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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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소(慧昭)()
대표명칭 혜소(慧昭)
영문명칭 Hyeso
생몰년 774(혜공왕 10)-850(문성왕 12)
시호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탑호 대공(大空)
성씨 최씨(崔氏)
출신지 익산(益山)
승탑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정의

통일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25px 어머니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가매(假寐, 잠자리를 제대로 차리지 않고 잠을 자는 것)를 하였는데, 꿈에 한 범승(梵僧)이 나타나 “나는 아미(阿㜷, 방언으로 어머니를 이른다)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이르며, 유리 항아리를 표적을 삼아 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사를 임신하게 되었다. 25px
출처: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3쪽.


혜소(慧昭)는 774년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다. 그의 선대는 한족으로, 산동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 지방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뜻을 굽히고 귀화한 자가 있었는데, 당나라가 옛 한사군 지역을 차지함에 이르러, 바로 전주의 금마 사람이 되었다. [1] [2] 어린시절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삼았다.[3]

입당유학

25px 드디어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면서 “슬프게 이별한지가 오래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라고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함에, 머리를 조아려 인계를 받았다 ...(중략)... 승려들 가운데서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 라고 하였다. 25px
출처: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5쪽.


혜소는 804년(애장왕 5년, 31세)에 당나라로 들어가는 세공사(歲貢士)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기를 자원하여 당나라로 간다. 당나라에 도착하자 바로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만나 수행하고, 810년(헌덕왕 2년, 37세)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나라에서 신라 승려 도의와 만나기도 하였다. 도의가 먼저 신라로 돌아가자[4] 혜소는 중국을 유람하며 고행을 닦았다.[5]

귀국 및 활동

25px 이에 태화 4년(흥덕왕 5년, 830년)에 귀국하니 대각(大覺)의 대승법(大乘法)이 인역(仁域, 우리나라를 말함)을 비추었다. 흥덕왕께서 칙서를 급히 내리고 맞아 위로하시기를, “도의 선사가 지난번에 돌아오더니, 상인(上人, 승려를 높이는 말)께서 뒤이어 이르러 두 보살이 되셨도다. 옛날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오늘에는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노라. 하늘에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쪽 나라 계림의 경내를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집으로 만들리라.” 고 하셨다. 25px
출처: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8쪽.


혜소가 신라로 귀국하자 흥덕왕이 칙서를 내리고 맞이하였다. 그 후 상주 장백사(長柏寺)에 주석하게 하였다.[6]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지리산 화개곡(花開谷)의 고 삼법(三法) 화상이 세운 절의 남은 터전 위에 당우(堂宇)를 꾸렸다. 흥덕왕의 지원을 받던 혜소가 상주를 떠난 것이 경주를 중심으로 한 화엄종밀교의 정치적 움직임, 그 대표적인 것이 태화년간(太和年間, 827-835)에 있었던 화엄결사(華嚴結社)와 관련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7]


25px 드디어 기묘한 절경을 두루 가리어 남령의 한 기슭을 얻으니, 앞이 확 트여 시원하기가 으뜸이었다. 선사를 지음에, 뒤로는 저녁노을이 끼는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간수를 내려다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중략)... 일찍이 중국에 유학했던 사람이 찾아와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혜원선사의 동림사를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중략)... 홈을 판 대나무를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 두 글자로 절의 이름을 삼았다. 25px
출처: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203-204쪽.


혜소는 지리산 화개곡(花開谷)에 거처를 정하게 된다. 삼법(三法) 화상이 세운 절의 터가 좁아지게 되나 옥천사(현재의 쌍계사)를 건립한다. 그가 중국에 갔을 때 여]의 동림사(東林寺)에 들러 참배하고 머물렀던 경험을 배경으로 하여 동림사가 위치했던 장소와 비슷한 지형을 골라 옥천사를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8] 혜소는 쌍계사 창건 이후 육조영당[9]을 건립하여 남종선의 소개 및 확산에 노력하였다. 혜소가 육조영당을 건립한 배경으로는 혜소가 귀국했을 때 불교계에서 선종의 위치가 미미하여 선종 확산이 어려움이 많아서 좀 더 가시적인 남종선의 소개 방법이 필요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0]

입적

25px 대중 4년(문성왕 12년, 850년) 정월 초아흐렛날 새벽, 문인에게 말하기를 “모든 법이 다 공이니 나도 장차 가게 될 것이다. ‘한 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거나 명을 지어 걸어온 발자취를 기옥하지 말라!”고 하였다. 25px
출처: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205쪽.


혜소는 77세, 법랍 41년에 입적하였다. 그의 유훈에 따라 제자 법량 등이 장사를 지내었다. 문성대왕은 시호를 내리려다 그만 두었는데 혜소가 남긴 유훈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헌강왕대에 이르러서 ‘진감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하고 탑이름을 ‘대공령탑(大空靈碑)’이라고 하고 함께 탑비(塔碑)를 세우게 하였다. [11]

혜소가 입적한 것이 850년이고 탑비가 세워진 해가 887년, 즉 헌강왕 대 이후인 이유에 대해선 혜소와 민애왕과의 연관 때문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민애왕민애왕을 죽이고 왕이된 신무왕(김우징)은 서로 숙적이었다. 민애왕희강왕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는 신무왕의 아버지인 김균정을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균정의 아들인 우징까지 왕도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김우징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고, 그의 아들이 문성왕이 되었으므로 혜소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사후에 탑비조차 제대로 세워질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헌강왕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탑비에 대한 논의가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은 헌강왕이 신무왕계가 아닌 희강왕계였기 때문이다.[12]

범패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감 혜소 A는 B의 스승이다
혜소 도의 A는 B의 동문이다
혜소 장백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830년
혜소 흥덕왕 A는 B와 관련있다
혜소 삼법 A는 B와 관련있다
삼법 옥천사 A는 B를 창건하였다 723년
혜소 옥천사 A는 B를 중건하였다 840년
혜소 법량 A는 B의 스승이다
혜소 민애왕 A는 B와 관련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887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썼다 887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환영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887년
혜소 소림사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810년
혜소 범패 A는 B와 관련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참고문헌

  • 김정권, 「진감선사 혜소의 남종선 수용과 쌍계사 창건」, 『역사와 담론』 27, 호서사학회, 1999, 1-36쪽.
  • 조범환, 「眞鑒禪師 慧昭와 雙谿寺에 대한 연구 현황과 제안」, 『신라사학회』28, 2013, 193-225쪽.
  • 김복순, 「眞鑑禪師(774~850)의 생애와 불교사상에 관한 연구」, 『한국민족문화』 15, 2000, 205-231쪽.
  •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88-214쪽.

각주

  1.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2-193쪽.
  2. 혜소의 선대는 고구려계 유민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유민에 대해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지금의 익산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게 했다고 한다. 김정권, 「진감선사 혜소의 남종선 수용과 쌍계사 창건」, 『역사와 담론』 27, 호서사학회, 1999, 4쪽.
  3.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4쪽.
  4. 도의는 혜소보다 9년 앞서 821년 신라로 귀국하였다.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7쪽의 각주 51.
  5.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4-198쪽.
  6. 상주 장백사에 주석하게 된 이유로는 당시 상주 지역이 김헌창(金憲昌)의 난의 중심지로 신라 체제에 반하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는 곳으로, 변화가 많은 지역 상황에서 새로운 사상인 선종을 소개 확산 시키는 것이 용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김정권, 「진감선사 혜소의 남종선 수용과 쌍계사 창건」, 『역사와 담론』 27, 호서사학회, 1999, 16쪽.
  7. 당시 경주에서는 화엄과 밀교를 중심으로 한 신앙결사운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흥덕왕이 선사(禪社)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화엄종과 밀교 중심의 교종세력이 불만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김정권, 「진감선사 혜소의 남종선 수용과 쌍계사 창건」, 『역사와 담론』 27, 호서사학회, 1999, 19-20쪽.
  8. 김복순, 「眞鑑禪師(774~850)의 생애와 불교사상에 관한 연구」, 『한국민족문화』 15, 2000, 205-231쪽.
  9. 육조 영당은 중국 선종의 육조이며 남종선의 초조인 육조 혜능의 진영을 모시는 사당을 말한다. 김정권, 「진감선사 혜소의 남종선 수용과 쌍계사 창건」, 『역사와 담론』 27, 호서사학회, 1999, 31쪽.
  10. 김정권, 「진감선사 혜소의 남종선 수용과 쌍계사 창건」, 『역사와 담론』 27, 호서사학회, 1999, 31-32쪽.
  11.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207-209쪽.
  12. 조범환, 「眞鑒禪師 慧昭와 雙谿寺에 대한 연구 현황과 제안」, 『신라사학회』28, 2013, 205-2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