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의 대표적 문인들과 한글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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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erience Korea: Ten Poems of the Joseon Dynasty 이황 - 정철(201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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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詩歌), 감성을 향유하다[1]

문학에서 시가는 노래로 불리고 소설은 이야기로 전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문자를 가지지 못하면 문학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가 변하거나 소멸한다. 고려시대에 나타난 시조와 가사는 개인의 서정을 노래하는 우리 고유의 양식으로, 입으로 불리던 노래였다가 한글이라는 고유의 문자를 통해 참다운 문학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소리글자인 한글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체계적인 문자였기에 우리말에 익숙한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익혀 자유롭게 적을 수 있었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고, 문자는 그 언어의 구조에 좌우된다. 한문 문장 구조는 익숙한 지식인조차 창작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우리의 시가문학도 우리말과 한자의 이중적인 언어생활로 인해 제약이 심각하였다. 그러나 한글의 창제로 시조와 가사는 비로소 문자로 정착되어 우리말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회고, 절의 또는 자연과 삶을 노래하던 조선 전기 사대부 중심의 시가는 한글에 익숙해진 일반 백성으로 작가층이 확대되면서, 일상의 다양한 소재를 통하여 해학과 풍자와 같은 기층민들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나타났다. 아울러 형식상의 변화도 일어나 사설시조나 장편가사 등이 나타나 전통적인 미학을 변혁하여 서정성과 서사성을 동시에 포괄하는 양식으로 변모하였다. 시조와 가사는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기생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향유했다는 점에서 국민문학이라고 한다. 이처럼 시조와 가사가 국민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라는 최고의 문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황과 이이 그리고 정철과 윤선도

조선시대 선조 연간에는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과 같은 어둡고 힘든 사건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학문이나 문화적 차원에서 다른 시기에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인물들 또한 많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당대의 문화적 융성을 강조하고자 흔히 '목릉성세(穆陵盛世)'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황, 이이, 정철, 윤선도 4인은 이 시기에 배출된 뛰어난 학자 및 문인들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위치에 올라선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이황과 이이는...........

정철과 윤선도는.........

네 인물은 모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글 시가로 표현한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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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구곡가계로 보는 이황과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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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EBS - 역사e뉴스)

무이산과 구곡계 (Sticker in Xiamen / Hana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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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는 황해도 해주시 고산면 석담리에 있는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그린 그림이다. 고산구곡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경영했던 곳인데, 이이는 36세인 1571년(선조4) 고산구곡을 찾아 각 곡(曲)의 이름을 짓고 이곳에서 은거의 뜻을 밝혔다. 고산구곡도는 이이의 후학들에게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널리 유행하였다. 이이의 서현손(庶玄孫) 중 누군가가 처음 그린 <고산구곡도>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의도에 따라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주도하여 1688년(숙종14)경에 완성한 그림으로 보인다. 그림의 전체 구성은 왼편 제1곡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제9곡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된다. 각 곡에는 주요 경물의 명칭을 적어놓았고, 고산구곡의 실경과 고산구곡가의 시어(詩語)를 절충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 특징이다. 두루마리 위쪽에는 각 곡마다 3편의 시가 적혀 있다.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한글로 쓴 이이의 고산구곡가가 먼저 나오고, 이를 송시열이 한문으로 번역한 시와 김수항(金壽恒, 1629~1689) 등 9명이 쓴 무이도가(武夷棹歌) 시를 차운한 시가 순서대로 적혀 있다.[2]

율곡이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우고 「고산구곡가」를 지은 것은 주희(朱熹)가 만년에 은거하면서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와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자연을 읊은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뜬 것인데,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도산십이곡」은 이황(李滉)주희를 흠모한 나머지 도산에 은거하면서 지은 작품이며, 작품의 표현 방식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난다고 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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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가사의 두 대가, 정철과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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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 1699호-한국의 멋 누정(1988.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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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시가(詩歌), 감성을 향유하다"의 본 내용은 한글특별전 도록(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편,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 성남: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38쪽에서 발췌.
  2. 한글특별전 도록(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편,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 성남: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42쪽의 <고산구곡도> 해설문을 발췌·편집하되, 권섭의 「고산구곡도설」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산구곡도' 내용을 함께 감안하여 수정을 가하였다.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산구곡도'에서 발췌·편집(2016/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