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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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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80px]] | |
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 |
인물명 | 김언경(金彦卿) |
이칭/호 | |
시대/국적 | 고대/남북국 |
출생-사망 | 미상 |
성격 | |
유형 | |
대표직책/관직 |
정의
신라 하대의 관리·서예가.
내용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장사현의 부수(副守)를 지냈다.[1]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헌안왕의 명을 받아 다약(茶藥)을 받들고 가서 그를 맞았다. 그 뒤 체징이 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한 후에는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어 사재(私財)로 철 2,500근을 사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한 구를 만들어 봉헌(奉獻)하는 등 선종구산 중 가지산파의 후원에 크게 힘썼다.[2]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머리에서 7행까지는 김원(金薳)이 해서(楷書)로 썼고, 7행의 선(禪)자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로 썼다.[3]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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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 김언경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김언경 | A는 B와 관련있다 |
참고문헌
-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