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홍운경(基弘耘鏡)
- 법호·법명 : 기홍운경(基弘耘鏡)
- 생애·업적
항시 따뜻한 미소로 대중들의 아픈 마음을 돌봐주던 운경((雲鏡, 1905∼2000)스님. 운경(耘鏡)은 법호이고 법명은 기홍(基弘)이다. 스님은 인연법과 인과법의 소중함을 중생들에게 들려주며 수행자의 삶을 걸었다.
운경스님은 190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스님은 16세 되던 해 태오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교종(敎宗) 수사찰인 봉선사로 출가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기도로 성취할 수 있다”는 보당스님의 법문을 21세되던 해에 화계사에서 듣고 스님은 강화도 보문사에서 정진했다. 이때 스님은 “평생 절을 떠나지 않고 중노릇 제대로 하며 항상 부처님 모시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간절한 발원을 불전에 올렸다. 불법을 바르게 배우고 익혀 상구보리 하화중생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운경스님은 그뒤로 해인사, 직지사, 유점사 등의 제방선원에서 선(禪)과 교(敎)의 공부를 두루했다.
운경스님이 강조하던 법문이다.
“모든 것이 인연법으로 생하고 인연법으로 멸하는 것이므로 금생에 많은 선연을 맺고 죄악을 막으며 중생을 구제해야 합니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신(信)입니다. 즉 믿음이 견고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법어로 운경스님은 〈화엄경 현수품〉을 예로들며 수행과 정진을 당부했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증장일체제선근(增長一切諸善根) 제멸일체제의혹(除滅一切諸疑惑) 시현개발무상도(示現開發無上道)”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믿음은 도의 으뜸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일체의 모든 선근을 증장하며, 일체의 모든 의혹을 없애서, 무상도를 개발함을 나타내 보임이로다.”
스님은 1940년 흥룡사 주지와 조계종 경기교구 총무국장 소임을 맡으며 ‘조선불교’의 재건을 꿈꾸었다. 곧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으로 회향됐다. 일제 식민지 시절 스님은 조선민족해방당을 지원하다 발각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또 사형(師兄)인 운허스님과 함께 6·25 당시 완전히 불타버린 봉선사를 다시 중창하고, 광동학원을 설립하는 등 출재가들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이밖에도 중앙교무원 평의원, 봉선사 주지, 봉선사 문장, 봉선사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 등의 소임을 맡으며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았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수행을 하는데 있어 기쁜마음으로 해야 한다며 이렇게 당부했다.
“참선할 때는 화두만 챙기고, 염불할 때는 염불만, 경을 볼 때는 경만을 보아야 하며 당처(當處)에서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여 어느 때라도 부처님의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스님은 2000년 2월 27일 봉선사 다경실에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스님의 열반송이다.
“허깨비세상 구십년을(幻海九十年) 되돌아보니 우습구나(回頭事堪笑) 오늘 아침 몽땅 털어버리니(今朝撤手盡) 대천세계에 한빛이로다(大千光)”
※ 출처 :
- 38.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 운경스님
- 불교신문(2019.04.19) (다시 듣는 사자후) <39> 운경스님 -1995년 7월11일자 ‘내가 만난 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