 | |
성문(性文)스님 | 동화사 부도암 | ~에 선방을 개설하다 | |
성문(性文)스님 | 해인사 삼선암 반야선원 | ~을 개원하다 | |
성문(性文)스님 | 한국불교정화운동 | ~에 참여하다 | |
성문(性文)스님 | 동화사 | ~주지를 역임하다 |
지도
- 해인사 삼선암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38(치인리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