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일연스님(一衍, 1947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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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강원과 대학을 졸업한 것뿐인지라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이 드는데 도대체 이런 내가 어떻게 후학들을 가르칠 수가 있을 것인가? 섣불리 가르친다고 나섰다가 학인들 앞에서 실수나 하지 않을까?’
 
‘이제 겨우 강원과 대학을 졸업한 것뿐인지라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이 드는데 도대체 이런 내가 어떻게 후학들을 가르칠 수가 있을 것인가? 섣불리 가르친다고 나섰다가 학인들 앞에서 실수나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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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생각 끝에 스님이 내린 결론은 대중과 함께 살면서 소임도 살고 공부도 더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도반인 대우스님과 정업스님의 영향이 컸다. 정업스님은 노골적으로 ‘스님이 무슨 실력이 그렇게 있다고 벌써부터 학인을 가르치느냐?’ 하고 반문했다. 스님은 정신이 아찔했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스님이 내린 결론은 대중과 함께 살면서 소임도 살고 공부도 더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도반인 대우스님과 정업스님의 영향이 컸다. 정업스님은 노골적으로 ‘스님이 무슨 실력이 그렇게 있다고 벌써부터 학인을 가르치느냐?’ 하고 반문했다. 스님은 정신이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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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91년부터 1994년에 이르는 동안 불교 방송 ‘자비의 전화’를 진행하면서 라디오를 통한 중생교화를 펼쳤다. 스님은 비록 교리 중심의 프로그램이지만 직접 전화를 걸어온 청취자들에게 사업이나 가족문제에 관해 상담해준 일,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상담을 한 일 등이 기억에 남으며 무척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자신의 수행이 남을 위하면 이타가 되며, 결국 그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감사했고 굉장한 수행이 되었다.
 
또한 1991년부터 1994년에 이르는 동안 불교 방송 ‘자비의 전화’를 진행하면서 라디오를 통한 중생교화를 펼쳤다. 스님은 비록 교리 중심의 프로그램이지만 직접 전화를 걸어온 청취자들에게 사업이나 가족문제에 관해 상담해준 일,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상담을 한 일 등이 기억에 남으며 무척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자신의 수행이 남을 위하면 이타가 되며, 결국 그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감사했고 굉장한 수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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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한 스님은 같은 해 조계종 개혁회의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95년부터 다음해까지 불교방송국에서 『능엄경』을 강의하였다.
 
1994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한 스님은 같은 해 조계종 개혁회의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95년부터 다음해까지 불교방송국에서 『능엄경』을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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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동학사에 처음 부임하여 암자의 부처님들께 인사차 들렀는데 남매탑은 너무 멀리 있어 추석 산행 때 학인들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탑은 아주 좋은데 주변이 음습한데다가 불전함을 갖다 놓은 바람에 사람들이 초와 막걸리까지 올리고 도시락을 먹는 등 유흥장이 따로 없었다.
 
스님은 동학사에 처음 부임하여 암자의 부처님들께 인사차 들렀는데 남매탑은 너무 멀리 있어 추석 산행 때 학인들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탑은 아주 좋은데 주변이 음습한데다가 불전함을 갖다 놓은 바람에 사람들이 초와 막걸리까지 올리고 도시락을 먹는 등 유흥장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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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매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였다가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동학사에서 관리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30년 전에는 비구니스님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 스님이 떠나자 일반인이 거주하고 무속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탑 주변만큼은 적멸보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행히 정부에서 3억의 보조금이 나와 불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스님이 거주하고 있던 사람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언제든지 불사를 시작하면 비워주겠노라고 약속했고, 마침내 1996년 겨울눈이 펑펑 내리던 동짓달에 기공식을 하고 불사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남매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였다가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동학사에서 관리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30년 전에는 비구니스님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 스님이 떠나자 일반인이 거주하고 무속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탑 주변만큼은 적멸보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행히 정부에서 3억의 보조금이 나와 불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스님이 거주하고 있던 사람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언제든지 불사를 시작하면 비워주겠노라고 약속했고, 마침내 1996년 겨울눈이 펑펑 내리던 동짓달에 기공식을 하고 불사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2022년 6월 29일 (수) 08:57 판



정의

서안(棲岸) 일연(一衍)스님은 봉녕사와 동학사의 승가대학에서 전법과 포교활동에 전념했으며, 방치된 동학사 남매탑의 정비에 노력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경력

연도 내용
1947 강원 평창 출생
1965 용화사에서 원담(圓潭)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6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0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2 동학사 강원 졸업
1973 조계종 중앙교육원 제6기 교육 수료
1980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 졸업
1980~1981 석남사, 내원사 안거 성만
1980~1990 단일계단 1~6회 행자교육 습의사
1982~1984 석남사에서 3년 결사
1985~1986 호경스님 문하에서 유식학 이수
1986~1992 봉녕사 강원 중강
1992 묘엄스님으로부터 전강
1994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졸업
1995 행자교육 비구니 수계 산림갈마사
1995~1996 불교방송 『능엄경』 강의
1995~2000 동학사 학장 및 주지
2004 안심사 주지

인적사항

문중 삼현(三賢)
저서 및 작품 『능엄경 이야기』, 『인도불교사』 외 다수
수계제자 인목(仁牧)·인덕(仁德)·인성(仁性)·인욱(仁旭)·인호(仁晧)·인벽(仁碧)·인공(仁空)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서안(棲岸) 일연(一衍)스님은 1947년 5월 12일 강원도 평창군 평창면에서 아버지 오용근과 어머니 이종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며, 이름은 오금자이다.

한 스님이 목에 염주를 걸고 들어오는 태몽을 어머니가 꾸고 난 뒤 탯줄을 목에 걸고 태어난 일연스님은 동네 할머니들한테 염주를 걸고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당시 대부분이 그렇듯이 스님의 집안 역시 몹시 가난했다. 하지만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이 각별했던 어머니 덕분에 스님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을 불과 몇 달 남겨두고 살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버린 탓에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은 스님은 독학으로 사서를 배우고 공부를 계속하여 나중에는 사법고시 시험을 보고 싶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게 되었다.

스님은 당시 포교당 주지였던 이장호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장호 스님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게 되자 『사서삼경』을 계속 배울 수 있도록 진천 용화사를 소개해주셨다.

이에 스님은 진천으로 가서 이해송 스님에게 소학과 대학을 배웠다. 이때 이해송 스님이 『초발심자경문』도 함께 가르쳐주신 덕분에 발심의 기반으로 삼게 되었다.

일연스님은 출가한 다음해인 1966년 범어사 조실 하동산 스님에게 사미니계를 수지 받았고, 그로부터 4년 뒤인 1970년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모시고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수학

1967년 21살 되던 해 스님은 동학사 강원에 입학했다. 그때의 강원은 지금과 달라서 학인의 수가 많아야 열 내지 스무 명 정도였다.

출가한 다음해 봄날의 일이다. 용화사는 가난해서 땔나무조차 없었다. 그래서 스님을 포함하여 대중 대여섯 명이 산으로 솔방울을 따러 갔다. 그런데 산에 올라갔더니 저 멀리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동학사에서 집을 새로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해 동학사를 향해 내려간 일연스님의 귀에는 여러 스님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어렸을 적에 소풍 갔다가 서당에서 들었던 소리와 닮았던 그 낭랑한 독경 소리는 마치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그 이튿날 스님은 당시 강원을 졸업하고 노스님을 시봉하러 온 사숙님에게 전날 본 곳에 대해 여쭈었다. 그러자 사숙님은 산 너머 있는 그 절은 ‘동학사 강원’이라고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들은 스님은 은사스님에게 날마다 조르고 조르다가 나중에는 만약 안 보내주시면 도망가겠다고 떼까지 써서 그해 여름 마침내 강원을 가게 되었다.

그즈음 강원에서 하는 공부는 전부 한문이었다. 하지만 『사서삼경』은 물론 『초발심자경문』까지 마친 스님은 아는 글자가 많았던지라 매일같이 하는 공부가 그저 재미있고 너무 좋기만 하였다. 그렇다 보니 세상에 이런 공부가 다 있나 싶어 놀라기도 하였고, 하루에 두어 줄 배운 것을 온종일 읽고 또 읽어도 신심과 환희심이 저절로 솟구쳤다. 배고픈 것도, 씻는 것도 모두 잊고 오직 글 읽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여기며 살았다.

석남사 선방 입실

1972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곧바로 위암으로 투병 중이던 은사스님에게 달려가 시봉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2년 뒤 안타깝게도 은사스님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73년 조계종 중앙교육원 제6기로 학업을 수료하고, 1980년 동국대학교 승가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 무렵 동학사 주지인 봉민스님한테 동학사 중강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조실이셨던 호경 노스님께서도 경제적 문제는 상관하지 말고 홀가분하게 와서 공부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제의를 받게 된 스님은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 겨우 강원과 대학을 졸업한 것뿐인지라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이 드는데 도대체 이런 내가 어떻게 후학들을 가르칠 수가 있을 것인가? 섣불리 가르친다고 나섰다가 학인들 앞에서 실수나 하지 않을까?’

일연스님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스님이 내린 결론은 대중과 함께 살면서 소임도 살고 공부도 더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도반인 대우스님과 정업스님의 영향이 컸다. 정업스님은 노골적으로 ‘스님이 무슨 실력이 그렇게 있다고 벌써부터 학인을 가르치느냐?’ 하고 반문했다. 스님은 정신이 아찔했다.

석 달에 걸쳐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옛날 선방에 다니러 갔다가 뵈었던 입승스님과 석남사 유나스님이 느닷없이 꿈에 나타나는 등 여러 가지 인연으로 스님은 동학사로 가는 대신 석남사로 향하였다. 그때가 1980년 여름 결제 사흘 전이었다. 15일이 결제인데 방부도 안 들이고 바랑을 메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어째서 선방을 오게 되었느냐는 어른스님의 물음에 스님은 자신의 처지를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른스님은 쾌히 승낙을 해주셨다. 스님은 석남사에서 안거에 들어가 공양주를 자원해 맡으면서 해제 후에도 겨울까지 살았다. 그리고 뒤이어 내원사로 가서 두 철을 지냈다. 그 다음해 석남사에서 삼년 결사를 했다. 스님은 절에 공부하러 왔다가 출가를 하였듯이 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결사를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은사스님 없이 산철을 2년 동안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스님은 제방의 여러 아는 인연들에게 함께 살아주길 바라는 부탁을 받곤 했다. 그런데 그런 기대에 따르지 못하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서운한 마음을 안겨주게 되고, 또한 어느 한 곳에 소속하지 못하면 몸도 마음도 피곤하여 허송세월을 보낼 것 같다는 염려가 들었다. 그것이 스님이 결사를 하게 된 동기였다.

그러나 스님이 처음 선방에 갔을 때 전생에 참선을 하지 않았던지 다리가 너무 아팠다. 몸 조복도 안 되고 망상만 생겼다. 그래서 먼저 몸을 풀기 위하여 108배를 하고 또 하기를 되풀이했다. 그 것이 힘이 되어서 나중에는 삼칠일 용맹정진도 할 수 있었다. 칠일 용맹정진도 여간 아닌데 삼칠일 용맹정진을 할 때는 30분마다 한 번씩 포행을 돌았고 깜빡 졸면 혜암 큰스님의 경책을 받아가며 회향할 때까지 한층 더 분발했다.

용맹정진의 필요성을 절감한 스님은 삼칠일 용맹정진 결사를 두 번이나 하게 되었는데,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 일을 함께 한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과 격려 덕분에 이뤄낸 것이라며 지금까지도 대중들에게 고마워한다.

봉녕사승가대학 중강 소임

3년 결사를 끝낼 무렵인 1985년 당시 석남사에 주석 중인 인홍 노스님께서 강사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셨으나, 스님은 참선하던 곳에서 그런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마침 석남사에 계시는 범용스님께서 결사를 끝낸 스님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물으셨다. 스님은 대답했다.

“만약 제가 다시 공부를 한다면 봉녕사 강주로 계시는 묘엄스님 앞에서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범용스님은 묘엄 강주스님에게 스님의 뜻을 전하게 되었고, 마침 봉녕사에도 중강이 필요했기에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선방을 나오자마자 시작한 공부가 성글게 느껴져 스님은 1년 동안 사서와 일어를 더 공부한 뒤 동학사를 나와 대전에 머물고 계시던 호경 강주스님께 유식학을 1년간 배웠다.

이듬해인 1986년 스님은 봉녕사에서 중강을 맡았고, 묘엄 강주스님이 책을 펴신 지 7년 만인 1992년 전강을 받았으며, 1994년까지 봉녕사승가대학 강사를 역임한 후 1995년 동학사 강주 및 주지로 부임하였다.

한편 1980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단일 계단 제1회부터 6회까지 행자교육 습의사를 역임하였고, 1994년과 그 다음해인 1995년에는 행자교육 제6기 및 제8기의 교수사, 그리고 행자교육 갈마사와 비구니 수계산림 갈마사를 역임하였다.

포교활동

또한 1991년부터 1994년에 이르는 동안 불교 방송 ‘자비의 전화’를 진행하면서 라디오를 통한 중생교화를 펼쳤다. 스님은 비록 교리 중심의 프로그램이지만 직접 전화를 걸어온 청취자들에게 사업이나 가족문제에 관해 상담해준 일,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상담을 한 일 등이 기억에 남으며 무척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자신의 수행이 남을 위하면 이타가 되며, 결국 그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감사했고 굉장한 수행이 되었다.

일연스님

1994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한 스님은 같은 해 조계종 개혁회의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95년부터 다음해까지 불교방송국에서 『능엄경』을 강의하였다.

동학사로 부임한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가람 수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동학사 불사에 대해 한사코 자신은 한 일이 없고 먼저 주지스님과 강주스님께서 애를 많이 쓰셨다며 겸손해 하였다.

‘나는 다만 지어진 집을 쓸모 있게 고치는 내부 가람 불사만 했고, 굳이 의미를 부여할 일이 있다면 남매탑에 대한 발굴 조사와 남매탑 복원, 상원암 복원, 그리고 동학사지를 출판한 것뿐이다’고 애써 노고를 낮추었다.

심우정사는 원래 비구스님이 한 분씩 정진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를 봐주던 곳이다. 그런데 한 분이 너무 오랫동안 거주하다 보니 동학사에 속한 암자의 성격과는 다르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군다나 비구니 도량을 가로질러서 등산객들이 오고가는 것도 경내 분위기에 이롭지 못해 정리를 하게 되었다.

남매탑 복원불사

스님은 동학사에 처음 부임하여 암자의 부처님들께 인사차 들렀는데 남매탑은 너무 멀리 있어 추석 산행 때 학인들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탑은 아주 좋은데 주변이 음습한데다가 불전함을 갖다 놓은 바람에 사람들이 초와 막걸리까지 올리고 도시락을 먹는 등 유흥장이 따로 없었다.

남매탑

당시 남매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였다가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동학사에서 관리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30년 전에는 비구니스님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 스님이 떠나자 일반인이 거주하고 무속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탑 주변만큼은 적멸보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행히 정부에서 3억의 보조금이 나와 불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스님이 거주하고 있던 사람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언제든지 불사를 시작하면 비워주겠노라고 약속했고, 마침내 1996년 겨울눈이 펑펑 내리던 동짓달에 기공식을 하고 불사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을 벌였고 상원암 터를 닦아 현재의 상원암을 복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탑 앞에 건물을 지으려고 했는데, 옛 문헌에 따르면 그곳에 석불좌상이 있었다고 하여 좌상을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역사 자료를 발굴하다 보니 자연히 사지(寺址) 작업을 병행하게 되어 남매탑 복원과 함께 동학사지도 완성이 되어 1999년 회향하게 되었다.

일연스님은 2004년 현재 안심사 주지로 수행 정진 중이며, 수계제자로는 인목(仁牧)·인덕(仁德)·인성(仁性)·인욱(仁旭)·인호(仁晧)·인벽(仁碧)·인공(仁空) 스님 등이 있다.

다음은 스님이 쓴 몇 편의 시를 옮겨 온 것이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92~309.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68.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일연(一衍)스님 본항목 일연스님(一衍, 1947~ ) 一衍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일연(一衍)스님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일연(一衍)스님 원담(圓潭)스님 ~의 제자이다
일연(一衍)스님 용화사 ~에서 출가하다
일연(一衍)스님 동산(東山)스님(1890~1965; 비구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일연(一衍)스님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일연(一衍)스님 동학사 강원 ~에서 졸업하다
일연(一衍)스님 동국대학교불교대학 승가학과 ~에서 졸업하다
일연(一衍)스님 석남사, 내원사 ~에서 안거 성만하다
일연(一衍)스님 단일계단 행자교육 ~을 습의하다
일연(一衍)스님 유식학 ~을 이수하다
일연(一衍)스님 봉녕사 강원 ~에서 중강을 하다
일연(一衍)스님 묘엄스님 ~으로부터 전강받다
일연(一衍)스님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을 졸업하다
일연(一衍)스님 행자교육 비구니수계 산림 ~에 갈마하다
일연(一衍)스님 불교방송 ~에서 강의하다
일연(一衍)스님 동학사 ~에서 학장 및 주지하다
일연(一衍)스님 안심사 ~에서 주지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