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자취염초방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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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자취염초방언해
한자명칭 新前煮取焰硝方諺解
작자 이서(李曙)
작성시기 1635년
간행처 군기시(軍器寺)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유형 고서
판본 목판본



정의

화약의 재료인 염초를 채취부터 정제까지, 그 과정을 기록한 신전자취염초방을 언해한 고서이다.

내용

신전자취염초방언해에 대해서

신전자취염초방언해은 완풍군(完豊君) 이서(1580-1637)가 1635년(인조 13)에 화약의 원료인 염초를 채취하고 정제하는 과정을 기술한 고서이다. 이 이문서는 화포식언해와 합철되어있다. 신전자초방언해는 본래 신전자취염초방언해을 수정하여 간행한 책이나, 원문인 신전자초방화포식언해와는 합철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서적임을 알 수 있겠다. 신전자취염초방언해이 만들어진 이유는 화약 원료인 염초를 국내에서 보급하는 것이 어려워 매번 중국에서 매입하는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관서(關西)출신 무관인 성근(成根)이 중국에 잡혀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한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에게 물어서 염초 채취 및 정제 기술을 익혔다. 책의 내용 구성을 보면, 화약제조법을 만드는 순서에 따라 취토(取土), 화합(和合), 증백(蒸白), 재토(滓土), 본수(本水), 작회(作灰), 안부(安釜), 열조(列槽), 재토(載土), 재수(載水), 기화(起火), 초련(初煉), 재련(再煉), 삼련(三煉), 총식(摠式), 비물(備物)의 열다섯 조목으로 나누어 염초의 채취와 정제기술을 찬집하였고, 최명길(崔鳴吉)이 발문을 써서 간행하였다. 앞에는 일정한 부분으로 구분된 한문 원문이 있고, 그 뒤에 언해문이 실려있다. 한문 원문에는 한글로 된 한자음과 한글 구결이 달려 있고, 언해문에도 한자음이 달려있다. [1] 신전자취염초방언해이 중요한 까닭은, 새로운 염초 제조법을 성근이 중국에서 배우고 스스로 연구하여 실험해 성공하였으며 이것을 15개 공정 방법으로 이서가 편찬한 것이다. 그 이전 임진왜란병자호란 시기 제대로 된 염초 제조 기술이 없어서 항상 조선은 염초 수급에 문제가 있었는데 이 시기 이유로 염초 생산과 정제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훗날 1698년(숙종 24) 역관 김지남(金指南) 이 서술한 신전자초방과 함께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조서후기의 유일한 염초제조법 문서이다. [2]

신전자취염초방언해의 판본에 대해서

현재 판본은 총 3가지가 있는데 모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첫번째 판본은 원간본으로 구안춘근 소장본이며, 화포식언해와 함께 한 책으로 묶여 있다. 책 끝에는 최명길의 발문과 간기 "숭정8년 8월 일간"가 적혀있다. 두번째 판본은 1685년(숙종 11)에 중간된 것이다. 그리고 간기에 감교관의 이름이 더 적혀있다. 또한 화포식언해와 필사본인 매화법이 합철되어있다. 이 책도 첫번째 판본과 같이 서문은 없고 동일한 최명길 발문이 있다. 마지막 판본은 1685년의 복간본으로 1796년(정조 20)에 간행된 것이다. 화포식언해와 함께 1698년(숙종 24)에 김지남이 지어 간행한 신전자초방언해의 중간본인 1796년판까지 합본되어 있다. [3]

신전자취염초방언해에 저자 이서(李曙)에 대해서

본관은 전주 자는 자는 인숙(仁叔), 호는 월봉(月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며, 아버지는 목사 완령부원군(完寧府院君) 경록(慶祿)이며, 어머니는 감찰 이학증(李學曾)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해 행사용(行司勇), 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대북파에서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무인으로서 그 만이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그 뒤 장단부사로 경기방어사를 겸했고, 1623년 인조반정김류(金瑬), 이귀(李貴) 등과 함께 공을 세워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완풍군(完豊君)에 봉해졌다. 이어 경기관찰사가 되었으나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관찰사로 부원수(副元帥)를 겸해 적을 추격, 송도(松都)에 이르렀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으로 요해처에 웅거한 채 출전하지 못해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국공신 직위를 회복하였으며 완풍군 직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총융사(摠戎使)로서 왕에게 건의해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량을 많이 확보했으며, 삼혈총(三穴銃 : 砲身이 세 개가 겹쳐있는 총)과 조총(鳥銃)을 많이 제조해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인조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경연(經筵) 특진관(特進官)으로 삼아 국방 문제를 항상 상의했다 한다. 1628년 형조판서를 거쳐 1632년에는 특명으로 공조판서가 되어 각처에 산성을 수축해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34년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1636년 병으로 일시 사직했다가 곧 훈련도감제조를 거쳐 병조판서로 기용되어 군비를 갖추는 데 힘썼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영제조(御營提調)로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지키다가, 이듬 해 정월에 적군이 겹겹이 포위하고 항복을 재촉하는 가운데 과로로 순직하였다. 무신으로 최초의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독서를 좋아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또한 그는 남한산(南漢山)의 형세를 살핀 후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투시에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뜻을 읽고 인조에게 건의해 산성을 수축케 하였다. 이런 공으로 남한산성의 온조왕묘(溫祚王廟)와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식언해마경언해(馬經諺解)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4]

무관 성근(成根) 과 신전자취염초방언해에서 나타나는 염초 정제기술

생몰년은 알수가 없으며 다만 인조시기 별장을 지낸 무장이다. 염초 달이는 방법을 성공적으로 연구하고 실험한 사람이다.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를 만드는 기술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하여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화약을 중국에서 사들여 왔으므로, 그 공급량이 충분하거나 일정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화약 제조법 자체가 군사 기밀이어서 조선이 공식적 루트로도 구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명나라 때는 요청에 의해서 염초를 구할 수 있었지만, 청나라 때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때문에 더욱 어려워 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국방에 꼭 필요한 화약이 항시 부족한 것을 걱정하던 성근은, 포로들이나 다른 중국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연구하여 무고(武庫)에서 실험한 결과 힘은 전보다 쉽고도 100배나 성능이 좋은 화약제조 방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성근에 관해서는 문헌에 알려진 것이 없으나 1698년(숙종 24)에 간행된 역관 김지남신전자초방에 실려 있는 간기에서 성근이 관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5]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주석

  1. 신전자취염초방언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 중앙연구원.
  2. 신전자취염초방, 『국립중앙과학관』online, 국립중앙과학관.
  3. 신전자취염초방언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 중앙연구원.
  4. 차용걸, 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 중앙연구원.
  5. 고경신, 성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 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