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진종(龍城震鐘)
- 법호·법명 : 용성진종(龍城震鐘 : 1864~1940)
- 생애·업적
불교의 대중화, 전통불교의 수호와 재창조에 매진하면서 대각교(大覺敎) 운동을 펼친 백용성(白龍城)스님은 1864년 5월 8일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현재 지명)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 법호가 용성 이다.
1877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꿈에서 부처를 만나는 계시와 생사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려고 남원시 교룡산성의 덕밀암(德密庵)으로 출가를 단행했다. 당시 덕밀암 혜월(慧月)스님은 상규 소년에게 ‘진종’이라는 법명과 ‘용성’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그러나 용성은 부모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용성 스님은 1979년 16세 때 해인사 극락암으로 재출가를 단행하여 은사 화월 스님, 계사 혜조(慧造) 스님을 모시고 머리를 깎았다. 그해 스님은 선지식을 찾아 의성 고운사로 가서 수월영민(水月永旻) 스님을 뵙고 대비주를 염송하여 업장을 소멸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1882년 19세 때 대비주를 염한 스님은 파주(당시는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서 제1차 깨달음을 얻어 다음의 오도송을 남겼다.
오온 산중에 소를 찾는 나그네가
텅 빈 집에 둥근 달이 훤히 비치는데 홀로 앉았도다.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은 이것이 누구의 도이랴
일단 이뭣고의 불꽃이 대천 번뇌를 태우는구나.
五蘊山中尋牛客 (오온산중심우객)
獨坐虛堂一輪孤 (독좌허당일륜고)
方圓長短誰是道 (방원장단수시도)
一團火焰燒大千 (일단화염소대천)
용성 스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1883년, 20세 때 금강산 표훈사로 가서 무융(無融) 스님을 뵙고 무자화두를 받아 계속 정진했다. 스님은 1884년 다시 보광사로 돌아와 무자화두를 참구하던 끝에 제2차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번뇌의 구름을 헤쳐 안개를 잡고 문수를 찾아
비로소 문수에 이르러 보니 확연히 비었더라.
색색공공이 다시 공으로 돌아가며
공공색색이 거듭하여 다함이 없도다.
排雲獲霧尋文殊 (배운획무심문수)
始到文殊廓然空 (시도문수곽연공)
色色空空環復空 (색색공공환부공)
空空色色重無盡 (공공색색중무진)
1884년 스님은 통도사로 가 금강계단에서 선곡(禪谷)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송광사로가 삼일암에서 하안거를 지내며 《전등록》을 열람하다가 ‘월사만궁 소우다풍(月似彎弓 小雨多風)’ “달은 굽은 활과 같고 비는 적은 데 바람만 많구나”라는 구절에서 홀연히 본분사를 꿰뚫는 깨달음을 얻었다. 제3차 깨달음이었다. 1885년 스님은 가야산 해인사로 돌아와 당시의 깨달음의 경계를 노래했다.
스님은 사교입선이 아닌 깨달음의 경지를 점검하려고 경전 및 선사들의 어록을 보았다. 참선하고 경전 공부하고 다시 참선하고 조사어록을 보고 계속 눈밝은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깨달음을 심화하였다. 그것은 깨달음의 확인과 점검 과정이었다.
드디어 용성 스님은 1886년, 23세 때 낙동강을 건너는 뱃전에서 마지막으로 확철대오하는 제4차 깨달음에 들어선다. 다음은 그때의 오도송이다.
금오산에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에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예와 같이 갈대꽃에서 잠을 자도다.
金烏千年月 (금오천년월)
洛東萬里波 (낙동만리파)
魚舟何處去 (어주하처거)
依舊宿蘆化 (의구숙로화)
이후 스님은 4년 동안 산중에서 철저히 행방을 감추고 운둔생활을 하다가 1900년 경허의 선풍이 몰아쳤던 천장암과 만공의 선기가 살아 있는 정혜사로 갔다. 정혜사에서는 천진도인 혜월(慧月)스님과 법거량을 나누었다. 1901년 해인사로 돌아와 당시 퇴설선원 원주 제산(霽山)스님과 법거량을 하였다.
1901년 성주군 수도암에서 동안거, 1902년 화엄사 탑전에서 하안거, 선암사 칠전에서 동안거에 참여하고 1903년 지리산 상비로암에서 선회를 개설한 다음 금강산 불지암에서 동안거를 치렀다. 1904년 철원 보개산 성주암에서 선회를 개설했으며 1905년 보개산 관음전을 보수, 건립하고 보개산 석대암에서 선회를 개창 했다. 그해 스님은 서울로 상경, 망월사 법회에 참석하여 대중들에게 상당법문을 내렸다.
1906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하안거를 지냈고, 1907년 서울 구기동 법천암(法泉庵)에서 선원을 개창한 이후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1908년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했다. 1909년 46세 때 해인사 원당암에서 미타회를 창설했다. 참선 수행과 정토에 태어나려는 선정일치의 실천행을 행하는 모임으로 이는 염불선에 대한 모색으로 생각된다.
1910년, 47세 때 지리산 칠불선원 종주(宗主)로 피임되면서 역경을 위한 준비와 《귀원정종(歸源正宗)》 집필을 시작했다. 1911년 서울로 상경, 서울 우면산 대성초당에 주석하면서 신도(강영균) 집에서 참선법규를 제정, 시행하고 1914년 대각사에 선종 포교당을 개설하였다.
1919년 56세에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1920년 불교의 대중화 및 혁신을 구상, 불경 번역사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했으며 1921년 서대문 감옥에서 출감, 역경사업의 조직체인 삼장역회를 조직했다.
1924년 《불일》지 창간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정진 중 사리 1과가 나와 해인사 용탑에 보존하였다. 1925년 62세 때 도봉산 망월사에서 전통 불교의 수호와 재창조를 위해 수선 납자들을 중심으로 한 ‘만일참선결사회’를 열었다. 1927년에는 승려의 대처 육식 금지를 요구하는 건백서를 제출하였고, 통도사 내원암으로 만일참선 결사회를 이전했다.
1927년 64세 때 경남 함양의 백운산에 화과원을 설립하고 선농불교를 실천하였으며, 그해 대각교를 선언하고 만주 용정에 대각교당(선농당)을 개설했다. 1929년 대각교당에서 선회를 개설했으며 1931년에 선학원 조실을 역임했다. 그 후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역경 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많은 불교서적을 번역 간행하였다.
1940년 1월 15일 용성 스님은 제자 동헌(東軒) 스님을 불러 부처님 열반일인 2월 15일에 입적할 것이니 인연 있는 사찰에서 몸을 버리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찰의 눈치를 보던 각 사찰이 한사코 마다하는 바람에 스님은 다시 2월 24일에 가겠노라고 했다. 용성 스님은 약속한 대로 제자 동헌이 지켜보는 가운데 1940년 2월 24일 새벽 “시자여, 대중이여 그동안 수고했도다. 나는 간다.”라는 말을 마치고 고요히 입적하였다. 다음은 스님의 임종게이다.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이 다 고요하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히 누웠다.
諸行之無常 (제행지무상)
萬法之俱寂 (만법지구적)
匏花穿籬出 (포화천리출)
閑臥麻傳上 (한와마전상)
용성 스님의 문하로는 동산(東山)·동암(東庵)·인곡(仁谷)·운암(雲庵)·혜암(慧菴)·소천(韶天)·고암(古庵)·자운(慈雲)·동헌(東軒)스님으로 일컬어지는 9명의 제자가 있다. 이른바 용성문하구제(龍城門下九弟)다.
스님이 평생 동안 번역 간행한 저술은 이렇다. 《귀원정종》 《불교입교문답》 《심조만유론》 《금강경》 《수능엄경》 《팔상록》 《금비라동자위덕경》 《총지경》 《수심정로》 《선문촬요》 《원각경》 《대각교의식》 《육자영감대명왕경》 《조선글화엄경》(12권) 《조선어능엄경》 《팔양경》 《각해일륜》 《대승기신론》 《각설범망경》 《청공원일》 《석가사》 《수심론》 《임종결》 《오도의 진리》 《지장보살본원경》 등이다. 용성 스님의 행적비가 해인사 용탑선원 남쪽에 세워져 있다. 한용운 스님이 찬문(撰文)한 것이다.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381~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