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량사
- 사찰명 : 서울 청량샤(淸凉寺)
- 주소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61
원래 현 천장산 홍릉자리에 있었던 청량사는 1895년 일제강점기 을미정변 이후 이 터를 명당정혈(明堂正穴)이라 하여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에 조성하게 되어 청량사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니승방(尼僧房) 돌곶이절인 석관사(石串寺)를 청량사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김정호 (?~1864년)의 대동여지도에는 지금의 홍릉 자리에 청량사가 표시되어 있고 현재의 홍릉수목원 자리에는 돌곶이 니승방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원래의 청량사와 돌곶이절(석관사)은 별개 사찰이었으나 홍릉 조성으로 청량사가 이곳으로 옮겨지고 돌곶이절(석관사) 또한 폐사되면서 합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동대문 밖 청량리는 청량사(淸凉寺)란 절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천장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고찰인 청량사는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보면 고려 예종 12년인 1117년 9월, 문종의 생질인 이자현을 삼각산 청량사로 불러 치국의 도를 묻고 답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예종 이전에 이미 청량사가 창건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은 또한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딸인 경순공주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까지 해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성계는 딸을 이곳 청량사로 데려와 직접 머리를 깎은 뒤 여승으로 살게 했다. 청량사는 오늘날에도 비구니들의 도량으로 유명하다.
(임금이 덕수궁(태조의 별궁)에 나아갔다. 현비의 딸 경순궁주가 흥안군 이제에게 출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기 때문에 조상 위문하기 위함이었다. - 《태종실록》, 1407년 8월 7일)
청량리 동쪽에는 망우동이 있는데 망우동이라는 동명은 망우리(忘憂里) 고개에서 유래했다. 태조 이성계가 신하들과 함께 사후에 왕릉으로 쓸 명당을 찾고 있었는데, 검암산 밑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보고는 유택으로 결정했다. 이에 흡족한 마음으로 환궁하던 태조는 망우산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이제 오랫동안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노라(於斯吾憂忘矣)"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이 고개를 망우리고개라 했다는 설이 있다.
[출처]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지도 : 청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