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스님(大玄, 191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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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4일 (토) 17:07 판
대현(大玄)스님 | |
---|---|
법명 | 대현(大玄) |
법호 | |
속명 | 조인환 |
출생 | 1916.04.10. |
출가 | 1929년 |
입적 | 1963년 (세수48세, 법랍35세) |
사찰 | 반월선원(반월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82-48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대현(大玄)스님은 언제나 미소짓게 만드는 온화한 성정을 지닌 스님으로 1956년 동학사 주지로 부임하여 오늘날 동학사가 비구니전문강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외호 역할을 한 대한민국의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16 | 충남 홍성 출생 |
1929 | 수덕사 견성암에서 태주(太柱)스님을 은사로 출가,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47 | 안국동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37 | 정혜사, 덕숭산 견성암, 사물산 윤필암, 오대산 지장암, 남장사 등에서 20여 년 수신 안거 성만(1937~1956) |
1956 | 동학사 주지 |
1958 | 병환으로 동학사 주지 사임 |
1959 | 계룡산 갑사 대자암에서 정진 |
1963 | 대자암에서 입적 (세수 48세, 법랍 35세) |
문중 | 육화(六和)문중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명오(明悟)·응화(應和)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지순(智順, 5)→상림(尙林, 6)→성일(盛日, 7)→태주(太柱, 8)→대현(大玄, 9)→명오(明悟, 10), 응화(應和, 10) |
활동 및 공헌
출가
대현(大玄)스님은 1916년 4월 10일 충남 홍성군 홍주면 오관리에서 아버지 조병기와 어머니 김무애성 보살 사이의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조인환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던 스님은 1929년 3월 15일 홍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전태주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1947년 10월 8일 종로구 안국동 선학원에서 하동산 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은 출가 이후 20여 년간 정혜사 덕숭산 견성암, 사물산 윤필암, 오대산 지장암. 남장사 등을 오가며 수행 정진하였다.
남장사 관음암, 동학사 주지 역임
대현스님은 1949년 남장사 관음암 주지를 역임하였고, 1956년에는 동학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이때 강사스님은 경봉스님이었다.
대현스님은 키가 작고 얼굴이 검은 편이었으며 아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스님은 갑사 대자암에서 연로하신 은사스님을 모시고 전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동학사는 가난한 사찰이라 아무도 주지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동학사의 학인 스님들은 탁발 잘 하는 대현스님에게 주지 소임을 맡아달라는 청을 드리기 위해 산을 넘어 대자암으로 갔다.
동학사 주지 소임을 맡은 대현스님은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학인스님들은 주지 스님을 능력자라고 불렀다. 스님은 빼앗긴 토지를 되찾기 위해 사방으로 애쓰는 등 사찰의 행정 문제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1968년 병환으로 동학사 주지를 사임하고 이듬해 다시 계룡산 갑사 대자암으로 돌아와 안거를 하였다.
스님은 모든 방면에서 다재다능하였는데, 견성암 주석시에는 수덕사 정혜사의 용상방을 쓸 정도로 서필(書筆)이 능하였다고 한다. 또 아무리 화가 나도 스님의 얼굴만 보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었는데, 그 온화한 성정은 주변 사람들을 늘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들며 사방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큰절의 어려운 대소사도 스님의 손만 거치면 해결될 만큼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났고, 염불과 도편수 솜씨도 탁월하였다. 힘들고 곤란한 상황에 처한 대중을 지혜롭고 현명한 방법으로 구해내기도 하였다.
입적
대현스님은 1963년 대자암에서 세수 48세, 법랍 35세로 입적하였다. 수제자로는 명오(明悟)·응화(應和)스님이 있다.
동학사
홈페이지: http://donghaksa.kr/
동학사의 최초창건은 남매탑 전설에 전해지는 상원조사로 부터 시작된다. 신라시대에 상원조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후, 724년(신라 33대 성덕왕 23)그곳에 그의 제자 회의화상이 쌍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라 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920년 경진 (고려태조 3)에 왕명을 받아 연기 도선국사가 중창하였다. 국사가 원당을 건립하고 국운융창을 기원했다해서 태조의 원당이라 불리웠는데, 이 원당은 조선초에 소각 되었고, 태조 19년 병신 (936년)에 신라가 망하자 신라의 유신으로서 고려 태조 때 대승관 벼슬을 한 유차달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동계사(東鷄士)를 짓고절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 지금의 동학사로 바뀌었다.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라고 했으며, 고려의충신이자 동방이학의 조종인 정몽주를 이 절에 제향했으므로 동학사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394년(조선 태조 3)에 고려의 유신 길재가 동학사의승려 운선스님과 함께 단을 쌓아서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공민왕의 초혼제와 충신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457년(세조 3)에 김시습이 조상치·이축·조려등과 더불어 삼은단 옆에 단을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다. 다음해 1458년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이곳을 들러 보고는 감동해서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안평대군·금성대군·김종서·황보인·정분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280여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을 짓게 하고 동으로 만든 세조의 인신과 토지 등을 하사했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한 다음 절의 스님과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그 뒤 1728년 무신(영조 4)에 신천영이 형화하여 절과 초혼각이 전부 불타 없어졌고, 또한 1785년(정조 9)에는 정후겸이 토지를 팔아버려 제사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1814년 갑술(순조 14) 금봉 월인 스님이 예조에 상소하여 12차례의 소송 끝에 잃었던 토지를 되찾았으며, 옛 원당터에 실상암을 짓고 절을 중건하여 절 이름을 개칭하되 '진인출어동방(眞人出於東方)'이라 하여「東」자를 따고 '사판국청학귀소형(寺版局靑鶴歸巢形)'이라 하여 「鶴」자를 따서 동학사라 명명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한 그 밖의 전각과 혼록봉장각을 세우는 등 절을 대대적으로 중건하였다. 1827년 홍희익이 세조의 동인을 봉안하는 전각을 새로 지었으며, 충청좌도어사 유석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이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를 시주해 제사를 베풀었다.
1857년(철종 8)에는 우운 아준 스님이 동학사에서 지장계를 주관하였고, 이어서 1864년 갑자(고종 원년) 봄에 금강산에 있던 만화 보선 스님이 이곳으로 와서 제자인 우운 아준·호봉스님 등과 함께 오래된 건물을 전부 헐어내고 전각 40칸과 초혼각 2칸을 새로 지었는데, 초혼각은 1904년(광무 8) 숙모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67년(고종 4)에는 포운응원(1807-1867)스님이 이곳에서 하안거 결제에 들어간 직후 입적했다.
그 뒤 만화 스님의 제자 경허성우(1849-1912)스님이 1871년(고종 8)에 이곳 동학사에서 강의를 열었고, 1879년에는 이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한국의 선풍을 드날렸다. 만화화상이 중흥주라면 만우상경(萬愚常經, 1855~1924년)은 한말과 일제 초의 격심한 사회혼란과 불안속에서 동학사를 잘 지켜나간 수성주라 할 수 있다. 1889년 주지직을 승계받은 만우스님은 1898년 대웅전에 탱화 4폭을 안치하여 봉안하고, 10년 뒤(1909년)에 기와중수 불사를 하였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 현재의 전각으로는 대웅전·삼성각을 비롯하여 조사전·육화원·강설전·화경헌 ·범종각·염화실·실상선원· 숙모전 등이 있다.
산내암자로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석봉암·천장암·마쇄암·보현암·실상암·옥천암·극락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관음암·길상암·문수암·미타암·귀명암·상원암 등이 있다.
- 출처 : 동학사 홈페이지 http://donghaksa.kr/bbs/content.php?co_id=sub01a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270~272.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1.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5
- 불교신문, 계룡산 동학사의 역사와 문화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55836
- 동학사 홈페이지, 승가대학소개 http://donghaksa.kr/bbs/content.php?co_id=sub02a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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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大玄)스님 | 본항목 | 대현스님(大玄, 1916~1963) | 大玄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대현스님(大玄,_1916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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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스님(大玄) | 육화문중(六和) | ~의 일원이다 | |
대현스님(大玄) | 태주스님(太柱) | ~의 수계제자이다 | |
대현스님(大玄)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 | |
대현스님(大玄) | 만공스님(滿空)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대현스님(大玄) | 동산스님(東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대현스님(大玄) | 공주 동학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대현스님(大玄) | 공주 동학사 | ~을(를) 중창하다 | |
대현스님(大玄) | 남장사 관음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대현스님(大玄) | 갑사 대자암 | ~에서 입적하다 | |
대현스님(大玄)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정혜사, 예산 수덕사 견성암(덕숭산), 문경 대승사 윤필암(사불산), 평창 월정사 지장암(월정사), 상주 남장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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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반월선원(반월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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