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일엽스님(一葉, 1896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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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엽(一葉)스님은 신문학 초창기 선구적인 여류 문인이었으며 출가 후 만공 선사의 맥을 잇는 선사로 비구니 선수행에 모범이 되었고 현재의 수덕사 견성암의 기틀을 마련한 대한민국의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96 평남 용강 출생
1907 한국문학 신시(新時)의 효시로 전하는 국문 시 ‘동생의 죽음’ 발표
1918 이화전문학교 졸업
1920 동경 영화학교 수료 후 귀국, 부녀잡지 <신여자> 창간, 여성운동 제창
1928 금강산 서봉암에서 성혜(性慧)스님을 은사로 출가
표훈사 신림암에서 하안거 성만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33 수덕사 견성암 주석
1934 만공(滿空)스님으로부터 법호 ‘백련도엽(白蓮道葉)’를 받음
1936 일봉(一鳳)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0 환희대 주석
1966 덕숭산 비구니 총림 건립의 원력을 세우고 기공식 봉행
1967 춘원 이광수 원작 ‘이차돈의 죽음’을 포교 법극으로 각색하여 국립극장에서 공연, 총림원 건립기금에 충당
1971 1971.1.28. 수덕사 환희대에서 입적 (세수 76세, 법납 44세)
문중 일엽문중(一葉)
저서 『어느 수도인의 회상』 (1960)
『청춘을 불사르고』(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5),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 (1974)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1997)
『일엽 선문』(2001),
『김일엽 산문집』(2011),
『김일엽 선집』 (2012)
『김일엽 수필선집』 (2017)
『승려 시집 제7집』(2020) 등
수계제자 만정(萬淨)・일광(日光)・도안(道岸)・경희(慶喜)・도성(道成)법성(法性)・정행(淨行)・법륜(法輪)・숭원(崇園)・도선(道善)・해관(海觀)

활동 및 공헌

출생과 교육

[견성암 선원 큰방 앞에서 입승 시절 외국인들과 면담 후... ]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64
[1961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65
[65년 환희대 주석시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과 일엽스님]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66
[일엽스님 계첩]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67
[일엽스님의 가사와 장삼]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68
[일엽스님의 동방아]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68
[일엽스님의 육필원고, 만년필]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69

우리나라 개화기의 신여성으로, 여류시인이자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의 눈부신 활약을 뒤로 한 채 불문에 귀의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던 일엽(一葉)스님의 본명은 김원주이다. 일엽은 문인 시절의 아호(雅號)이며 법호는 하엽(荷葉)이다. 일엽스님은 1896년 6월 9일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아버지 김용겸(金用兼)목사와 어머니 이마대(李馬大) 사이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총명했고 남다른 기백을 지녔던 스님은 기독교 목사로서 박애주의적 종교심을 가르치던 아버지와 일찍 개화하여 하나뿐인 딸을 아들 못지않게 교육시키려던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9세에 구세국민학교, 11세에는 진남포 삼승보통여학교에 진학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거나 초조해 하지 않을 정도로 초연한 마음을 가졌던 스님은 1907년, 겨우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의 죽음을 겪으면서 땅이 꺼지는 듯한 슬픔을 맛보았다. 그 충격은 스님의 자각(自覺)을 부채질하였다. 그리하여 비애의 참담한 감정을 글로 옮겼는데, 이것이 바로 국문시 ‘동생의 죽음’이다. 육당 최남선이 쓴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보다 1년 먼저 발표하여 한국문학사상 신시(新詩)의 효시로 알려진 이 작품은 스님의 나이 불과 열두살 때 쓴 것이었다.

소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어 20세 되던 해에 아버지마저 여윈 스님은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이화전문의 전신인 이화학당에 진학하여 일제시대의 혼란스러운 사회 현실과 인생, 미래에 대한 깊은 고뇌를 겪으며 차차 신본주의적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다.

일제 강점기 신여성으로 활동

일제 강점기 때 집에서 남녀학생들에게 뿌려 줄 비밀전단을 인쇄하는 등 적극적으로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던 스님은 1918년 23세에 이화학당 예과를 졸업하고 동경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 닛산(日新)학교와 동경 영화학교에서 수학한 후 귀국한 때가 1920년, 스님의 나이 25세 때였다. 스님은 이때 연희전문학교 이과 교수 이노익과 결혼하였다.

스님은 이후 여성잡지를 통해 신여성운동론을 펼쳐나갔다.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과 이화학당 빌링스 부인의 재정 후원으로 스님은 1920년 3월 최초의 여성종합지 <신여자>를 나혜석, 박인덕, 신줄리아와 함께 창간하여 여성 최초의 편집인이자 주간으로서 잡지 발행을 주재하였고, 이를 통해 여성운동을 제창하고 나섰다.

동시에 매주 한 번씩 ‘청탑회’모임을 통해 새로운 사상과 문학을 토론하며 잡지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스님의 문학사적 공적은 실로 지대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오상순, 염상섭, 김억, 황석우, 나혜석과 함께 순수 문예지<폐허> 동인으로 시, 소설, 수필 등을 정력적으로 발표하였다.

<신여자>는 5호를 예고한 채 4호로 끝났으나 그를 통한 스님의 남다른 진취적 사상은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신여성'이란 유행어가 생겨났고, 김원주, 김명순, 나혜석 등 초창기 여성 문인들이 신여성의 대명사로 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적 가부장제하에서 열악한 삶을 살았던 여성의 근대적 해방의식은 1920년 자유주의적 남녀평등 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양성관계의 수립을 주장하는 ‘신여성론’으로 발전되었다. 한편 스님은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크게 제약하는 복식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는 옷이 갖추어야 할 3대 조건으로 위생, 예의, 자태를 든 후 우리나라 여성의 의복에서 허리띠로 가슴을 겹겹이 동여매는 것을 비판하며 자신이 직접 고안한 개량복을 만드는 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직접 착용하기도 하였다.

만공 선사의 법문을 듣다.

이렇듯 신여성으로서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던 스님은 1923년 9월, 28세에 이르러 크게 발심하게 되는 인연을 접한다. 덕숭산 수덕사를 참배하는 길에 만공 선사의 법문을 듣고 감격의 환희심을 일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태자로 있을 때의 사문유관(四門遊觀)과 비견되는 일대 사건이었으며, 백천만겁이 지나도 만나기 어렵다는 불법의 기연(奇緣)을 마음 속 깊이 끌어안게 된 일대사 인연이었다.

이후 3여 년간 아현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그 또한 만공 선사의 설법이 준 감화를 쓸어내지는 못하였다. 당시 종단의 기관지인 <월간 불교>지에 관여하며 문예란을 담당했던 것도 출가의 전조(前兆)였다. 잡지<폐허>, <동인>, ‧<신여자>등의 각종 지면을 통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 시기도 그 무렵이었다. 어쩌면 스님은 세속과의 단절을 감지하고 신여성 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란 것이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스님의 젊은 시절 문학 활동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였다. 춘원 이광수가 감탄하여 일본 명치(明治)시대의 천재시인으로 일찍 요절한 유명한 문학인 히구치 이치요(通口一葉)을 들어 ‘한국의 ‘일엽’이 되라.”며 아호까지 지어줄 정도로 빼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출가와 수행

마침내 스님은 세파를 떨치고 금강산 마하연 서봉암에서 비구니 이성혜 스님을 은사로 입산 출가하니, 나이 서른 셋, 1928년의 일이었다. 그 해 표훈사 신림암에서 하안거를 마친 후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 선사를 계사로 득도, 수계하고, 1936년 일봉(一鳳) 경념(敬念) 대화상을 계사로 다시 보살계와 비구니계를 수지하엿다. 이후 만공선사가 입적하던 1946년까지 그의 회상인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에서 안거를 성만하며 본격적인 수도생활에 몰입하였다.

“세속에서 익힌 습성의 것은 선이건 악이건 간에 모두 버려 백지화(白紙化) 하여야 된다. 그대는 여류시인이란 소리를 들었다는데, 글을 읽고 쓰던 습관을 정신으로까지 싹 씻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입산할 당시 만공선사가 일엽스님에게 던진 갈(喝)이다.

선사의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가행정진의 구도열을 불태우던 스님은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25년간을 절필한 채 산문을 나가지 않았다. 1933년 9월 이후 머물기 시작했던 비구니 총림원 견성암에서 일엽스님은 홀연히 한 소식을 접하니, 오도송[1] 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이고
       고뇌하기 예로부터 그 얼마인고!
       큰 웃음 한 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

당시는 사찰의 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하여 몸을 씻을 곳 하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자의 몸으로 수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생리 현상은 더없는 장애였다. 손상좌 월송(月松)스님은 일엽스님의 사무친 서원과 발심구도심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견성암의 홍각이란 누각에 신장탱화가 모셔져 있는데, 일엽스님은 그 불보살의 가피를 빌어 수행의 장애가 되는 바를 물리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여자로 태어난 업보가 크다 보니 한 달에 한 번씩 생리현상이 찾아와 가없는 정진에 방해가 되오니 이를 멈추게 해 달라.’는 발원을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발원을 한 다음 달부터 생리현상이 멈춘 것입니다. 온 몸과 마음으로 올리는 지극한 발원에 응하시는 제불보살님의 가피와 스님의 깊은 구도심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공선사에게 법호를 받다

1934년 5월 초하루, 만공선사는 일엽스님의 금강과 같은 도의 경지를 살핀 연후에 인가(印可)의 징표로 ‘하엽당(荷葉堂) 백련(白蓮) 도엽(道葉)’이란 법호를 하사하셨다.

스님은 평소 ‘성약백련후시지출산(性若白蓮後始之出山)’, 즉 ‘성품이 백련과 같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산하라’는 선사의 가르침에 따라 절필하는 등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수행에 임했고, 대은(大隱), 춘성(春城), 청담(靑潭), 혜암(慧菴), 동산(東山)스님 등 당대의 선승들과 교류하며 항상 탁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님의 입산은 그래서 세인의 분분한 의견과는 달리 현실도피성이 아닌 일생을 걸고 찾아 나서야 할 삶의 절실한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었다.

다시 글을 쓰다

스님의 글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노환으로 환희대에 주석하게 된 1960년 3월이다. 나이 이순을 훨씬 넘긴 65세 때였으며,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며 불립문자를 내세우던 스승 만공선사의 뜻에 따라 절필한 지 30년도 더 지난 뒤였다. 그것은 보살의 궁극적인 만행이 되는 상구보리(上求菩提)의 또 다른 실천적 모습으로서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대중포교의 원력에 따른 것이었다.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 등을 출간은 스님의 원력의 소산이었다. 이 책들은 나오자마자 세인의 관심을 끌며 서점가를 강타하였다. 단순한 종교인이기에 앞서 철학가요, 사상가의 면모를 지닌 스님의 글은 비구니의 연애담 정도로 생각하고 책을 읽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에 감화되어 입산을 하거나 불교에 귀의하는 등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수덕사 견성암 불사와 대중 포교

오늘날 한국불교 제일의 비구니선원으로 자리매김한 수덕사 견성암은 일엽스님의이 이룩한 또 하나의 성과물이다. 후학 니승들의 구도심을 발하게 하는 여법한 보금자리를 만들겠다는 스님의 지고한 서원은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잃지 않았다. 1966년, 스님의 나이 71세 되던 해, 노구의 법체를 이끌고 비구니 총림원 기공식을 봉행하여 지금의 견성암의 기반을 쌓았던 것이다.

여여한 수도선승의 자태를 세우면서도 대중포교의 서원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비구니 총림원 건립기금 마련을 위하여 춘원 이광수의 작품인 포교연극 『이차돈의 사(死)』를 각색하여 국립극장에서연극을 공연한 것은 획기적인 예술포교의 장르를 개척한 것이었다. 이때 손상좌 월송 스님이 주연인 이차돈역을 맡아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67년 8월의 일이었다.

입적

신학문을 섭렵한 신여성으로서, 출가 후에는 당대의 고승 만공 선사의 맥을 잇는 근세불교의 보기 드문 선승의 모습으로서 우리들 가슴 속에 면면히 남아 있는 대비구니 일엽스님은 1970년 11월 하순, 입적의 전운을 느끼자 만년 수도생활의 주석처가 되었던 수덕사 환희대에서 대중처소인 견성암 비구니 총림원 별실로 옮길 뜻을 비쳤다. 그리고 1971년 1월 28일 새벽 1시경 입적에 들었다. 스님의 세수 76세, 법랍 44세였다.

후학들은 불멸의 길로 나선 스님의 선업(禪業)을 만고토록 기리고자 환희대에 영정을 모시고 1973년 가을에는 5층 석탑의 추모탑을 세웠다.

일엽스님은 가셨지만 스님의 얼과 법훈은 후학들의 가슴을 떠나지 않고 있다. 1974년 후학들이 발간한 문집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의 표제가 말하여 주듯 일엽스님은 결코 가신 바가 없으며, 또한 오신 바 없이 그렇게 법신이 되어 사바극락을 충만케 하고 있으니, 불출 구의 일엽이 되었음이다.

그 법훈을 직계로 받든 상좌․ 손상좌들만 하여도 1백여 명을 넘는다고 하니, 문하의 법손은 이루 헤아리기가 어렵다. 어찌 미래세가 다하고도 남는다 하지 않을 것인가.

수계제자로는 만정(萬淨)・일광(日光)・도안(道岸)・경희(慶喜)・도성(道成)법성(法性)・정행(淨行)・법륜(法輪)・숭원(崇園)・도선(道善)・해관(海觀)스님 등이 있다.

수덕사 견성암

[견성암]
사진출처: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re=1)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척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2] 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

수덕사 환희대

[환희대 원통보전]
사진출처 : 길손의 한국기행 https://blog.daum.net/b-pyung/15609222

1927년(丁卯) 추석을 앞둔 어느 달 밤, 정혜사 소림초당에 주석하고 계시던 만공선사께서 완월(玩月)하시던 중, 덕숭산 비원(秘苑)이라고 일컬어진 환희대 도량에 이르시어 ”좋고 좋도다! 참으로 환희(喜)로운 터로다."라고 찬탄하시었다.

1927년 10월, 그 터에 간단한 초옥을 짓고 환희암으로 명명한 후, 비구니 스님 세분이 정진하며 사셨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초옥이 퇴락하여 1942년, 새로 기와를 올린 암자를 짓고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몇몇 스님들이 이곳에 거처하며 정진했으나 만공스님 입적(入寂) 후에 돌보는 사람이 없어 비게 되자, 서산에 살던 김국평이라는 만공스님의 신도가 이 암자를 지을 때 크게 시주하였다는 연고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노환으로 대중처소에 머물기 어려우셨던 김일엽스님을 모시기 위해 손상좌인 월송(月松)스님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의 고문변호사로 계시던 황해진(黃海振)변호사를 통해 법적인 절차를 밟아 김국평씨에게 소정의 대금을 지불하고 환희대를 인수하였다. 그 이후 김일엽스님께서는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 열반하시려는 뜻에 따라 1970년 견성암 선원으로 이거(居)하실 때까지 만 10여년을 환희대에 주석하 시며 제자들과 함께 정진하셨다.

1966년 덕숭총림 수덕사 제 2대 방장(方丈)을 지내신 벽초 선사께서 환희대 고가(古家) 옆 객실채를 신축해주셨다. 1971년 김일엽스님 입적 이후 손상좌 월송스님을 위시한 문도들이 힘을 모아 유고 문집을 간행하고, 1973년에는 환희대 앞뜰에 김일엽스님을 기리는 5층추모석탑을 건립하였다. 1978년 월송스님과 정진스님은 김일엽스님의 기념도량을 정비, 환희대 원통보전(圓通寶殿)과 요사채 보광당(普光堂), 난야(蘭若) 등의 창건불사를 시작했다. 덕숭총림 수덕사 제 3대 방장이신 원담선사의 지도아래 많은 불자들의 도움으로 1984년 원통보전과 보광당의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2007년 12월(음력 11월) 정진, 월송스님의 불사공덕(佛事功德)을 기리는 이니보탑(二尼寶塔)을 건립하였다.

참고자료

(2017년)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76866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일엽(一葉)스님 본항목 일엽스님(一葉, 1896~1971) 一葉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일엽스님(一葉,_189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일엽스님(一葉) 동생의 죽음(1907년 작) ~을(를) 발표하다 신체시의 효시(嚆矢)
일엽스님(一葉) 일엽문중(一葉) ~의 일원이다
일엽스님(一葉) 성혜스님(性慧) ~의 수계제자이다
일엽스님(一葉) 금강산 서봉암 ~에서 출가하다
일엽스님(一葉) 만공스님(滿空)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일엽스님(一葉) 일봉스님(一鳳)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일엽스님(一葉) 수덕사 견성암 ~을(를) 중창하다
일엽스님(一葉) 안거 ~을(를) 성만하다 구례 천은사,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양산 통도사 취운암, 진주 대원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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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주석

  1. 고승들이 불도의 진리를 깨닫고 지은 시가
  2. 사찰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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