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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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장동룡 (토론) 사용자의 2016년 12월 25일 (일) 20:09 판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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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1593년)에서 전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으로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내에 있다. 1593년(선조 26)서울에서 물러나 부산 등지에 집결되어 있던 왜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10여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김천일 등은 끝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순절하였다. 이에 왜란이 끝난 뒤 정사호(鄭賜湖)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사우를 세웠으며, 조선 선조 40년(1607)에 사당의 이름을 창열사로 임금이 지어(사액) 내렸다. 1712년(숙종 38) 병사 최진한(崔鎭漢)에 의하여 중수되었으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대상에서 제외되어 존속되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1554∼1592)을 모신 충민사가 없어지자 창열사에 함께 모셨다. [1]

창열사의 정사(正祠)에는 충무공(忠武公)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을 필두로 하여, 문열공(文烈公)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무민공(武愍公)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황진(黃進), 충의공(忠毅公)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의공(忠毅公)장윤(張潤), 효열공(孝烈公)고종후(高從厚),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유복립(柳復立) 등 모두 7분을 열향(列享)하고 있다. 이외에도 의병장 이잠(李潛),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김천일의 아들 상건(象乾), 의병장 양산숙(梁山璹), 우병우후(右兵虞侯) 성영달(成潁達), 의병장 강희열(姜熙悅),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진해현감 조경형(曺慶亨), 첨정 윤사복(尹思復), 판관 최기필(崔琦弼), 의병장 유함(兪晗), 생원 이욱(李郁), 의병장 강희복(姜熙復), 수문장 장윤현(張胤賢), 의병장 손승선(孫承善), 주부 정유경(鄭惟敬), 수문장 김태백(金太白), 판관 박승남(朴承男), 선무장 양제(梁躋), 학생 이인민(李仁民)·하계선(河繼先)·박안도(朴安道)·최언량(崔彦亮) 등을 동서로 나누어 배향하였다. [2]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1593년)에서 전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으로,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金時敏)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훼철되자 장군의 신위를 창렬사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 사당 안에는 충무공(忠武公) 김시민의 신위를 제일 윗자리에 모시고 있으며, 그 밖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등 진주성 싸움과 관련된 39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3]

가상현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창열사 ~을 배향하였다 김시민


참고

  1. 네이버지식백과, '창열사'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창열사'
  3. 네이버 지식백과, '충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