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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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6일 (월) 11:04 판



정의

수옥(守玉)스님은 한국불교 비구니계 3대 강백중의 한 분으로, 선(禪), 교(敎), 율(律)을 두루 겸비하였고 내원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1 경남 진해 출생
1917 수덕사 견성암에서 법희(法喜)스님을 은사로 출가
1918 청월(淸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22 해인사 강원에서 사미니과, 사집과 이수
1929 서울 응선암에서 사교과, 대교과 수료
해인사에서 용성(龍城)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29~1933 견성암 5하안거 성만
1937 일본 미노니중학림(美濃尼衆學林)[1] 전문과정 3년 수료
1937~1940 상주 남장사 불교 전문강원 강사
1940~1946 견성암 7하안거 성만
1947~1950 서울 보문사 불교전문 강사
1951 충남 보덕사 주지
1954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제2회 임시종회시 종회의원
1955 양산 내원사 주지 취임,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 (4대역임)
1966 1966.2.7. 내원사에서 입적(세수 65세, 법납 49세)
문중 삼현문중(三賢)
수행지침 일상생활(日常生活) 가운데 선교쌍수(禪敎雙修)
생활신조 청량삼매(淸凉三昧) 속에 보살도 구현
상훈 조계종 총무원장과 경남도지사로부터 내원사 중건 공로상 수상(1959) 외 다수
저서 『화산집(華山集』, 천정산 내원사, 1990년(3판)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자호(慈毫)・자윤(慈允)・자장(慈藏)・도연(道鍊)자산(慈山)・향엄(香嚴)・자광(慈光)・덕겸(德謙)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法喜, 8)수옥(守玉, 9)→자호(慈毫, 10), 자윤(慈允, 10), 자장(慈藏, 10), 도연(道鍊, 10), 도연(道鍊, 10), 자산(慈山, 10), 자광(慈光, 10), 향엄(香嚴, 10), 평타(平陀, 10), 덕겸(德謙, 10)

활동 및 공헌

출가

화산(華山) 수옥(守玉)스님은 1902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정유금이다. 16세에 수덕사에서 비구니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 때 스승 법희스님은 만공 화상으로부터 전법을 받으신 직후였다. 만공 큰스님과 법희스님은 일찍이 수옥스님의 법기(法器)를 알아채셨다.

[앞줄 왼쪽부터 수옥스님, 임재명스님(당시 주지스님), 혜봉스님 가운데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지호스님, 광우스님 뒷줄 맨 왼쪽 기형스님, 세 번째 견성암 수연스님]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167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68
[내원사에 있는 수옥스님 부도] 사진출처: 다음블로그 https://blog.daum.net/lss3293/6981369

수행 및 교육

수옥스님은 만공선사로부터 ‘석가와 미륵도 중생의 종인데 그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결택받아 참선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만공선사는 당시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화두 결택과 법거량을 하셨다. 따로 법상을 마련하여 법을 펴신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제자들의 공부를 점검하고 화두를 내리셨다. 이후 수옥스님은 비구 청월(淸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으며, 21세에 해인사 고경(古鏡)스님 밑에서 사집과를 수료하고 1929년 28세에 대은(大隱)스님에게 사교과와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그해 용성(龍城)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으며 수덕사 견성암에서 5안거를 성취하고 33세에 일본 경도시 묘심사파의 종립학교에 입학, 36세에 졸업하고 돌아와 경북 상주 남장사에서 강사를 3년간 역임했으며 39세부터 수덕사 견성암에서 정진 중 견처를 얻게 되었다.

한편 스님은 만행 중에 들린 내장사에서 득법의 경지를 보였다.


        올연(兀然)히 앉아있는 자재로운 나그네!
        생사 꿈을 깨고서 원적한 그 모습
        비바람 종일토록 휘몰아치는데
        원적(圓寂)한 그 경지가 부처의 경지일세.

이때 만공선사께서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이라고 기뻐하셨다.

서울 보문사에서 강사 재임

1947년 3월 서울 보문사에서 강사로 재임하여 3년간 비구니 교육에 열성을 보였으며, 비구니들의 의식을 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 즈음은 해방을 맞이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도 설레는 마음이 가시지 않은 때였으며, 승단도 도제양성(徒弟養成)에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시기였다. 스님은 승단 교육 불사의 고삐를 다시 고쳐 잡았다. 이때의 심경을 스님은 다음과 같이 표하였다.


       새해를 맞이하여 향사르고 비옵나니
       비바람 순조롭고 나라가 태평하며
       불일(佛日)은 더욱 빛나고 감로(甘露) 내리시어
       천하가 다 함께 재난이 없어지이다.

내원사 주지

그러나 새로운 각오와 흥분도 잠시, 강의를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50년 대교 수료식 날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수옥스님은 어쩔 수 없이 보문사를 떠나 충남 예산의 보덕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전쟁 이후 잿더미로 변해버린 경남 양산군 하북면 천성산 통도사 산내 사찰 내원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이후 내원사를 복원하고 동국제일학원(東國第一學院)을 건립하는 등 오늘의 내원사가 있기까지 스님의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11년에 걸친 긴 세월이었으며, 스님의 정열을 힘껏 쏟아부은 원력보살로서의 삶이었다.

수옥스님은 내원사를 새로 중창하고 절을 꾸려가는 감회를 시로 표현하였고, 경봉선사께서는 그 시에 차운(次韻)하셨다.


       확연히 쇠락한 무위무사객(無爲無事客)이
       어떤 인연으로 천성산(千聖山)에 살게 되었는지
       사업이 인연 따라 성취되니
       소박한 흉금(胸襟)이 도처에 한가롭네.

       절개(節槪)지켜 닦은 마음 옥(玉) 같이 맑은데
       옛 절터 천성산(千聖山)에 새로 절 지었네.
       도의 광명 지혜의 더 깊기가 바다인 듯
       일을 기필코 이룩하니 뜻이 한가롭네.

       천성산(千聖山) 지혜광명 맑게 빛나
       겁(劫)밖의 소식 세상사람 경탄하네.
       지란(芝蘭)이 청초하게 동산에 자라고
       우주에 봄이 깃들어 사해(四海)가 화평하네.
       떠오르는 태양에 버들개지 움트고
       찬 매화 미소하며 향기소리 흘리네.
       그대의 덕(德)은 산에 묻힌 옥(玉)과 같아
       새로 지은 암자에서 도(道)가 절로 밝네.

       천성(千聖)에 빛을 뿜으니 겁외(劫外)까지 쾌청해
       이 빛 비치는 곳 마구니들 놀래니
       물려받은 신령한 땅에 선객(禪客)들 모여 사니
       도업(道業)은 번창하여 불일(佛日)은 빛나리.
       시냇가 봄버들 싱싱하게 물오르고
       우짖는 새소리 낙원의 정경
       큰 꿈도 꿈 없을 만 못하고
       복 짓는게 어디 지혜(智慧)의 등불 전함에 비하랴.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내원사는 수옥스님의 원력으로 독립된 비구니 선원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다. 이렇게 수옥스님의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처(處)가 된 내원사는 그 후 만공선사의 법제자인 법희스님과 선경스님 등 많은 선지식과 납자들의 정진처가 되었다.

입적

스님은 선교는 물론 입전사상(入纏思想)에도 투철했으나, 세연을 다했음인지 1966년에 들어서서 약간의 미질을 보이더니 2월7일 육신의 허울을 벗어던지기에 이른다. 세수 65세요, 법랍 48세였다. 스님의 유훈을 받들고 있는 수제자로는 자호(慈毫)・자윤(慈允)・자장(慈藏)・도연(道鍊)자산(慈山)・향엄(香嚴)・자광(慈光)・덕겸(德謙)스님 등이 있다.

『화산집(華山集)』

『화산집(華山集)』은 수옥스님의 한시(漢詩)문집인데, 당시만 해도 비구니스님이 문집을 남기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문집은 문도들이 스님의 49재에 맞춰 출간하려고 서두른 탓에 몇몇 군데 누락 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발간하였다.

『화산집(華山集』은 총 56편의 한시를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외에 간찰(簡札) 3편 화산 수옥비구니 행력, 법제자 법계 명성의 ‘스님 영전에’, 그리고 문도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산집(華山集』의 시 부분을 내용적으로 크게 나누어보면, 내원사 동국선원 중창 이전과 이후로 대별(大別)할 수 있다. 상반기로 볼 수 있는 1917-1954년까지의 기간은 북방에서의 삶의 대스승이신 만공선사에 관한 시와 덕숭산 견성암 수행시(修行詩) 몇 편, 금강산 수행시 6편, 우음 5편, 만행(萬行)을 할 때 읊은 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후반기는 내원사에 취임한 1955년부터 1965년 64세로 입적할 때까지 쓴 것으로 약 26편의 작품이 있으며, 그 분량은 문집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이 시기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는 내원사로 국한되어 있으며, 내원사의 중창과 감회를 읊은 것이 대부분인데, 안거 수행시로는 수작(秀作)으로 평가받고 있다.

명성스님 건당식

1983년 3월 21일 천성산 내원사에서는 통도사 조실스님으로 계신 월하(月下)스님을 모시고 통도사 주지스님 그리고 그 외 비구니 중진스님들이 입석한 자리에서 고 화산당(華山堂)수옥스님의 상좌이며 현 내원사 주지인 자광스님의 주선으로 비구니계에서는 보기 드문 건당식이 수옥스님의 문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약 30년 전 한국 비구니계에는 삼대 강사이며 법사인 금광스님, 혜옥스님, 수옥스님이 계셨는데, 일찍이 금광스님의 주선으로 광우스님이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건당식을 거행하였고, 그 후 운문사 학장 명성스님이 두 번째로 건당을 받는 자리였다.

월하스님께서 고 화산당수옥스님이 남긴 화산유고 중 한 게송을 전법게로서 법계당 명성스님에게 대신 전하였는데, 그 게송은 다음과 같다.


       명명활로입사신(明明活路立斯身)
       천하총림시아린(天下叢林是我隣)
       일자파제유류견(一自破除有漏見)
       도연무사임유인(都然無事任遊人)

       밝고 밝은 한 길에 이 몸 세우니
       천하의 수도장이 다 내 것일세!
       먼지 낀 소견을 깨어 버리고부터
       아무 일도 할 것 없이 노니는 사람이여.

평소 수옥스님을 존경하던 명성스님은 수옥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법제자가 되고 싶어 하였는데, 그 뜻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스님이 빙그레 웃음으로써 사실상 생전에 허락을 받은 셈이었다.

1966년 약간의 숙환을 보이던 수옥스님은 2월 7일 홀연히 입적하였고, 17년 후 상좌 자광스님이 율사스님과 조실스님께 여쭈어 절차와 형식을 갖춰 건당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명성스님은 '선가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법을 전해 주는 것을 사조(詞祖)라고 하며, 교가에서는 교법을 잇는 것을 전교(傳敎)라고 하는데, 수옥스님의 법을 전수받게 됨에 따라 반딧불보다 작은 나의 지혜로 수미산만큼이나 큰 법을 계승한다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술회했다. 또 '새로 입산하는 기분으로 다시 배운다는 자세로 돌아가 더욱 더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면서 청량국사의 게송을 벌어 화답하였다.


       아금욕이일모지(我今欲以一毛智)
       측량무량법계공(測量無邊法界空)
       원승삼보동체자(願承三寶同體慈)
       구구명부제불의(句句冥府諸佛意)

       내가 이제 한 터럭과 같은 지혜로써
       무량한 법계 공을 헤아리고자 하오니
       삼보의 동체자비를 받들어서
       구구마다 제물의 뜻에 명부하기를 원하오이다.

그리고 수옥스님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 더 한층 후학들을 위해 유통교해 하는 데 조그마한 등불이 될 것을 다짐하면서 건당식을 마쳤다. ※ 운문회보 발취 불기 2527년 (1983년 4월 15일) 제 4호

양산 내원사

[내원사 전경] 사진출처: 네이버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3383&cid=46648&categoryId=46648

홈페이지 : http://www.naewon.or.kr/

내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로서 수려한 산수와 6Km에 달하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제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천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300여 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성사께서 창건하신 절이다.

1898년 석담유성(石潭有性) 선사가 설우(雪牛), 퇴운(退雲), 완해(玩海) 등과 더불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여 절 이름을 내원사로 개칭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 명명한 후 선찰로써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경허선사의 법제자인 혜월선사께서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운봉, 향곡선사 등 한국 선종사의 선맥을 잇는 명안종사를 배출한 도량이다.

6ㆍ25사변으로 사원이 전소되자, 비구니 수옥스님의 원력으로 10년 만에 독립된 비구니 선원으로써 새롭게 중창되었다. 그 후 만공스님의 법제자인 법희, 선경스님등 납자들의 정진처가 되었다. 1979년 도용스님을 입승으로 모시고 18명의 스님들이 모여 삼년결사를 시작한 이후 1999년 여섯 번째 회향을 하였고 지금도 비구니 선객의 정진도량으로 선불장이 되고 있다.

원효대사와 비구니 수옥 스님의 이야기

1,300여 년 전 원효대사는 중국 태화사(太和寺)에서 건너온 1천 명의 대중들을 이끌고 이 산으로 들어와 대둔사(大屯寺)와 89개의 암자를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의 암자 가운데 상ㆍ중ㆍ하 내원암이 있었는데 조선후기에 발생한 큰 수해로 대둔사와 89암자 대부분이 유실되고 하내원암만 남아,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내원사로 법등을 잇게 된 것이다. 한말에는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는 선찰(禪刹)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6.25로 소실되고 말았는데, 오늘날의 내원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시기에 이룩한 비구니 수옥(守玉) 스님의 업적이다. 스님은 어려운 시절에 전쟁으로 폐허화된 내원사를 중건하고 단절된 선원을 복원하여, 오늘날 명실공히 내원사를 비구니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일구어낸 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원으로서 내원사는 근대 경허(鏡虛) 스님의 법제자인 혜월(慧月) 선사가 조실로 주석하며 운봉(雲峰)ㆍ향곡(香谷)ㆍ명안(明眼) 선사 등 한국 선종사의 선맥(禪脈)을 잇는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수행도량으로서의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오늘날에도 ‘동국제일선원’으로서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으며, 눈 푸른 선승들의 수행공간 구실도 아울러 담당하고 있다.

예산 보덕사

[보덕사 극락전]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parksb44/222346948181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본래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던 가야사(伽耶寺)를 승계하여 1871년(고종 8)에 창건하였다.

가야사에는 금탑(金塔)이라 불리는 지극히 빼어난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그 탑의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절의 터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에 의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1840년(헌종 6)에 가야사를 불사르고 아버지인 남정군(南廷君) 이구(李球)의 묘를 썼다. 그 뒤 아들 고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그 보은의 뜻으로 현 위치에 절을 짓고 보덕사라 하고 벽담(碧潭)을 주지로 삼았다.

6·25 때 소실되었으나 1951년 2월에는 비구니 수옥(守玉)이 중창하였고, 1962년에는 비구니 종현(宗顯)이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과 칠성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현대식으로 지은 2층의 강원(講院)이 있다. 극락전 앞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3호로 지정된 석등이 있고, 절 옆 70m 지점에는 관음암(觀音庵)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을 모방하여 최근에 세운 비구니 묘리법희선사탑(妙理法喜禪師塔)과 비가 있다.


수옥스님 행력 보완자료: 비구니 화산수옥(華山守玉, 1902~1966) 행장

비구니 수옥은 1902년 11월 12일 경남 진해시 자은동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정유전(鄭有全)이다.

① 세속적 삶보다 깨끗하고 걸림 없는 수도생활을 사모하는 그는 1917년 집을 나와 해인사를 거쳐 덕숭산 정혜사 견성암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1918년 묘리법희(妙理法喜, 1887~1977)를 은사로, 청월(淸月)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다.

② 이후 1923년까지 견성암에서 법희에게 화두를 결택받아 정진하다가 1924년부터 1927년 상반기까지는 해인사 강원, 즉 덕원고경(德元古鏡, 1882~1943)의 문하에서 사미·사집과를 수료한다. 첫 한시인 「甲子春 於海印寺講院」을 지음.

③ 1927년 최초로 개설된 비구니 선원 견성암에서 그해 동안거부터 1930년 하안거까지 3년간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과 법희의 지도 아래 수선안거하면서 1929년 해인사에서 용성진종(龍城震鍾, 1864~1940)에게 비구니·보살계를 수지한다.

④ 1930년 하반기부터 1935년 8월까지 서울 수송동에 위치한 각황사에서 소하대은(素荷大隱, 1899~1989)에게 사사받아 사교·대교과를 졸업하고 전강을 받는 동시에 1934년과 1936년의 동안거를 경성부 중앙선원, 즉 만공의 회상에서 수선한다.

⑤ 1937년 2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등의 사찰을 순례·참배한 다음, 오사카 일련종 사찰인 호주지寶樹寺에서 1939년 2월까지 1년 이상 공부한다. 그리고 1939년 3월 기후현 岐阜県에 위치한 텐이지天衣寺·미노니슈카쿠린美濃尼衆學林의 4학년에 편입하여 2년 전문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한다.

⑥ 1941년 초 일본에서 귀국한 후, 견성암에서 하안거를 마치며, 1941년 하반기부터 1944년까지 혜봉용하(慧峰龍河, 1874~1956)의 초빙을 받아 최초의 비구니 전통강원인 남장사南長寺 관음강원觀音講院에서 첫 비구니 강사로서 강의한다.

⑦ 일본의 강제징집을 우려해 관음강원이 폐원된 1944년 이후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와 1945년 11월부터 1948년 2월까지 수선안거한다.

⑧ 1948년 2월 이후부터 1950년 6.25 전쟁 이전까지 약 3년간 서울 탑골에 위치한 보문사 비구니 전문강원에서 불교 내전을 맡아 강의한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의 발발로 보문사 비구니 전문강원이 폐원되자, 잠시 충남 공주 마곡사麻谷寺 영은암靈隱庵으로 피난을 간다.

⑨ 1951년~1954년 마곡사 주지로부터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분 소실된 충남 예산군 보덕사報德寺에 주지로 임명받아 보덕사를 중창한다.

⑩ 1954년 11월 3일, 임시종회에 비구니들의 대표로 참석하다(총 10명: 정금광, 정수옥, 이인홍, 이성우, 이연진, 안혜운, 강자호, 배묘전, 배묘찬, 유혜춘), 12월 13일, 경무대 시위에서 견성암 비구니들과 함께 선두에 앞장서다.

⑪ 1955년 3월 15일, 경남 양산군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 주지로 취임하다. 6월 23일, 전국승려대회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다.(총 66명 가운데 비구니는 10명) 8월 12~13일, 조계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에 참가하고, 불교정화 임시종회의원으로 선출되다. 이후 임시 종회의원은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가 설립되기 이전까지 연임되다.

⑫ 1957년 4월~1965년 10월까지 경봉선사와 한시로 13차례 교유하다.

⑬ 1959년 4월 내원사 ‘선해일륜禪海一輪’이 낙성되어 비구니 전문 선원인 ‘동국제일선원’을 개원하다. 그 낙성식은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의 주최 아래 설행되었고 대중 5,000명이 모였다. 그리고 경상남도 도지사(김규진)로부터 ‘내원사 중창 공로상’을 받다.

⑭ 1962년 8월 15일,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로부터 ‘문화재보호공로상’과 ‘문화훈장’을 받다. 8월 26일,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에서 제1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출되다.

⑮ 1964년 12월 20일, 조계종 종정인 효봉원명(曉峰元明, 1888~1966)으로부터 ‘내원사 중창공로상’을 받다.

⑯ 1965년 6월 25일, 조계종 종정 효봉원명으로부터 ‘모범승려표창장’을 받다.

⑰ 1966년 2월 7일(음), 내원사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나는 이미 세상 인연이 다했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출가한 초심을 저버리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 조용히 입적하다. 세수 65세, 법랍 49세-

  • 1966년 4월 15일 경봉의 증명 아래 문도들이 남긴 한시 원고를 모아 이종익 한글번역으로 『화산유고』라는 한시집을 발간, 1990년, 1996년 석명정 편역으로 『화산유고』를 증보한 『화산집』 발간

자료제공: 김홍미(원과 스님), (사) 한국불교연구원 일반연구원

제공일자: 2023. 12. 24.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수옥(守玉)스님 본항목 수옥스님(守玉, 1902~1966) 守玉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옥스님(守玉,_190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수옥스님(守玉)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수옥스님(守玉) 법희스님(法喜) ~의 수계제자이다
수옥스님(守玉) 수덕사 견성암 ~에서 출가하다
수옥스님(守玉) 청월스님(淸月)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수옥스님(守玉) 용성스님(龍城)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수옥스님(守玉) 양산 내원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수옥스님(守玉) 양산 내원사 ~을(를) 중창하다
수옥스님(守玉) 예산 보덕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수옥스님(守玉) 안거 ~을(를) 성만하다 예산 수덕사 견성암 등

지도

  • 내원사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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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일본 교토시(京都市) 묘심사의 불교종립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