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스님(海住, 1951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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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출가를 결심할 결정적 계기를 맞았다. 병원에 입원한 이모를 병문안 갔다가 자살을 시도한 한 청년이 병원에 실려 온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연세 많은 이모는 더 오래 살고 싶어 치료에 매달리는데 건장한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의술이 우리 삶에 혜택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생사는 결국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생각은 스님을 곧장 출가의 길로 이끌었다. 친구와의 반연으로 절을 찾아갔으나 인연이 없었던지 스님이 부재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는데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한 스님한테서 청도 운문사로 가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 그러던 어느 날 출가를 결심할 결정적 계기를 맞았다. 병원에 입원한 이모를 병문안 갔다가 자살을 시도한 한 청년이 병원에 실려 온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연세 많은 이모는 더 오래 살고 싶어 치료에 매달리는데 건장한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의술이 우리 삶에 혜택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생사는 결국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생각은 스님을 곧장 출가의 길로 이끌었다. 친구와의 반연으로 절을 찾아갔으나 인연이 없었던지 스님이 부재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는데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한 스님한테서 청도 운문사로 가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 ||
마침내 22세 되던 해인 1972년 스님은 운문사에서 도감 소임을 맡고 계시던 성관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스님이 출가를 할 즈음 운문사 주지로 계시던 노스님께서 꿈을 꾸셨는데, 호랑이 두 마리가 노스님 품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사스님 역시 꿈을 꾸었는데, 길을 가다가 좋은 신을 줍게 되어 신으려 했지만 도무지 발에 맞지 않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꿈을 꾼 뒤에 바로 해주스님이 들어오자 두 분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셨다. | 마침내 22세 되던 해인 1972년 스님은 운문사에서 도감 소임을 맡고 계시던 성관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스님이 출가를 할 즈음 운문사 주지로 계시던 노스님께서 꿈을 꾸셨는데, 호랑이 두 마리가 노스님 품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사스님 역시 꿈을 꾸었는데, 길을 가다가 좋은 신을 줍게 되어 신으려 했지만 도무지 발에 맞지 않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꿈을 꾼 뒤에 바로 해주스님이 들어오자 두 분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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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암에서의 행자생활=== | ===사리암에서의 행자생활=== | ||
스님은 운문사 사리암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는데, 절집 일을 익히는데 더디기만 하였다. 그럴 때마다 은사스님은 “꿈에 그 신발이 맞지 않더니, 일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탄식하시곤 했다. | 스님은 운문사 사리암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는데, 절집 일을 익히는데 더디기만 하였다. 그럴 때마다 은사스님은 “꿈에 그 신발이 맞지 않더니, 일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탄식하시곤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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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반야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운문사강원에 입학하여 흥륜(興輪) 중강스님에게 치문을 배우고 강주이신 명성(明星)스님에게 사집을 배웠다. 곧이어 동학사 강원으로 옮겨 사교과와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동학사 조실스님 호경 노스님께 『화엄경』을 배웠는데,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진실)들을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근원을 꿰뚫어 볼지니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라는 게송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해주스님은 졸업만 하면 선방에 가리라 다짐했으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게송을 접하고는 교학을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해 겨울 반야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운문사강원에 입학하여 흥륜(興輪) 중강스님에게 치문을 배우고 강주이신 명성(明星)스님에게 사집을 배웠다. 곧이어 동학사 강원으로 옮겨 사교과와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동학사 조실스님 호경 노스님께 『화엄경』을 배웠는데,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진실)들을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근원을 꿰뚫어 볼지니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라는 게송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해주스님은 졸업만 하면 선방에 가리라 다짐했으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게송을 접하고는 교학을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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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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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스님은 2004년 현재 수미정사에 주석하면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과 전국비구니회 감사를 맡고 있다. | 해주스님은 2004년 현재 수미정사에 주석하면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과 전국비구니회 감사를 맡고 있다. | ||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자행(慈行)스님이 있다. |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자행(慈行)스님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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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8일 (목) 11:51 판
해주(海住)스님 하 49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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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해주(海住) |
법호 | 수미(須彌) |
속명 | 전호련 |
출생 | 1951. 7. 10 |
출가 | 1972 |
입적 | |
사찰 | 수미정사 (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95-5 )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해주 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서 불교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51 | 경남 양산 출생 |
1972 | 운문사에서 성관(性錧)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76 | 반야사에서 석암(昔岩)스님 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7 | 동학사 강원 졸업 |
1978 |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82~7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졸업, 박사과정수료 |
1987 |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 사감 겸 보타사 주지 |
1990 | 철학박사학위 취득, 동국대학교 조교수 |
1994 | 동국대학교 비구니수행원 혜광사 주지 겸 사감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찬위원 대한불교 조계종 제11대 중앙종회의원 |
1995 |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고시위원 |
1997 | ‘대한불교 조계종 기초교육개혁위원 |
1998 | 대한불교 조계종 제12대 중앙종회의원 |
2000 | 불교학연구회 회장 |
2004 | 현재 수미정사 주지, 동국대학교 교수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 전국 비구니회 감사 |
기타사항
문중 | 청해(靑海)문중 |
수행지침 | 무슨 일이든 수행 아님이 없다.(불법문중(佛法門中) 불사일법(不捨一法)) |
저서 및 작품 | 『의상화엄사상사연구』, 『화엄의 세계』외 다수 |
수계제자 | 자행(慈行) |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수미(須彌) 해주(海住)스님은 1951년 7월 10일 경남 양산군 양산읍 신길 333번지에서 아버지 전덕호(全德浩)와 어머니 오숙자(吳淑子) 사이의 5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전호련이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여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을 읽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어떤 책에서 깃발이 바람에 움직이는 것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대목을 만났다. 그것은 바로 육조 혜능스님의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자기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라는 『육조단경』 대목이었다. 당시로서야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몰랐지만 이 대화를 보면서 스님은 큰 충격을 느꼈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희로애락에 흔들리는 마음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무의식중에 출가 의지를 키우게 되었다. 스님은 또 칭(稱)거사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중국의 칭거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식견이 높다고 자부하며 스님들과 법거량을 일삼고 다녔다. 어느 날 칭거사가 한 큰스님을 만났는데, 이름이 저울대 칭(稱)자를 쓴다는 것을 알고는 큰 소리로 ‘할’을 외치며 “몇 근이나 되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칭거사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해주스님은 출가한 스님들은 일반인과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훗날 자신의 인생행로를 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던 어느 날 출가를 결심할 결정적 계기를 맞았다. 병원에 입원한 이모를 병문안 갔다가 자살을 시도한 한 청년이 병원에 실려 온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연세 많은 이모는 더 오래 살고 싶어 치료에 매달리는데 건장한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의술이 우리 삶에 혜택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생사는 결국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생각은 스님을 곧장 출가의 길로 이끌었다. 친구와의 반연으로 절을 찾아갔으나 인연이 없었던지 스님이 부재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는데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한 스님한테서 청도 운문사로 가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마침내 22세 되던 해인 1972년 스님은 운문사에서 도감 소임을 맡고 계시던 성관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스님이 출가를 할 즈음 운문사 주지로 계시던 노스님께서 꿈을 꾸셨는데, 호랑이 두 마리가 노스님 품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사스님 역시 꿈을 꾸었는데, 길을 가다가 좋은 신을 줍게 되어 신으려 했지만 도무지 발에 맞지 않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꿈을 꾼 뒤에 바로 해주스님이 들어오자 두 분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셨다.
사리암에서의 행자생활
스님은 운문사 사리암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는데, 절집 일을 익히는데 더디기만 하였다. 그럴 때마다 은사스님은 “꿈에 그 신발이 맞지 않더니, 일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탄식하시곤 했다. 염불과 사중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행자의 하루가 반복되다 보니 책을 손에 드는 일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그럴수록 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던 중 큰절로 심부름을 갔다가 염불을 한번 외워보라는 노스님 말씀에 스님은 재빨리 줄줄 외워나갔다. 그러자 뜻밖에도 노스님은 “날래(빨리) 먹은 콩은 똥을 누면 온 콩 그대로 나온다.”며 호되게 경책하셨다. 다음 단계의 공부를 하고 싶어 서두르며 헐떡이는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셨던 것이다.
운문사강원과 동학사강원에서 배우다
그해 겨울 반야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운문사강원에 입학하여 흥륜(興輪) 중강스님에게 치문을 배우고 강주이신 명성(明星)스님에게 사집을 배웠다. 곧이어 동학사 강원으로 옮겨 사교과와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동학사 조실스님 호경 노스님께 『화엄경』을 배웠는데,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진실)들을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근원을 꿰뚫어 볼지니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라는 게송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해주스님은 졸업만 하면 선방에 가리라 다짐했으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게송을 접하고는 교학을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강원을 졸업한 해주스님은 이듬해인 1978년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어른스님들은 상좌가 대학에 가면 중물이 빠질까봐, 유학을 가면 환속을 할까봐 걱정하셨다. 전통 없는 변화란 뿌리 없이 흔들리는 나뭇잎과 같아 좌초하지 않을까 염려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스님은 학부에서의 공부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아서 화엄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1990년 2월 철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였다. 석사학위 논문은 〈화엄경의 발보리심에 대한 연구〉이며, 박사학위 논문은 〈신라의상의 화엄교학연구 ― 일승법계도의 성기(性起)사상을 중심으로〉이다. 학위 취득 후 스님은 학교에 남았고 마침내 모교 동국대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그동안 스님은 중앙승가대학교 수행관 사감 겸 보타사 주지, 동국대학교 비구니 수행원 혜광사의 주지 겸 사감을 지냈다. 그밖에도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찬위원, 조계종 포교원 고시 위원, 조계종 기초교육개혁위원, 전국비구니회 계단위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학과장 등을 역임하는 등 수많은 일을 맡아 헌신하였다. 또 1997년에는 미국의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소(Center for study of World Religions, Harvard University, U. S. A)의 선임연구원(Senior Fellow)을 지내면서 세계 종교학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스님의 저서로는 『의상화엄사상사연구』(민족사, 1993), 『불교교리강좌』(불광출판부, 1993), 초역 『지송한글화엄경』(불광출판부, 1993), 『역주 원각경』(민족사, 1996), 『화엄의 세계』(민족사, 1998) 외 다수가 있다. 또한 그동안 발표한 논문으로는 〈비구니교단(比丘尼敎團)의 성립(成立)에 대한 고찰(考察)―비구니 팔경계(八敬戒)를 중심(中心)으로〉(한국불교학 제11집, 한국불교학회, 1986)를 비롯하여 수십 편이 있다. 해주스님은 2004년 현재 수미정사에 주석하면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과 전국비구니회 감사를 맡고 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자행(慈行)스님이 있다.
참고문헌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87~492.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13.
- 「남수연 기자의 한국불교 비구니 리더-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해주 스님」(법보신문 2016.11.23.)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3557
「읽고 쓰며 만나는 '화엄경'…해주스님 '독송·사경본' 출간」(연합뉴스 2020.8.28.) https://www.yna.co.kr/view/AKR20200828080500005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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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海住)스님 | 본항목 | 해주(海住)스님(1951~ ) | 해주(海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해주(海住)스님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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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海住)스님 | 통도사 월하(月下)스님 | ~ 에서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다 |
해주(海住)스님 | 동학사 | ~ 강원을 졸업하다 |
해주(海住)스님 | 동국대학원 | ~ 화엄학 석사학위를 받고 철학박사학위도 취득하다 |
해주(海住)스님 | 조계종 포교원 | ~ 고시위원이다 |
해주(海住)스님 | 불교신문 | ~ 논설위원이다 |
해주(海住)스님 | 동국대학교 | ~ 불교학과장을 역임하다 |
해주(海住)스님 | 미국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소 | ~ 선임연구원이다 |
해주(海住)스님 |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 ~ 역경위원이다 |
해주(海住)스님 | 전국비구니회 | ~ 감사위원이다 |
해주(海住)스님 | 수미정사 | ~ 주지이다 |
지도
- 수미정사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95-5 수미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