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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목) 12:22 기준 최신판
탑비 |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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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
승려 | 홍각선사(弘覺禪師) |
찬자 | 김원(金薳) |
각자 | 운철(雲澈) |
번역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1]
(마멸) 고 홍각선사의 비명 및 서
유림랑 수 병부랑중 겸 숭문관 직학사이며 비어대를 하사받은 신 김원이 교를 받들어 짓고, 사문인 신 운철이 교를 받들어 진나라 우장군 왕희지의 글을 집자하다.
(마멸) 법은 본래 진도 아니고 가도 아님을 알아야 선의 종취에 통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을 말하되 실이 그 속에 있고 실을 논하되 공이 그 안에 있어서, 멀리 천경의 밖까지 밝히고 항상 삼라만상의 ▨를 드러낸다. (마멸) 도의 본체를 허물면서 아울러 화합하게 하니 자연히 사라지지도 아니하고 생기지도 아니하며 더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을 닦으면 마침내는 정각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얻으면 그 근원을 궁구하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불법이다. 법(마멸)은 그윽하고 고요한 고을에서 자취를 일소하고 말을 잊은 경지에서 편안하고 고요하니, (그 사람은) 바로 홍각선사가 아니겠는가!
선사는 정신이 뛰어나게 맑고 시원하며 본성의 깨달음이 비범하여, 법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나루터이자 다리였다. (마멸) 휘는 이관이요 자는 유자이며 (속성은) 김씨로서 서울 사람이다. 묵묵히 천축 알아 (마멸) 굳건한 정절로 한결같이 머무르매 절개와 지조는 짝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세상에 처함에 송죽 같은 마음을 지녔다. 편안히 (마멸) 두루 경서와 사서에 통하여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삼황오제의 고전을 암송하는 기민함은 그보다 나을 수 없었다. 17세에 드디어 머리를 깎았으며, 승복을 입고 세속의 옷을 버렸다. (마멸) 해인사로 가서 여러 선지식을 찾아갔다. 그 뛰어난 것을 구하여 참예하고 듣는 것이 (마멸) 물흐르듯 하였으며, 뜻의 바다는 한량 없고 글의 봉우리는 드높았다. 노숙들이 모두 칭찬하기를, “후생이 (마멸)”이라 하였다. (마멸) 영악에 노닐며 두루 선림을 찾았다. 우연히 어느 높은 산에 갔다가 문득 (마멸) 하고자 하였다. (마멸) 푸른 샘물과 구름은 기이하고도 빼어나며, 노을진 모습은 그윽하면서도 (마멸)하였다. (마멸)을 가르치니 (이를) 듣는 자가 원근을 막론하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선사는 (마멸) 성스런 자취와 명산에서 두루 순례하기를 원하였다. (마멸)을 떨쳤다. (마멸)년에 다시 영암사에서 여러 달 동안 선정을 닦았는데 떠들썩한 무리들 (마멸). 원감대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혜목산에 머물며 (마멸) 산비탈에다 단단히 얽은 것을 새로 중건하니, 한 달이 채 못되어 완공되었다. (마멸)이 집집마다 가득차고 수레가 성을 기울일 정도였다. (마멸) 선사는 불문의 모범이요, 모습과 풍채가 준엄하여, (그를) 보는 자는 정신이 엄숙해져 (마멸) 선사를 상족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함통(860~874) 말에 다시 설산의 억성사로 가서 (마멸) 금당과 불전을 이루었다. 옥과 같이 좋은 나무들이 소나무 사이에 뒤섞여 있었으니, 은둔하는 것은 (마멸) 거슬렸으나, (마멸) 때에 명성은 우뢰처럼 세상을 울렸다. (마멸) 성상(헌강왕?)께서 명성을 듣고 그 덕을 사모하여 (마멸) 자나깨나 (마멸) 선의 자취를 (마멸). 그리하여 내연에 올라가 苦空을 강연하고 妙▨를 얘기하니 (마멸) 이에 (마멸) 용안(마멸) 푸른 하늘을 보게 되었다. 다시 열흘이 지나지 않아 하직을 고하자, 명을 내려 (마멸) 길에서 전송하고 (마멸) 임금께서 또 사신을 보내 산에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광명 원년(880: 헌강왕 6) 겨울 10월 21일 아침에 (마멸), “이제 법의 인연이 다 되었다. 너희는 힘써 도를 지키라”하고, 그날 자연스레 입적하니 (마멸) 법랍이 50세였다. 아! 살아서는 세속을 구제하더니 죽어서는 멸함을 보이는 구나. 임금께서 (마멸) 애도하고 만 백성이 슬퍼하였으며, 인동초가 시들고 자애로운 눈발이 처절하였다. (마멸) 무리들이 추모하는 슬픔을 못이기니, 제자 범룡과 사의 등이 매우 슬퍼하였다. (마멸) 임금은 중관을 명하여 시각을 다투도록 하였다. 이듬해에 (마멸) 시호를 홍각선사라 증하고 탑호를 선감지탑이라 하였다. 드높도다 (마멸) 나는 벼슬아치의 말류요 풍진 속의 볼품없는 관리로서 (마멸) 명예로운 재주가 빛나게 드날렸다. (마멸) 기술하였다. 비록 문장은 많이 간략하지만 일을 번잡하게 쓰지 않은 것은 대개 춘추에서 한 글자의 (마멸)
(마멸) 위대하도다 불일이여 모든 땅을 다 비추고,
성대하도다 법(마멸)여 흐르지 않는 곳이 없구나.
진한은 불법을 너무나도 숭상하여 (마멸)을 닦으니,
천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왕사성과 필적할 만하도다.
선사는 가르침을 펼치고 성스런 자취에 두루 노닐며,
(마멸)
참 이치를 깨달았고 지극한 도를 마침내 깨쳤으니,
마음 거울 환히 열려 (마멸) 서릿발이 절로 녹았다.
설법하는 말자락마다 (마멸)하니,
담론함에 강물을 기울인 듯하고 덕은 높아 산을 우러렀다.
대궐의 법좌에 자주 올랐으되, (마멸)
선의 가르침을 꺾고 헐뜯었으며, ▨기(▨期)를 깎고 ▨▨하였다.
(마멸) 사람도 한적하고
선방이 적막하고, 현관(玄關)이 (마멸)
법의 요체를 (마멸) 만고에 뉘라서 붙잡을꼬.
(마멸)하며 남겨진 영정 바라보고 눈물 흘리며 산 얼굴 적시니,
바위와 나무가 처량하고 구름과 산봉우리도 쓸쓸하구나.
큰 비를(마멸)
대당 광계 2년(886:정강왕 1) 병오 10월 9일에 세우다. (마멸) 거성현의 최경이 비액의 전자를 쓰고 보덕사의 사문 신 혜강은 글자를 새기다.
판독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2]
故弘覺禪師碑銘 幷序」
儒林郞守兵部郞中兼崇文館直學士賜緋魚袋臣金薳奉敎撰」
沙門臣雲徹奉敎集晉右將軍王羲之書」
(마멸)知法本不眞不假迺達禪宗是故譚空而實在其中論實而空居其內逈曉千經之表恒彰萬象之」
(마멸)端焉壞道體兼作化成自然非滅非生不增不減修之則了乎正覺得之則豈究其源斯爲法焉法」
(마멸)掃跡於玄寂之鄕安靜於忘言之域其惟弘覺禪師乎禪師神岸淸爽性覺非凡法海津梁(마멸)」
諱利觀字有者金姓京都人也黙識天竺(마멸)粹堅貞居一節操無儔處世得松竹之心安(마멸)」
文該通書史一覽無遺誦讀經墳五(마멸)券之敏不爲尙也年十七遂剃髮披緇損俗」
(마멸)往海印寺訪諸善知求其勝者參聞(마멸)如流義海無涯詞峰極峻耆宿咸贊曰 後生(마멸)」
遊靈嶽遍詣禪林偶次凌岫便欲(마멸)翠泉雲奇而復異絶昏埃之態幽而(마멸)」
敎聽者無遠邇溱若雲屯禪師逍(마멸)聖跡名山願周巡禮乃振(마멸)」
年復於靈巖寺修定累月諠囂徒(마멸)」
圓鑑大師自華歸國居于惠目山(마멸)」
架崖構壑重建創修月未朞而功成(마멸)禪師緇門模範(마멸)彩儼容觀覩者莫不神肅(마멸)之爲上足咸通末復往於雪山億聖(마멸)成金殿與香榭參差琪樹共於松隱逆(마멸)於時譽雷於世聖上聆風慕德(마멸)寤寐(마멸)禪髑仍昇內筵演苦空談妙是乎龍顔(마멸)以覩靑天後不逾旬而告辭詔(마멸)餞路(마멸)上亦遣使衛送至山廣明元年冬十月卄一日詰旦(마멸)今法緣營盡汝等勉旃守道是日奄然遷(마멸)夏五十嗚呼生爲求俗亡以示滅(마멸)宸衷悼萬姓悲凉忍草凋衰慈雪慘絶(마멸)徒興追痛之哀弟子梵龍使義等百(마멸)側恩命中官爭刻焉來年(마멸)贈諡曰弘覺禪師塔號爲禪鑑之塔巍巍(마멸)衣冠末流風塵冗吏▨▨▨譽藝匪揚(마멸)陳紀述雖文多簡略事不繁書蓋春秋一字之(마멸)
(마멸)大哉佛日有土皆周盛乎法▨簡方不流辰韓酷尙▨▨▨修竺乾可竝王舍斯儔師其弘敎聖跡皆遊(마멸)眞理了悟至道竟覺心鏡洞開▨霜自鑠談法言表▨▨▨廓論發傾河德存仰岳頻昇內座居▨▨▨▨▨▨摧毁禪敎削▨▨期▨▨▨謝人間蕭條禪室寂寞玄關(마멸)法要萬古誰攀▨瞻遺影涕想生顔凄凄巖樹慘慘雲山豊碑(마멸)大唐光啓二年丙午十月九日建車城(마멸)崔瓊篆額報德寺沙門臣慧江刻字
주석
- ↑ "선림원지홍각선사비(禪林院址弘覺禪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선림원지홍각선사비(禪林院址弘覺禪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