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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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5월 17일 (수) 22: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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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한자 堤川 月光寺址 圓朗禪師塔碑
승려 대통(大通)
찬자 김영(金穎)
서자 순몽(淳蒙)
각자 진윤(眞胤)



번역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1]

▨▨▨▨▨강부(▨▨▨▨▨江府) 월암산(月巖山) 월광사(月光寺)의 조시원랑선사(詔諡圓朗禪師)의 대보선광영탑(大寶禪光靈塔)의 비(碑) 및 그 서(序).

조청랑(朝請郞) 수금성군태수(守錦城郡太守)로 비어대(緋魚袋)를 사사(下賜)받은 신하(臣下)인 김영(金潁)이 왕명을 받아 지음.

오등산(五騰山) 보리담사(菩提潭寺)의 석가사문(釋迦沙門)인 순몽(淳蒙)이 왕명을 받아 씀.

▨▨▨▨의 임금이 (공자(孔子) ?) 예절과 음악을 백대(百代)에 전하여 주고 용과 같은 임금이 도덕을 만방(萬方)에 폈으니, 이들은 모두 어진 것을 숭상하고 의로움을 귀중하게 여기고 문(文)과 무(武)의 덕을 겸비하여,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한 검소하고 인자하신 분이었다. 한편 깊고 오묘한 곳에서 자취를 끊고 지내고 자연스러운 곳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인과를 깨우쳐서 …(雙▨)하고 …(▨思)를 …(▨)하여서 아울러 제거 하고, 고요히 지냄을 급한 …(▨)로 여기고 (4자 결락) 인간 세계를 커다란 꿈이라고 여기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부처처럼 하면서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이치를 깨닫고 현상을 초월한 일을 아는 것은 아마도 오직 우리 선사(禪師)께서 추구한 뜻일 것이다.

선사의 이름은 대통(大通)이고 자(字)는 태융(太融), 성(姓)은 박씨(朴氏)이며 통화부(通化府) 중정리(仲停里) 출신이다. 대대로 벼슬하는 영화를 멀리하였으며 가까운 조상은 소박한 …(▨)을 이었다. 증조부와 할아버지는 ……(6자 결락, 어머니에 관한 내용인 듯)씨족(氏族)인데 본래는 취성군(取城郡)(황해도 황주) 사람이었다. 선사를 잉태한 날부터 예절을 지키고 행동을 삼가하였으며 경전을 외우는 것으로 태교를 하였는데, 그 태어나는 때에 보니 과연 평범하지 않았다. 선사는 강과 산의 뛰어난 정기를 간직하고 하늘과 땅의 빼어난 기운을 받아서 마치 곤산(崑山)의 한조각 구슬과 같고 계림(桂林)의 한 줄기 가지와 같았다.

곧 어린 시절을 지나서 성년(成年)이 되자 집 ……(7자 결락) “문장을 짓는 곳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경전과 역사책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너는 이것을 뜻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선사는 이에 이 가르침을 공손히 받들어서 홀연히 스승을 찾아 떠났다. (선사의) 총명함은 (글을) 한번에 다섯 줄씩 읽어 내릴 정도이고 명민함은 한번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아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책을 두루 통달하였고 천(千) 가지 경전(經典)과 만(萬) 가지 논소(論疏)의 내용들을 다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불교의 경전들을 보았는데 더욱 많이 깨달을 ……(7자 결락) (불교와 유교의 ?)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론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곧 상투를 풀어 머리를 자르고 마옷을 벗고 승복을 걸쳤는데 이때가 회창(會昌) 을축년(乙丑年) 봄이었다(문성왕(文聖王) 7, 845).

대덕(大德) 성린(聖鱗)에게 나아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는데 승관(僧官)에서는 단엄사(丹嚴寺)에 배치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이에 계율로써 마음을 닦고 보리심(菩提心)으로 뜻을 단련하고, 치욕을 참으며 정진(精進)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보시(布施)하고 공손하고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을 다음으로 삼아서 당시의 사자후(獅子吼)가 되었다. (7자 결락) 나이를 잊고 사귀기를 청하고 번갈아 다니며 서로 사귀었다. 이때에 선사의 동문(同門) 선배인 자인선사(慈仁禪師)가 당(唐)나라에서 귀국하자 선사는 때때로 찾아가 뵈었다. 자인선사는 선사의 품은 뜻을 살펴보고 자신이 가르칠 수 없음을 알자 이에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격려하여 용과 코끼리와 같은 마음을 내도록 자극하였다. 이에 선사는 곧 꼭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조용히 간직하고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공부하고자 하여 직산(樴山)에 이르러 ……(4자 결락)에 거처하였는데 이곳은 신승(神僧)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도를 깨치신 곳이었다. 선정(禪定)을 닦기 시작한지 3개월 후에 광종대사(廣宗大師)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광종대사는 즉시 그 재주를 알아보고서 사찰의 사무를 맡아 보게 하였다. (선사는 이것을) 사양하고자 했지만 할 수 없이 일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업적이 있게 되자 “나는 마땅히 그만두고 떠나겠다” 하고는 대중(大中) 병자년(丙子年)에 당나라에 들어가는 하정사(賀正使)를 따라서 ……(4자 결락).

중국에 (도착하여 ?) 여러 사찰을 두루 찾아본 다음 앙산(仰山)에 이르러 징허대사(澄虛大師)에게 배웠다. 징허대사는 그 총명함을 알아보고 마음을 정밀하게 갖도록 한후 진종(眞宗)을 가르쳤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사는 근본 바탕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데다가 남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노력하였으므로 곧 지혜가 태양에 짝할 정도로 뛰어나게 되고 식견은 하늘에 가득찰 정도로 넓어지게 되었다. 더위와 추위를 겪으면서 황매(黃梅)의 심인(心印)을 이어 받았고 ▨▨을 지나지 않아서 ▨▨한 구슬을 (얻었다. ?) 그후에 명산을 순례하고 이름난 선사들을 두루 찾아보았다. 중국을 이미 다 돌아보고 나자 동방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함통(咸通) 7년 (경문왕(景文王) 6, 866)에 회역사(廻易使) 진량(陳良)을 따라서 신라에 돌아왔다. (오는) 때에 파도가 높이 일어나고 안개가 짙게 덮여서 배가 곧 기울어 뒤집어질듯이 위험해져서 승려와 일반인들이 모두 물에 빠질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선사는 거의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듯 ……(5자 결락) 하였다. 나라를 떠날 때의 거친 옷을 바꿔 입지 않았고 처음 출가할 때의 굳은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만일 (선사와 같이) 신통함과 신묘한 작용을 갖추고 지식이 멀리에까지 미쳐서 위험한 일을 당하여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광종(廣宗)대사는 선사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맞아들였는데 특별한 예절로써 서로 상대하였고 매우 사랑하였다. (선사는) 이듬 해 봄에 산을 나와서 ……(4자 결락)에 머물고 있었는데 여름 저녁의 꿈(?)에 월악(月嶽)의 신관(神官)이 나타나서 그곳으로 오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이 되자 자인선사가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월광사(月光寺) 신승(神僧) 도증(道證)이 세운 곳으로 과거에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무열왕(武烈王)을 말함)께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해(四海)가 괴로워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 삼한(三韓)에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통일을 달성하신 때에 ▨▨▨ (부처?)의 ▨을 입어 ▨▨의 재앙을 영원히 없앴다고 하여 특별히 이 산을 표창하여 으뜸되는 공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금강(金剛)에 기록되어 있고 선기(仙記)에 이름이 전해왔다. 시냇물은 맑고 차가우며 안개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속에 빼어난 기운을 간직하고 있고 ▨전(▨傳)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선사는 거기에 가서 거주하라’ 하였다. 선사는 메아리가 소리를 따르듯이 곧바로 옷을 떨치고 나아갔다. (4자 결락) 저녁의 꿈에 전에 나타났던 신관(神官)이 나타나 모시면서 (7자 결락) 예를 행하고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전에 외람되게 말씀 드린 바 있었는데 수고롭게도 멀리서 와 주셨군요” 하였다. 선사는 이에 이 산에 거주하면서 현묘한 이치를 드러내 보이고 불법의 요체를 선양하였는데 선악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므로 빠른 바람이 구름을 걷어내듯 하였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넘어섰으므로 ……(3자 결락)이 갇힌 것을 뚫고 나아가는 것과 (같았다 ?).

이 때부터 단월(檀越 : 절에 시주를 행하는 사람)들이 먼 지역에서부터 찾아 (7자 결락) 하였다. 이미 보산(寶山)에 이른 사람으로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아름다운 행위가 널리 드러났고 향기로운 이름이 멀리에까지 소문이 나서 명성은 천지와 사방에 드높고 찬사는 대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경문대왕(景文大王)께서는 오랫동안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넓히려고 하는 어진 마음을 가지고서 부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계셨는데 멀리서 선사의 덕을 듣고서 좋은 ▨을 세울 생각으로 ……(7자 결락) 월 5일에 관영(觀榮)법사를 보내어 멀리서 금조(金詔)를 내려 칭찬하고 산문(山門 : 사찰을 가리킴)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월광사(月光寺)는 계속하여 선사가 주지를 맡도록 하였다. 또 1년이 지나자 임금께서 다시 살펴보시며 거듭 윤음(綸音)을 내리고 잇달아 은혜를 베풀어 다(茶)와 ……(6자 결락)를 멀리에서 보내는 두터운 혜택을 베풀어 주셨다. 세상에서는 이를 영광이라고 여겼고 그에 따라 산문(山門)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중화(中和) 3년(헌강왕(憲康王) 9, 883) 한여름에 뱀들이 구멍에서 나와 골짜기에 가득차고 산을 덮었는데, 이들이 소리내어 슬프게 흐느끼고 머리를 숙이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선사는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사는 것에는 끝이 있으니 나라고 어찌 끝이 없겠느냐. 너희들은 마땅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에 힘써야 할것이다”라 하고 그해 10월 5일에 단정하게 ……(4자 결락, 입적하셨다 ?). 나이는 68이요 승려 생활은 39년이었다.

아아, 이름이 온 나라에 널리 퍼졌으니 죽었다고 해도 죽은 것이 아니요, 전해주신 法音이 천년에 이어질 터이니 가셨다고 해도 가신 것이 아니다. 돌아가신 때에 안개와 구름이 가득하여 온통 아득하여 지고 소나무와 회나무는 빛을 잃었다. 멀고 가까운 곳과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이 승려와 남녀 모두가 이러한 변화를 보고 땅을 두드리며 안타까와 하였고 슬픔을 간직하고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줄지어 애도를 표하고 가슴을 두드리며 길게 ……(5자 결락) 하니 눈물이 모여 샘을 이룰 정도였다.

문인(門人)인 융환(融奐) 등이 그 다음해 2월 10일에 유해를 옮겨 북원(北院)에서 장사지냈지만 자애로운 스승과 영원히 헤어지게 됨에 그 사모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제자들은 시간이 흘러 산과 골짜기가 바뀌고 육지와 바다가 바뀌게 되면 법을 전하여 주신 선사의 은혜를 잊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하여서 우러러 추앙하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에 행장(行狀)을 정리하여 (6자 결락) 커다란 비석을 세워 성대(聖代)를 빛내고자 하였다. (5자 결락) (지금 임금께서는 ?) 뛰어나신 문덕(文德)과 신성한 무덕(武德)을 갖추시고서 조상들이 하고자 하신 바를 계승하셨고 또 불교의 가르침에 더욱 깊이 의뢰하고 받들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선사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는 슬퍼하심이 지극하여서 그 마음을 스스로 이겨내시지 못하셨다. 이에 원랑선사(圓朗禪師)라고 시호(諡號)를 내려주시고 탑(塔)의 이름은 대보광선(大寶光禪)(?)이라고 하셨다. 또한 조칙(詔勅)을 내리셔서 용렬한 신(臣)에게 비문과 찬(讚)을 지으라고 하셨다. 신은 능력이 호랑이를 그리기에는 멀고 재주는 교룡(蛟龍)을 품을 수 없는데 외람되게도 (명하심을 ?) 받들어 ……(6자결락) 하게 되었다. (명(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자 결락)

달마(達磨)가 중국에 선법(禪法)을 전하였다.

널리 퍼져서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차고 넘치며

두루 흘러가 땅끝 하늘 끝까지 다하였네.

형체도 없고 묘사도 할 수 없는 곳까지 두루 통하며

열매 없고 꽃없는 곳에까지 운용할 수 있네.

굳이 문자를 붙이면 현주(玄珠)요 법인(法印)이며

억지로 이름하면 가섭(迦葉)이요 비로자나(毘盧遮那)라네.

조선(朝鮮)은 동쪽으로 부상(扶桑)과 접하였는데

옛 현인은 이곳을 복된 (땅 ?)이라고 일컬었네.

(5자결락) 달빛이고

깨끗하고 높으신 덕, 스님은 사람들의 복이었네.

옳고 그름은 깨우치셨지만 마음에 두지 않으셨고

신성함이나 지혜는 버리고 의롭다 여기지 않으셨네.

탐내고 성냄은 버리면서 버리지 않으신 것 같고

성색(聲色)은 좋아한 듯 좋아하지 않으셨네.

신령이 감동하여 감싸 돌봐 주셨고

임금께선 도를 사모하고 스승으로 모셨네.

훌륭하신 생각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뛰어난 업적은 (5자 결락)

▨▨는 모여들어 저자를 이루었으니

제자들이 어찌 다른 길로 나가겠는가.

육적(六賊)은 버렸는데 버리지 않은 듯 하고

방법(方法)은 알지만 모르는 듯 하네.

하늘은 누구를 벌주고 나무랄 거며

청구(靑丘)는 누구를 복주며 도와 줄건가.

현명하신 분이 갑자기 사라지시니

산문(山門)이 홀연히 쇠퇴해지네.

사찰은 슬퍼하고 (2자 결락)

(6자 결락)

아아 슬프도다. 법의 들보가 꺾여졌으니.

탑을 만들고 비를 새겨서 후세에 남기고자 하네.

용기(龍紀 : 당(唐)나라 소종(昭宗)의 연호) 2년(진성여왕(眞聖女王) 4, 890) 경술(庚戌)년 9월 15일에 이 비를 세우고, 문하(門下)의 승려 진윤(眞胤) 등이 글자를 새기었다.

판독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2]

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江府月巖山月光寺詔諡圓朗禪師大寶禪光靈塔碑幷序

朝請郎守錦城郡太守賜緋魚袋臣金穎奉敎撰
五騰山菩提潭寺釋迦沙門淳夢奉敎書

▨▨▨▨之君垂禮樂於百代猶龍之帝敷道德於萬方莫不崇仁重義允文允武好生惡殺乃儉乃慈若迺掃跡玄妙之鄕安寂自然之域了因果而雙▨▨▨思而並除靜爲躁」

▨▨▨▨▨喩人間若大夢齊衆生猶如來理寄忘言事超物外其惟我禪師之宗乎禪師諱大通字太融朴姓其家通化府仲停里歷代捨官爵之榮近親紹朴素之▨顯祖王考」

▨▨▨▨▨▨氏族本取城郡人也姙禪師日守節持齋誦經胎敎及其載誕果異常倫禪師蘊河嶽之英靈稟乾坤之秀氣猶崑山之片玉寔桂林之一枝將邁觹年爰登冠歲家」

▨▨▨▨▨▨▨勉旃於翰黑之場耽翫於經史之域汝其志哉禪師乃恭受其旨忽焉尋師聰睿則五行具下敏捷乃一覽無遺遍通諸子百家洞▨千經萬論後窺內典益悟群」

▨▨▨▨▨▨▨是非不異遂投簪落髮解褐披緇以會昌乙丑年春投大德聖鱗進具戒僧▨配居丹嚴寺26)▨是修心戒律練志菩提忍辱精進爲先布施恭敏爲次時爲獅子喉」

▨▨▨▨▨▨▨忘年請交廻席相事時也師兄慈忍禪師自唐歸國師時造謁忍禪師察其雅懷知非所敎乃設馬鞭之義激揚龍象之心師卽潛▨憤悱欲扣玄微爰抵樴山寓」

▨▨▨▨乃神僧元曉成道之所也習定三月後依廣宗大師大師見知令惣寺務師不獲已因而蒞焉未幾功就曰吾當捨去以大中丙子歲投入唐賀正」

▨▨▨▨▨▨華夏遍詣宗林乃至仰山師事澄虛大師大師豫察聰惠俯令精心敎諭眞宗夙夜無倦師素槩超倫丹誠罕匹智踰離日識邁彌天▨涉炎凉默受黃梅之印不經」

▨▨▨▨▨▨之珠後乃巡禮名山歷參禪伯旣周中夏欲化東溟咸通七年投廻易使陳良付足東來時乃波濤騰湧煙靄昏沈舟楫有傾覆之虞僧俗▨▨溺之患師乃略無惧」

▨▨▨▨▨不易去國之麻衣匪換出家之壯志若非神通妙用智識遐周履險不驚孰能至此廣宗大師聞師東還遣使邀請異禮相接▨愛良多來年春出山寓止」

▨▨▨▨夏夜夢月嶽神官來請及曉慈忍禪師致書云月光寺者神僧道證所刱也昔我太宗大王痛黔黎之塗▨▨▨海之▨▨止戈三韓之年垂衣一統之日被」

▨▨▨之▨永除▨▨之災別封此山表元勲也曾授錄於金剛又傳名於仙記淸冷泉澗靉靆煙霞廣孕珠靈備存▨傳師其居焉師如響應聲振衣卽▨▨▨▨夕夢前神侍衛」

▨▨▨▨▨▨▨行致禮肘步瞻容曰先有叨陳勞遠相應師是以養形玆地寄居此山顯示玄機揄揚法要不存善惡若疾風之歸雲解脫是非▨▨▨之突圍由是檀越將踰境」

▨▨▨▨▨▨▨旣至寶山之人罕聞索手之士羶行普彰香名遠着價高六合譽及九重景文大王以弘長養之深仁慘空寂之釋典遠聆禪德思竪良」

▨▨▨▨▨▨▨月五日遣觀榮法師遠賞金詔慰勞山門月光寺永令禪師主持又一年再廻天睠重降綸音追錫恩波遐宣眷渥茶」

▨▨▨▨▨▨來世論爲榮禪門增耀中和三仲夏群虵出穴遍谷盈山叱口悲號垂頭泣血禪師謂門人曰生也有涯吾豈無盡汝等當無隳怠勉力修行以其年十月五日儼」

▨▨▨▨年六十有八僧臈三十九鳴呼歿而不歿名播三韓亡而不亡法流千載於是煙雲索漠松檜蒼茫遠近僧徒高卑士女覩變▨而叩地銜悲傷以號天接武致哀拊膺長」

▨▨▨▨▨淚集成泉門人融奐等以其年二月十日奉遷神柩葬于北院永訣慈顏不勝感慕門人等慮陵遷谷徙天拂海田有忘先師法乳之恩欲以仰陳攀慈之志爰集行狀」

▨▨▨▨▨▨居請建鴻碑用光聖代」

▨▨▨▨▨英文聖武繼祖嗣圖凡於內敎之中尤深依仰之意聞亡悲怛不自勝任仍追諡圓朗禪師塔號大寶光禪又詔微臣修撰碑讚臣功疎畵虎用匪懷蛟叨奉」 

▨▨▨▨▨▨其詞曰」

▨▨▨▨▨▨沙達摩兮傳心中華散滿兮山盈谷溢周流兮地角天涯圓通兮無形無相任用兮非實非花强字兮玄珠法印强名兮迦葉盧遮朝鮮兮東接扶桑昔賢兮稱玆福」

▨▨▨▨▨▨月光淸高兮爲僧人瑞是非兮了之不存聖智兮弃之不義貪瞋兮捨而不捨聲色兮利而不利神靈兮感化圍繞皇王兮念道崇師嘉猷兮無疆莫極懿績」

▨▨▨▨▨▨▨兮欝然成市學徒兮豈或多歧六賊兮去而不去方法兮知而不知皇▨兮何辜何戾靑丘兮孰福孰祐哲人兮焂然委化禪林兮忽焉衰朽祗園兮慘慘」

▨▨▨▨▨▨▨▨秀鳴呼哀哉法梁折勒石銘金示諸有」

龍紀二年歲次庚戌九月十五日建 門下僧眞胤等刻字」

주석

  1. 온라인 참조: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