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문
탑비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
한자 | 淸道 雲門寺 圓鷹國師碑 |
승려 | 학일(學一) |
찬자 | 윤언이(尹彦伊) |
서자 | 미상 |
각자 | 미상 |
번역문
- 출처: 이지관,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59-297쪽.[1]
고려국(高麗國) 운문사(雲門寺) 원응국사(圓應國師)의 비(碑) [제액(題額)]
은청(銀靑) 광록대부(光錄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호부(戶部)상서(尙書) 판형부사(判刑部事)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윤언이(尹彦頤)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다[비문(碑文)을 쓴 이는『海東金石苑』에는 ‘왕사(王師) 단속사(斷俗寺) 주지(住持) ▨▨▨▨▨▨▨가 봉선서(奉宣書)’라 하였고,『海東金石苑』劉承幹의 고증(考證)에는 ‘석(釋)▨▨ 서(書)’라 하였으며, 갈성말치(葛城末治)의『朝鮮金石攷』에는 ‘왕사(王師) 석(釋)▨▨’를 석탄연(釋坦然 : 1070~1159 )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찍이 듣건대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모든 부처님께서 비장(秘藏)하여 아끼는 바이다. 시방허공(十方虛空)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그리고 유색(有色)과 무색(無色) 등 이 모두가 여래장중(如來藏中)의 묘명(妙明)한 존재이므로, 여래(如來)의 삼신(三身)이 여기에서 나타나며, 보살(菩薩)의 만행(萬行)도 또한 이로부터 성취(成就)된다. 그러므로 (결락) 로서는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오직 현람(玄覽)을 씻어버리고, 공(空)과 유(有)에 떨어지지 아니한 몸은 마치 고목(槁木)의 가지와 같으며, 또한 마음은 불이 꺼진 싸늘한 재와 같은 것으로써 족히 해(解)를 삼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세상의 우매한 자가 바야흐로 또한 마치 불이 사방(四方)으로 나아가서 닥치는 대로 연접(連接)하여 소식(燒食)하는 것과 같이 모든 망상(妄想)으로써 자심(自心)의 체(體)를 삼아 종신(終身)토록 얽매여 망연(茫然)한 상태로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므로 일단영성(一段靈性)이 캄캄한 유암(幽暗)으로 변하게 되어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하고 돌아올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미혹(迷惑)함이 아니겠는가?
여래(如來)께서 그러한 중생(衆生)을 불쌍히 여기시어 49년 동안 삼승(三乘) 12분교(十二分敎)를 설법(說法)하여 근기의 이둔(利鈍)을 따라 중생을 인도하셨다. 그러나 이른바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본래 말이 없는 경지이지만, 부처님께서 일생(一生)의 교화(敎化)가 장차 끝나려 하므로, 시간과 공간인 천하(天下)와 후세(後世)에 널리 전(傳)해지지 못할까 염려(念慮)하였다. 그리하여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금색(金色) 바라(波羅)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으나, 오직 마가가섭존자(摩訶迦葉尊者)만이 묵연(黙然)히 파안미소(破顔微笑)함으로써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해받고, 그로부터 조조(祖祖)가 상전(相傳)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결락) 서건(西乾) 28조(祖) 중 제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에 이르렀고, 이어 달마대사가 이어받아, 동토선종(東土禪宗)의 제5조(祖)인 홍인대사(弘忍大師)에까지 이르러서는 더욱 여러 파(派)로 분리(分離)되어 북방(北方)의 신수(神秀)와 남방(南方)의 혜능(慧能)으로 돈점(頓漸)이 갈라졌다. 그러나 신수(神秀)의 계파(係派)는 후세(後世)에 단절되었고, 혜능문파(慧能門派)는 그 지파(支派)가 침연(浸衍)하고 호호(浩浩)하여 마치 백천(百川)의 중류(衆流)와 같았다. 자세히 그 사자상승(師資相承)을 거슬러 올라가면 요약컨대 불타(佛陀)의 정종(正宗) 하나 뿐인 것이다. 해동(海東)의 부도씨(浮圖氏)가 그 가풍(家風)을 듣고 기꺼이 발심(發心)한 자가 무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결락) 모든 의문(疑問)이 마치 얼음처럼 녹고, 매듭이 풀린 듯하여 지견(知見)이 고명(高明)하니, 그 지(知)는 무지(無知)에서 나왔고, 견(見)은 무견(無見)에서 발현(發現)하여 조사(祖師)의 심인(心印)에 계합(契合)한 분이 있었으니, 우리는 바로 원응국사(圓應國師)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국사의 속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학일(學一)이며, 자(字)는 봉거(逢渠)이니, 서원(西原) 보안(保安)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응첨(應瞻)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도 이씨(李氏)니 어느날 밤 용(龍)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 임신하였다. 만삭(滿朔)이 되어 출생하였는데 향기가 실중(室中)에 가득하여 오랫동안 흩어지지 아니하였다. 국사는 젖먹이 때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 젖을 먹지 아니하였고, 나이 겨우 8살 때 이미 훈혈(葷血)을 먹지 않았다. 11살적에 진장(眞藏)스님을 은사로 삭발하여 스님이 되었고, 13살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향수사(香水寺)의 혜함(惠含)스님을 찾아가 친견(親見)하였다. 혜함스님이 어느날 스님에게 거양(擧揚)하되, 어떤 스님이 장경혜릉(長慶慧稜)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학인(學人)이 출신(出身)할 길이옵니까.” 장경(長慶)이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출신(出身)할 길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나서 (결락) 계속 정진(精進)하여 선지(禪旨)를 통달하였다. 또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하지 못한 것이 없으며, 더욱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博通)하여 반야삼매를 얻었다. 그로부터는 인간(人間)의 질병에 대하여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일체(一切)를 구제하되, 진찰만 하면 문득 효험이 있었다. 종도(宗徒)들이 스님의 도덕을 추앙(推仰)하되, 마치 태산(泰山)처럼 앙모(仰慕)하며, 또한 중성(衆星)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을 향하는 것과 같았다.
우리 선왕(宣王) 2년 송(宋)의 신종(神宗) 원풍(元豊) 7년 갑자(甲子)에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승과고시(僧科考試)에 우수한 성적으로 (결락) 합격하였다. 대각국사가 입송유학(入宋遊學)하여 화엄종지(華嚴宗旨)와 겸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수학하고 철종(哲宗)의 원우(元祐)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귀국하여 천태지자(天台智者)를 존숭하여 별도로 천태종(天台宗)을 창립하였다.이 때 총림납자(藂林衲子)가운데 천태종으로 경속(傾屬)한 자가10 중에 6·7명이나 되었다.이러한 현실을 본 스님께서는 조도(祖道)가 조락(凋落)하여짐을 슬퍼하며, 개연(介然)한 결심으로 쓸쓸히 홀로 서서 위법망구(爲法亡軀)의 정신으로 생명을 바쳐 호종(護宗)하였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勸諭)하였으나, 끝내 그의 명(命)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이에 (결락) 산(山) 횡봉사(橫峯寺)로 은둔하여 그곳을 열반지처(涅槃之處)로 삼으려고 하였다. 왕제(王弟)인 부여공(扶餘公)은 선지(禪旨)에 조예가 깊었는데, 스님과 더불어 평소(平素) 서로 친한 사이였다. 예의(禮儀)를 극진히 하여 궁내(宮內)로 초빙하였으므로 스님께서는 경사(京師)로 나아갔었다.
우리 숙왕(肅王) 4년이며, 송(宋)의 소성(紹聖) 5년 무인(戊寅)에 대각국사가 홍원사(弘圓寺)에 원각경 법회(法會)를 개설하고 스님을 부강(副講)으로 모셨으나, 스님이 사양하기를 “선(禪)과 강(講)이 교람(交濫)하는 일은 감당할 수 없다” 면서 다만 법석(法席)에 참석하여 청강할 뿐이었다. 숙종의 왕자(王子)인 징엄(澄儼)이 있었으니, 이른바 지금의 원명국사(圓明國師)인데, 그가 9살 때 어느날 갑자기 폭사(暴死)하여 몸에 체온이 모두 끊어져 싸늘한 시체처럼 되었다. 원각회(圓覺會)에 모였던 모든 대중이 창황(愴惶)하고 전도(顚倒)하여 구명(救命)할 방법을 몰랐다. 마침내 대각국사가 스님에게 구제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스님께서 비밀리 대반야(大般若)를 염송(念誦)하였더니, 조금 후에 왕자(王子)가 소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각국사께서 특히 경중(敬重)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숙종 임금이 스님의 법력(法力)을 자세히 듣고 법주사(法住寺)로 이주(移住)하도록 주선하였다.
그 후 우리 예왕(睿王) 원년(元年)이며 송(宋)의 숭녕(崇寧) 4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첨가(添加)하고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으며 몇 달도 되지 않아, 다시 귀산사(龜山寺)로 이주하였다. 송(宋)의 도군(道君) 대관(大觀) 2년 무자(戊子)에 이르러 선사(禪師)의 법계를 첨가하였고, 정화(政和) 3년 계사(癸巳)부터는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으며, 4년 갑오(甲午)에는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진가(進加)하였고, 7년 정유(丁酉)에는 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으며, 선화(宣和) 4년 임인(壬寅)에 예종(睿宗) 임금께서 병환으로 인하여 스님을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왕사(王師)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스님께서는 굳게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시중(侍中)인 김인존(金仁存)등이 스님께 이르기를 “임금께서 스님을 신하(臣下)로 여기지 않고자 정중한 예의(禮儀)로 스님을 섬긴지 이미 오래이온데, 스님께서 왕의 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함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간고(諫告)하므로, 스님은 부득이 왕명(王命)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종(睿宗)께서 왕사(王師)로 모시는 배례(拜禮)는 올렸으나, 미처 왕사책봉(王師冊封)의 의전은 행하지 못하고 왕이 등하(登遐)하였다.
4월 (결락)에 인왕(仁王)이 즉위(卽位)하여 선왕(先王)의 뜻을 추술(追述)하여 7월 7일 중사(中使)를 보내 편지로써 뜻을 전달하고, 7월 8일에도 같이 하였으나, 스님은 장계(狀啓)를 갖추어 사양(辭讓)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도 물러서지 않고 재삼(再三) 사신을 보내 마침내 허락을 받아 12일에 이르러 예의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16일에는 인종(仁宗)이 명경전(明慶殿)에 행행(幸行)하여 제자(弟子)의 예를 펴고, 백관(百官)들은 함께 축하의 예배를 올렸다. 5년 계묘(癸卯)의 봄부터 여름에 날이 크게 가물어 (결락) 스님에게 기우(祈雨)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스님께서 옥촉정(玉燭亭)에서 대선사(大禪師)인 득선(得善)등과 더불어 선지(禪旨)를 거양(擧揚)하였더니, 다음 날 큰 비가 내려 전야(田野)를 축축히 적시어 완전히 해갈(解渴)하였으므로, 그 후부터는 수(水)·한(旱) 등 재변(災變)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면 효응(效應)이 없을 때가 없었다. 또 그 해에 승과고시(僧科考試)의 선석(選席)에 주맹(主盟)이 되었는데, 당시 학자들이 ‘이종자기(二種自己)’에 대하여 극렬(極熱)하게 토론하였다. 이를 본 스님이 이르기를 “자기(自己)란 본시 하나 뿐이어늘 어찌 둘이 있겠는가! 앞으로는 이러한 논리는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 면서 맹렬히 비판하였다. (결락) 이 말을 들은 학인(學人)들은 오랫동안 이에 대해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 그 후 혜홍(惠洪)의『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이 전래(傳來)함에 이르러 고사삼실(古師三失)을 비판함에 있어 자기(自己)를 이종(二種)으로 분류(分類)함을 일실(一失)로 지적한 것을 보고서야, 학자(學者)들이 모두 의심을 끊었다.
대금(大金)의 천회(天會) 4년 병오(丙午)에 이르러 연로(年老)를 핑계하여 운문사(雲門寺)로 퇴거(退去)할 것을 빌었으나, 인종(仁宗)은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는 경사(京師)와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스님을 경암사 주지를 겸하도록 하여 스스로 왕래하기에 편하도록 주선하였다. 6년에 (결락) 경암(瓊嵒)으로 돌아가서 차자(箚子)를 갖추어 다시 귀사(歸寺)를 청걸(請乞)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굳었으므로 인종(仁宗)은 친서를 보내 만류하여 이르기를, “짐(朕)이 자주 내변(內變)을 만났으며 혹은 충예(冲倪)가 상차(喪差)하였을 때마다 국사의 도력(道力)에 힘입어 안녕(安寧)을 얻었는데, 지금 과인(寡人)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시니, 장차 누구를 의지하오리까” 라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임금님의 만류하는 뜻이 간절하므로 참아 홀연히 떠날 수 없사옵니다만, 그러나 산승(山僧)이 세간(世間)을 탐연(貪戀)하여 늙었으면서도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라 하였다. (결락) 천회(天會) 7년 을유(乙酉) 9월 19일 마침내 왕사(王師)의 직인과 아울러 상계장(上啓狀)을 봉(封)하여 왕조(王朝)에 반납하고, 몰래 경암사(瓊嵒寺)를 출발하여 광주(廣州)에 이르렀을 때, 인종(仁宗)이 소식을 듣고 내신(內臣)인 유필(庾弼)을 보내어 왕의 간곡한 정성을 담은 친서를 전달하였다. 또 좌우가(左右街)의 승록(僧錄)에 명하여 국사께서 지나가는 주(州)와 군(郡)에 지시하여 혜소국사(慧照國師) 께서 하산(下山)할 때의 예(例)에 준하여 영송(迎送)토록 하고, 다시 왕사(王師)의 직인을 돌려 보냈다. 10월 19일 운문사(雲門寺)로 들어갔다. (결락) 한보리(漢菩提). 몸을 다투어 찬탄하며, 사방(四方)의 학자들이 마치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국사께서는 그 도제(徒弟)들을 훈도하여 각각 자기(自己)를 밝히게 하는 것으로 급무(急務)를 삼아 겸추(鉗鎚)로 단련(鍛鍊)하였으니, 가히 묘법(妙法)을 밀전(密傳)하였다고 이를 만 하였다.
조사선(祖師禪)을 참구하는 선열(禪悅) 외에도 힘껏 포시(布施)를 행하여 일체(一切) 물질(物質)에 있어서는 조금도 인색함이 없었으니, 스님의 자비는 천성(天性)에 깊이 뿌리박힌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스님께서 비록 만리(萬里)의 밖에 있으나, 임금께서 항상 공경하는 마음이 한결 같았다. (결락) 특히 자주 위로와 문안을 더하였으며, 겸하여 다향(茶香)과 약제와 기타 도용(道用)에 필요한 물건을 보내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그 융숭한 대우는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운문사 산문(山門)의 융성함이 근고이래(近古已來)로 이 같은 적이 없었다. 황통(皇統) 2년 임술(壬戌) 2월 8일 산불이 크게 일어났는데, 대중이 총동원하여 진화작업(鎭火作業)에 나섰으나 불길을 잡지 못하였다. 스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산을 향하여 축원(祝願)하였더니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을 끄게 되었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결락)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4년 갑자(甲子) 10월 21일에 발병(發病)하여 스님께서 친히 진맥하고 시의(侍醫)에게 이르기를, “삼부(三部)의 맥(脈)이 끊어졌으니, 화기(化期)가 다가왔다” 고 했다. 의사도 역시 그렇다고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께서는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가부좌(跏趺坐)로 단정히 앉아 향을 사루고 축원한 후 제자(弟子)들에게 훈교(訓敎)하되, “너희들은 도력(道力)을 기르는데 전력할 것이고 명리(名利)를 탐구(貪求)하지 말라” 하시고, (결락) “진성(眞性)은 본래 원명(圓明)하여 확연(廓然)히 시방(十方)에 두루하며, 시방(十方)이 혼일(渾一)한 동체(同體)이고, 출몰(出沒)이 본시 동광(同光)이라” 는 임종게(臨終偈)를 설하자마자, 거의 입적상태(入寂狀態)에 있었다. 이때 문인(門人)들이 서로 말하기를 “오늘은 중일(重日)이므로, 세속(世俗)에서는 크게 꺼리는 날이니, 만약 오늘 입적(入寂)하시면 어찌하나” 하고 중론(衆論)이 분분하였다. 국사께서 선적중(禪寂中)에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하니, 문인(門人)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국사께서 이르되 “산문(山門)에서 수도하는 분상(分上)에는 세(歲)도 없고 일(日)도 없거늘, (결락) 어찌 기일(忌日)이 따로 있겠는가? 오늘이 만약 기일(忌日)이라면 내가『섬자경(睒子經)』 중에 설(說)한 일체묘보살(一切妙菩薩)의 본생담(本生談)에 의하여 연명(延命)을 제석천왕(帝釋天王)에게 청하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섬자경(睒子經)』의 미륵상품(彌勒相品)을 염송(念誦)하다가 수각(數刻) 동안을 지난 후 문인(門人)에 이르기를 “내가 미륵품(彌勒品)을 염송(念誦)하되, 한 글자도 착오(錯誤)함이 없으니, 드디어 맥박과 호흡(呼吸)이 평정(平正)하여 오늘 죽지 아니하고, 가히 너희들의 청(請)에 부합토록 하리라” 하고, 식사하는 것이나 기거(起居)함이 평일(平日)과 같았다. 11월 15일에 다시 병세를 보여 사세장(辭世章)과 왕에게 올리는 유언장(遺言狀)을 지었는데, 그 내용(內容)이 측은(惻隱)하였다.
그 후 12월 9일 밤 오경(五更)에 삭발 목욕하고 법복(法服)을 갈아 입은 다음, “오음운일편(五陰雲一片) 산멸진무여(散滅盡無餘) 유유고균월(唯有孤輪月) 청광일대허(淸光溢大虛)” 라는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고, 가부좌(跏趺坐)로 차수(叉手)하고 단정히 앉아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문인(門人)이 굻어앉아 모시고 있다가, 포시(哺時)에 이르러 흔들어 보니 이미 천화(遷化)하였다. 그러나 지체(肢體)가 생시(生時)와 같으며, 얼굴빛은 백옥(白玉)과 같았다. (결락) 인근 주군(州郡)으로부터 참관하러 오는 사람이 마치 담장과 같이 둘러 싸였다. 오호라! 국사의 생사관(生死觀)은 고호(賈胡)들과 같으며, 또한 전리(傳吏)가 머물고자 하면 머물고, 떠나려 하면 곧 떠나는 것과 같아서 종용(從容)하고 자재(自在)함이 이와 같으니, 비록 방온(龐蘊)거사(居士)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문인(門人)이 유언장(遺言狀)과 국사의 직인인 인보(印寶) 및 천화사장(遷化事狀)을 가지고 역마(驛馬)를 타고 임금께 주달(奏達)하였다. 임금께서 부고를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며 경탄(敬歎)하시고, 3일간 조회를 파하고 내신(內臣)인 김경원(金景元)과 일관(日官)인 (결락)을 보내어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토록 하였다. 다음해 1월 24일 사신을 보내 예(禮)를 갖추어 국사(國師)로 책봉하는 한편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또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27일 그 문도들이 좌신(坐身)을 들것으로 매고, 청도군 지곡사(池谷寺)의 동쪽 산기슭에서 도유(闍維)하고, 30일 유골(遺骨)을 수습하니 머리에는 중골(重骨)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전삭(栓索)과 구련(勾連)으로 되어 오색(五色)이 선명(鮮明)하였다. 2월 (결락) 자인현(慈仁縣) 판악산(板岳山)남쪽으로 (결락) 천신(遷神)하였다. 최초 입멸(入滅)로부터 도유(闍維)에 이르기까지 계(計) 47일동안 앉은 상태로 조금도 기울지 아니하였으며, 오물(汚物)의 누설(漏洩)도 없었다. 열세(閱世)는 93이요, 좌하(坐夏)는 82세였다. 문인(門人)이 국사의 행적(行跡)을 기록(記錄)하여 비(碑)를 세우고자 하는 일을 임금에게 주청(奏請)하였다. 그리하여 인왕(仁王)께서 신(臣) 언이(彦頤)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으나, 신(臣)은 도(道)를 섭(涉)함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허락을 얻지 못하여 행적(行跡)의 대략(大略)에 의거하여 분향하고 계수(稽首)한 다음, 억지로 서술(序述)하고 송구(頌句)로 명(銘)하여 이르되,
이심전심(以心傳心) 전해받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은
확연(廓然)하고 적요(寂寥)하여 변제(邊際)가 없다
두두물물(頭頭物物) 상섭(相攝)하고 상입(相入)하니
전후제(前後際)를 초월하여 선후(先後)가 없네. ①
이와 같은 격외조령(格外祖令) 파비(巴鼻)가 없어
말로써나 문자(文字)로써 다룰 수 없다.
삼삼조사(三三祖師) 밀부(密付)하여 전해오면서
한 사람이 한 사람에 전승(傳承)하였다. ②
계계승승(繼繼承承) 이은 법통(法統) 접근(接近)을 못해
달마대사(達磨大師) 숭산(崇山)에서 9년(九年)을 면벽(面壁)
설중(雪中)에서 신(信)을 보여 득법(得法)하였고
법(法)을 이은 혜가대사(慧可大師) 한 팔뿐일세 ③
전법제자(傳法弟子) 선택함은 난중난(難中難)이니
불심등(佛心燈)을 전해줌이 이와 같도다
행자(行者)일 때 법(法)을 받은 노행자(盧行者)에서
오종가풍(五宗家風) 그 분파(分派)는 백천(百川)과 같네 ④
위산대원(潙山大圓) 원상(圓相)그린그 가풍(家風)이여!
방원장단(方圓長短) 그 모양은 최초구(最初句)이고
임제대사(臨濟大師) 제창(提唱)하신 일구법중(一句法中)에
삼현(三玄)삼구(三句) 그 종풍(宗風)은 일즉삼(一卽三)일세. ⑤
동산양개(洞山良价) 오위편정(五位偏正)천양(闡揚)했으니
정중편(正中偏)과 편중정(偏中正)은 군신합(君臣合)이요
운문문언(雲門文偃) 주장(柱杖)으로 거양(擧揚)했으며
신통묘용(神通妙用) 자재하게 현전(現前)하도다. ⑥
법안문익(法眼文益) 4기(四機)로써제접(提接)했으니
3계중(三界中)에 어디서나 동일(同一)하도다.
가가(家家)마다 가풍(家風)으론 비록 다르나
귀결(歸結)하는 구경지(究竟地)는 묘원(妙圓)한 것을 ⑦
위대하신 운문사(雲門寺)의 원응국사(圓應國師)여!
동국(東國)에서 출생하여 선법(禪法)을 중흥(中興)
산(山)을 넘고 물을 건너 총림(叢林)을 찾아
용맹정진 참구(參究)하여 본색(本色)을 보다 ⑧
혜능이후(慧能以後) 5가(五家)칠종(七宗) 모든 종지(宗旨)를
원응국사 흉중(胸中)에는 총지(總持)했도다.
기민(機敏)하온 활구중(活句中)에 기어(奇語)가 있어
전(箭)과 봉(鋒)이 상적(相敵)하는 살활일(殺活釰)이여! ⑨
원응국사 출생하기 5천년 전에
달마대사(達磨大師) 그 법등(法燈)이 꺼지려 할 때
꺼진 등불 다시 밝혀 중흥(中興)한 것은
전적(全的)으로 원응국사(圓應國師) 공덕이라네! ⑩
(결락) (결락) (결락)
죽을 듯이 배고파도 절식(節食)하였다.
궤범(軌範)으로 수행(修行)하여 고결(高潔)하시고
자나깨나 중생(衆生)위해 모범(模範)이 되다.
일절재물(一切財物) 보시하여 도와주시고
무소유(無所有)를 가풍(家風)으로 무애(無礙)하시며
실상반야(實相般若) 그 속에서 삼매(三昩)를 얻다.
인간질병(人間疾病) 차별없이 구제하시고
찾아오는 중생에게 법열(法悅)을 주다.
예종왕(睿宗王)과 인종조(仁宗朝)인 양대(兩代)에 걸쳐
왕사(王師)되신 높은 덕(德)은 비길 데 없네.
가물 때나 장마질 때 기도하시면
비 내리고 장마 그침 원(願)대로 되며
산중(山中)에서 마치려고 윤허(允許)를 빌어
남(南)에 있는 운문사(雲門寺)로 가고자 했다.
4대색신(四大色身) 포류(蒲柳)처럼 노쇠했지만
정신(精神)만은 총명하여 변하지 않다.
부유(浮游)같은 인간생명(人間生命) 유한(有限)이어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서로서로 흩어지도다.
선정인(禪定印)에 단좌(端坐)하여 입적(入寂)하시니
얼굴빛이 백옥(白玉)같아 평소(平素)와 같네!
문인(門人)들이 천화사(遷化事)로 상주(上奏)하온데
임금께서 부음(訃音)듣고 상비(傷悲)하시다.
원응(圓應)이란 시호로써 추증하시고
애절(哀切)하신 조사(弔辭)로써 정(情)을 펴시다.
영원토록 그 위업(偉業)을 전(傳)하려 하사
미신(微臣)에게 명(命)하시어 찬명(撰銘)케 하다.
고매하고 탁월하신 유업방촉(遺業芳躅)은
천만세(千萬歲)가 흘러가도 변치 않으리!
<poem>
왕사(王師)인 단속사(斷俗寺) 주지(住持) 우가승록(右街僧錄) 석탄연(釋坦然)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음기(陰記)
운문사(雲門寺) 원응국사(圓應國師) 비음(碑陰)에 문도(門徒)의 성명(姓名)을 갖추어 기록한다.
비직(批職)을 받은 스님은 24명이니 아래와 같다.
대선사(大禪師)가 2명이니
대선사(大禪師) 익현(翼賢)·대선사(大禪師) 중립(中立)
선사(禪師)가 13명이니
선사(禪師) 정린(正鄰)·선사(禪師) 경웅(景雄)·선사(禪師) 경옥(景玉)·선사(禪師) 각선(覺先)·선사(禪師) 사순(思純)·선사(禪師) 연미(淵微)·선사(禪師) 회묵(懷黙)·선사(禪師) 득숭(得崇)·선사(禪師) 묘혜(妙慧)·선사(禪師) 가관(可觀)·선사(禪師) 계소(戒韶) ·선사(禪師) 각유(覺猶) ·선사(禪師) 연의(淵懿)
삼중대사(三重大師)가 9명이니
삼중대사(三重大師) 덕선(德先) ·삼중대사(三重大師) 양정(良定) ·삼중대사(三重大師) 계징(戒澄) ·삼중대사(三重大師) 각주(覺周) ·삼중대사(三重大師) 경묘(景妙) ·삼중대사(三重大師) 인겸(仁兼) ·삼중대사(三重大師) 진해(眞海) ·삼중대사(三重大師) 석영(碩瑩) ·삼중대사(三重大師) 회원(懷遠)
입내상수좌가도승록(入內上守左街都僧錄) 대사(大師) 혜풍(慧豊)
입내상수우가도승록(入內上守右街都僧錄) 대사(大師) 덕림(德林)
법리주지(法理住持)인 중대사(重大師)가 57명이니
<poem>
중대사(重大師) 선랑(禪朗)
중대사(重大師) 유조(遺照)
중대사(重大師) 종오(宗悟)
중대사(重大師) 도림(道林)
중대사(重大師) 혜란(慧蘭)
중대사(重大師) 계천(戒遷)
중대사(重大師) 요본(了本)
중대사(重大師) 자초(子超)
중대사(重大師) 이능(理能)
중대사(重大師) 행조(幸照)
중대사(重大師) 관주(冠周)
중대사(重大師) 정본(正本)
중대사(重大師) 담언(曇彦)
중대사(重大師) 인지(仁智)
중대사(重大師) 작련(爵連)
중대사(重大師) 인응(仁應)
중대사(重大師) 기남(寄南)
중대사(重大師) 지성(至誠)
중대사(重大師) 처화(處和)
중대사(重大師) 자순(資順)
중대사(重大師) 적순(迪純)
중대사(重大師) 도안(道安)
중대사(重大師) 지예(之倪)
중대사(重大師) 지선(至禪)
중대사(重大師) 남수(南秀)
중대사(重大師) 종인(宗印)
중대사(重大師) 문원(文遠)
중대사(重大師) 중인(仲仁)
중대사(重大師) 희원(希遠)
중대사(重大師) 조휘(祖煇)
중대사(重大師) 지몽(知夢)
중대사(重大師) 구령(九齡)
중대사(重大師) 정남(挺南)
중대사(重大師) 가원(可元)
중대사(重大師) 영연(靈淵)
중대사(重大師) 각지(覺之)
중대사(重大師) 담유(曇裕)
중대사(重大師) 계주(戒住)
중대사(重大師) 선회(禪懷)
중대사(重大師) 징정(澄靖)
중대사(重大師) 천소(天素)
중대사(重大師) 도정(道精)
중대사(重大師) 품원(品圓)
중대사(重大師) 종습(宗襲)
중대사(重大師) 중순(中淳)
중대사(重大師) 유격(惟格)
중대사(重大師) 도휘(道暉)
중대사(重大師) 도언(道彦)
중대사(重大師) 조윤(祖允)
중대사(重大師) 사성(師誠)
중대사(重大師) 현소(玄素)
중대사(重大師) 혜남(慧南)
중대사(重大師) 이담(理曇)
중대사(重大師) 선밀(禪密)
중대사(重大師) 종이(宗彛)
중대사(重大師) 신초(信初)
중대사(重大師) 자유(子儒)
입내상수 우가 도승록(入內上守 右街 都僧錄) 대사(大師) 영신(英信)
입내상수 좌가 도승록(入內上守 左街 都僧錄) 대사(大師) 웅천(雄闡)
법리명공(法理名公)이 29명이니
관선(冠宣)·관신(觀神)·관석(觀碩)·포이(布夷)·유린(有隣)·현이(玄頤)·선공(善空)·홍청(弘淸)·혜식(慧軾)·자운(子雲)·지웅(智雄)·적령(淑靈)·자회(子懷)·처충(處冲)·회성(懷誠)·혜륜(惠輪)·온소(溫素)·유엄(惟儼)·수견(守竪)·현선(賢善)·경성(景誠)·종영(宗永)·지백(之白)·자연(子淵)·혜유(惠猷)·상추(尙樞)·▨․·진정(眞靖)·정지(正知) 가계(加階)를 첨가(添加)받은 문도(門徒)가 29명이니
선진(善珎)·신명(信明)·적준(迪俊)·여엄(如嚴)·성계(聲溪)·연감(緣鑒)·자남(資南)·선준(禪俊)·선우(禪祐)·▨모(▨慕)·▨▨·․▨·▨․·▨▨·승▨(承▨)·필원(弼源) ·정심(正深) ·현도(賢道) ·혜구(慧球) ·▨원(▨源) ·운효(雲曉) ·안석(安碩) ·지선(至宣) ·사미(思美) ·자선(子禪) ·혜교(慧交) ·계능(戒能) ·이복(利福) ·득총(得聰)
입내상수 좌가도승록(入內上守 左街都僧錄) 대사(大師) 행련(幸連)
묘각사(妙覺寺) 도감(都監) 우가승록 동정(右街僧錄 同正) 혜각(惠覺)
가계(加階)한 명공(名公)이 50명이니
경춘(景春) ·성고(性高) ·행경(幸景) ·자존(子存) ·홍준(洪俊) ·영탁(英卓) ·품서(品諝) ·연여(演如) ·탄룡(誕龍) ·석자(釋資) ·연기(硏機) ·묘중(妙中) ·도존(道存) ·회보(懷寶) ·정륜(挺倫) ·준소(俊玿) ·▨운(▨雲)·▨▨·언▨(彦▨)·자휴(子休)·해수(海修)·선원(善元)·연조(緣照)·회실(懷實)·상거(尙渠)·원조(圓照)·묘기(妙機)·상명(尙明)·천원(闡源)·필현(弼賢)·의순(義淳)·지열(智悅)·의총(義聰)·회이(懷已)·각정(覺靖)·준영(俊英)·▨선(․禪)·․▨·교원(皎元)·묘준(妙俊)·종언(宗彦)·각원(覺元)·관혜(觀慧)·관해(觀海)·언구(彦求)·혜상(惠常) 재담(齊淡) 종연(宗淵) 지청(智淸) 담순(曇淳)
참학(參學)한 문도(門徒)가 40명이니
존미(存美)·혜심(慧深)·의규(義規)·자순(子純)·제묵(齊黙)·사백(師白)·승호(僧浩)·경엄(敬嚴)·유돈(唯伅)·지휘(智煇)·성순(誠純)·동진(洞眞)·담량(曇亮)·준명(俊明)·정단(正端)·요초(了初)·혁단(赫端)·도연(道緣)·연승(緣勝)·계여(戒如)·지산(智山)·응명(應明)·적청(迪淸)·선행(善行)·법기(法己)·선연(善淵)·선현(善玄)·종신(宗信)·도현(道賢)·용원(用元)·정엄(正嚴)·숙청(淑淸)·정전(定全)·유인(有因)·담윤(曇允)·현정(玄挺)·우린(祐隣)·신원(信元)·정순(挺淳)·유청(儒淸) 승록승사(僧錄僧史) 진경(眞卿)
종순(宗純)이 이 절에 주석(住錫)케 되었으므로 와서 토선(土善)들을 보았다.
판독문
- 출처: 허흥식, 『한국금석전문』 중세상, 아세아문화사, 1984.[2]
高麗國雲門寺圓應國師之碑 (題額)」
- 銀青光錄大夫政堂文學戶部尙書判刑部事賜紫金▨▨▨▨▨▨▨▨▨述甞聞正法眼藏諸佛之所秘惜也十方虛空山河大地情與無情色與無色咸是藏中妙明之物如來三身於此現焉菩薩萬行於此▨▨▨▨▨▨▨▨所能及也唯滌除玄覽不落空有身槁木之枝而心」
若死灰爲足以解乎此世之昧者方且火馳與接爲搆用諸妄想爲自心體終身役役茫然不知所歸使一段靈性化爲幽暗以至輪▨▨▨▨▨▨豈不惑哉如來愍其然四十九年說三乘十二▨敎隨」
根利鈍而導引之然所謂正法眼藏未之甞言及化緣將盡恐天下後世不得其傳於是擧花示衆唯大迦葉默然微笑祖相傳以▨▨▨▨▨▨多羅二十七世而離而爲達磨至忍五世而益離而」
爲秀爲能南北分矣然秀後世無述焉自能而下支派浸衍浩浩如百川要其歸傳佛正宗一也海東浮圖氏聞其風而悅者無慮▨▨▨▨▨▨氷解凍釋知見高明知出於無知見出於無見而契于祖師」
心印者吾於圓應國師見之矣師俗姓李氏諱學一字逢渠西原侶安人也父應瞻不仕母李氏一夜夢龍入屋因而有娠及生有▨▨▨▨▨發久之不散其在孾孩一日未甞再乳年甫八歲斷葷血十一」
依眞藏師落髪十三受足戒後謁香水惠含師一日惠含擧僧問長慶如何是學人出身路慶之是你出身路師於此有省旣而▨▨▨▨洞明禪旨又閑經律論無所不究尤長於大般若得三昧力凡人」
間疾病無問貴賤一切救之動輒有驗宗徒推仰如泰山北斗 我宣王二年宋神宗元豊七年甲子赴廣明選佛場優中▨▨▨▨國師西游於宋傳華嚴義兼學天台敎觀以哲宗元祐元年丙寅回」
尊崇智者別立宗家于時藂林衲子傾屬台宗者十六七師哀祖道凋落介然孤立以身任之大覺使人頻諭而卒不受命乃▨▨▨▨山横峯寺有終焉之計王弟扶餘公深於禪者也與師素相善盡禮迎」
之師赴京師 我肅王四年宋紹聖五年戊寅大覺於弘圓寺置圓覺會以師爲副講師辭曰禪講交濫不敢當之但叅▨▨▨講而已有王子年九歲卽今所謂圓明國師也忽一日暴死暖氣都絶一」
會人愴惶顚倒不知所以救之之方大覺請師救之師密念大般若良久王子乃甦於是大覺特加敬重 上飽聞師▨▨▨住法住寺 我睿王元年宋崇寧四年加三重大師住迦智寺不數月」
移住龜山寺宋道君大觀二年戊子加禪師政和三年癸巳住內帝釋院四年甲午加大禪師七年丁酉住安和寺宣和四年▨▨ 上因疾召師於內殿欲拜爲王師師牢讓不受侍中金仁存等謂師」
曰 上欲以不臣禮事師久矣師之不受何也師不得已受命於是 上便行師拜然未及册禮而登遐四月▨▨ 仁王卽立追述先志七月七日遣中使以書致意越明日如之師狀辭」
免至于再三十二日備禮儀册爲王師十六日 上幸明慶殿伸弟子之禮百官拜賀五年癸卯春夏大旱 ▨▨▨以▨▨▨師於玉燭亭與大禪師得善等擧揚禪旨翌日大雨田野告足後有」
水旱災異祈禳無不效應是年主盟選席時學者盛談二種自己師曰自己一而巳安有二哉從今已往宜禁止之▨▨▨▨▨久致疑於其間者衆及惠洪僧寶傳至判古已師三失以分自己爲一失學者見」
此然後斷惑大金天會四年丙午乞歸老雲門 上不允謂安南瓊嵒距京師不遠許師兼住自便往來六年▨▨▨▨▨歸瓊嵒剳子再乞歸老其意堅甚 上以書留之曰朕間遭內變或爽冲」
倪仗師道力獲㡳安寧今欲弃寡人而歸將何賴焉師曰 上意勤懇勢不可忽去然山僧貪戀世間老而▨▨▨▨▨七年乙酉九月十九日封王師印幷狀納 王朝發瓊嵒行至廣州」
上聞之遣内臣庾弼傳宣懇欵又命左右街令所過州郡依慧照國師下山例迎送仍還印寶十月十九日入雲門▨▨▨▨漢菩提現身讃歎四方學者輻湊雲臻師訓其徒以明自己爲急鍛鍊鉗鎚可謂密」
妙其禪悅之外務行布施於一切物無所悋惜盖慈悲根于天性故也故師雖在萬里外 上意敬之▨▨▨▨▨▨特加勞問兼送茶香藥劑段物無歲無之優渥不可殫記山門之盛近古已來未之」
有也皇統二年壬戌二月八日山火大作衆撲滅不勝師不起于座向山祝之雨降而火滅後亦如之非▨▨▨▨▨若如是乎四年甲子十月二十一日示疾二十八日師親診脈謂侍醫曰三部脈絶化期」
至矣毉亦以爲然師盥漱更衣跏趺端坐焚香祝願畢敎門弟子汝等專資道力不可貪求名利仍說▨▨▨▨▨▨▨然遍十方十方渾一體出沒本同光言訖幾於入寂時門人相與言曰今日是重日世」
俗所大忌也若化▨▨何衆論宣騰師從寂中聞之曰是何聲也門人以實對師曰山門無歲無日▨忌▨▨▨▨若以爲忌吾依腅子經中▨請命帝釋於是密念彌勒相品移數刻謂門人曰吾念彌勒」
品無一字錯遂得脈息平正今日不死可副汝等請飮食起居如平日至十一月十五日復示疾仍作辭▨▨▨▨王遺狀語甚惻▨▨▨二月九日夜五鼓剃頭沐浴整法服說遺偈五陰雲一片散滅盡」
無餘唯有孤輪月淸光溢大虛跏趺乂手端坐不動門人跪侍至哺時撼之已化矣肢體如平生顔如白玉▨▨▨郡觀者如堵牆嗚呼死生之際如賈胡傳吏留則留去則去從容自在若此雖龐蘊不能及」
也門人賷遺狀印寶及遷化事狀乘驛聞奏 上聞訃音至震悼敬歎輟朝三日遣内臣金景元日▨▨▨▨護葬事越明年正月二十四日▨使備禮冊爲國師贈諡圓應又遣使致祭二十七日其徒」
以肩輿舁坐身闍維于淸道郡池谷寺之東麓三十日収骨頭有重骨餘皆栓索勾連鮮明有五色▨二月▨▨▨▨于慈仁縣板岳山之南自初入滅至闍維計四十▨日坐身不仄而無漏閱世九十三坐」
八十二夏門人狀其師之行奏以立碑事 仁王命臣彥頤撰臣涉道未優辭不獲命據行事之大略▨▨▨稽首强序而銘之曰」
正法眼藏 寥廓無邊 頭攝入 孰後孰先 如是之法 言不能詮 佛祖密付 一人而傳 ▨▨▨▨ 面壁九年 得門弟子 一臂唯全 授道▨ 其若此焉 老廬而降 分派如川」
大潙畫相 長短方員 臨濟一句 須三玄 洞山五位 或正或偏 雲門拄杖 妙用現前 ▨▨▨▨ 三界皆然 方便雖異 同趣妙圓 偉我大士 出于東國 歷訪叢林 飽叅本色」
五家之學 了然胷臆 機敏語奇 箭鋒相直 五千載前 祖燈將匿 匿而再明 維師之德 ▨▨▨▨ 飢不豊食 軌行峻潔 爲物作則 好行布施 金▨無嗇 於大般若 得三昧力」
救人疾患 應時而息 睿仁兩代 爲王之師 善禳水旱 雨暘如期 乞骸勇退 歸老南涯」
▨▨▨▨ 聦明不衰 浮生有數 四大相離 跏趺而化 貌若生時 訃音至闕 王用傷悲」
贈諡圓應申以哀辭將傳不朽命臣爲碑卓▨芳躅百世可知王師斷俗寺住持▨▨▨▨▨▨▨奉 宣書」
陰記
雲門寺圓應國師碑陰門徒姓名錄
批職員二十四」
大禪師二員 大禪師翼賢 大禪師中立
禪師十三員」
禪師正鄰 禪師景雄 禪師景玉 禪師覺先 禪師思純 禪師淵微 禪師懷默 禪師得崇 禪師妙慧 禪師可觀 禪師戒韶 禪師覺猶 禪師淵懿」
三重大師九員」
三重大師德先 三重大師良定 三重大師戒澄 三重大師覺周 三重大師景妙 三重大師仁兼 三重大師眞海 三重大師碩瑩 三重大師懷遠」
法理住持重大師五十七員」
禪朗 遺照 宗悟 道林 慧蘭 戒遷 了本 子超 理能 幸照 冠周 正本 曇彥 仁智 連 仁應 寄南 至誠 處和 資順 迪純 道安 之倪 至禪 南秀 宗印 文遠 仲仁 希遠 祖煇 知夢 九齡
挺南 可元 靈淵 覺之 曇裕 戒住 禪懷 澄靖 天素 道精 品圓 宗襲 中淳 惟格 道暉 道彥 祖允 師誠 玄素 慧南 理曇 禪密 宗彜 信初 子儒」
法理名公二十九員」
冠宣 觀禪 觀碩 布夷 有隣 玄頤 善空 汝淸 慧軾 子雲 智雄 淑靈 子懷 處冲 懷誠 惠輪 溫素 惟儼 守竪 賢善 景誠 宗永 之白 子淵 惠猶 尙樞 ▨▨ 眞靖 正知」
加階二十九員」
善珎 信明 迪俊 如嚴 英淡 緣鑒 資南 禪俊 禪祐 ▨慕 ▨▨ ▨▨ ▨▨ ▨▨ 承▨ 弼源 正深 賢道 慧球 ▨源 雲曉 安碩 至宣 思美 子禪 慧交 戒能 利福 得聰」
加階石公五十員」
景春 性高 幸景 子存 洪俊 英卓 品諝 演如 誕龍 釋資 硏機 妙中 道存 懷寶 挺倫 俊玿 ▨雲 ▨▨ 彥▨ 子休 海修 善元 緣照 懷實 尙渠 圓照 妙機 尙明 闡源 弼賢 義淳 智
悅 義聰 懷巳 覺靖 俊英 ▨禪 ▨▨ 皎元 妙俊 宗彥 覺元 觀慧 觀海 彥求 惠常 齊淡 宗淵 智淸 雲淳
參學四十名職」
存美 慧深 義規 子純 齊默 師白 僧浩 敬嚴 唯伅 智煇 誠純 洞眞 曇亮 俊明 正端 了初 赫端 道綠 綠勝 戒如 智山 應明 迪淸 善行 法己 善淵 善玄 宗信 道賢 用元 正嚴 淑
淸 定全 有因 曇允 玄挺 祐隣 信元 挺淳 儒淸」
入內上守左街都僧錄大師慧豊 入內上守右街僧錄大師德林」
入內上守左街都僧錄大師英信 入內上守右街都僧錄大師雄闡」
入內上守左街都僧錄大師素連 妙覺寺都監右街僧錄同正惠覺」
僧錄僧史眞卿」
宗純得住此寺來見土善(側面)」
주석
- ↑ 온라인 참조: "운문사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온라인 참조: "운문사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