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스님
- 법호·법명 : 운암성숙(雲巖星淑, 1898~1969) - 독립운동가 김성숙(金星淑)
- 생애·업적
1908년 철산 유지들이 세운 대한독립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10년 국권상실 후 대한독립학교가 폐교되자, 당시의 반일분위기에 따라 아버지는 일본인이 설립한 학교에 아들을 보내지 않았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일본헌병에 구금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 길로, 경기도 용문사에서 풍곡신원(楓谷信元) 선사를 만나 그 길로 선사를 따라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월초(月初) 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이란 법명을 받았다.
1919년 양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월의 형을 받았다. 1922년 승려의 신분으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일본경찰의 탄압이 심해지자 젊은 승려 5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 민국대학(民國大學)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일하였다. 또한, 장건상(張建相)·양명(梁明)·김봉환·이낙구(李洛九)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을 발간하여 사회운동단체의 종파적 분열을 반대하는 운동을 폈으며, 신채호(申采浩)·유우근 등의 추천으로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 가담하였다.
1925년에는 문학단체를 결성하여 잡지 『황야』를 펴내기도 하였으나, 그 해에 북경 정부의 추방을 받고 광둥[廣東]의 중산대학(中山大學)으로 옮겼다. 1927년중산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12월에 광둥인민폭동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자, 상해로 돌아와 중국 문화총동맹과 작가연맹 등에 가담하여 신문화운동과 반제국동맹의 간부 등으로 활동하면서 19로군의 쑹후[松滬] 항일전쟁에도 가담하였다.
1936년에는 중국 각지의 동지들을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였으며, 다음해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동맹·조선민족혁명당 등 3개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였다. 1938년후베이성 한커우[漢口]로 이동하여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이 되었다.
1942년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였으며, 이 때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취임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그 해 12월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1946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사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일원이 되었으나, 좌우대립의 격화로 의장단을 사퇴하고 여운형(呂運亨)과 같이 좌우합작을 지지하였다.
1947년여운형과 같이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또한, 장건상과 행동을 같이하여 당내 우파세력을 형성하고 극좌노선을 배격하였으나, 창당 2개월 만에 당수인 여운형이 피살되어 당세가 크게 후퇴하였다. 결국 남북협상을 전후하여 좌파의 인사들은 월북하고, 이승만정권에 백안시되던 당을 그 해 12월 해체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서울에 남았으며, 1·4후퇴 때 비로소 부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부역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55년에는 조봉암(曺奉岩)·서상일(徐相日) 등 혁신계의 지도급 인사들과 접촉하여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에 관계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른바 근로인민당재건사건과 진보당사건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대중당을 창당하고 총무위원이 되었으며, 다음해통일사회당으로 통합되자 정치위원이 되었다. 1961년5·16군사정변 후 이른바 통일사회당사건으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66년 재야통합야당인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운영위원을 거쳐 지도위원이 되었다.
1969년 4월 12일 서거했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에 있다가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성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