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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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한자 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碑
승려 충담(忠湛)
찬자 고려 태조(太祖)
서자 최광윤(崔光胤) 집자(集子)


번역문

  • 출처: 이지관,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비문(原州 興法寺 眞空大師塔碑文)",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1]

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영봉산(靈鳳山) 흥법사(興法寺) 왕사(王師) 진공지탑(眞空之塔).

(결락) 신(臣) 최광윤(崔光胤)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당태종(唐太宗)이 짓고 왕희지(王羲之)가 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새기다.

대개 들으니 부처님은 미언(微言)으로 교를 세워 비로소 취령(鷲嶺)에서 말씀을 열었으며, 가섭은 묘지(妙旨)로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는 마침내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갔다. 비록 말로는 교리(敎理) 밖에 별도(別途)로 전하였다고는 하나, 그윽이 생각건대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함께 품수(禀受)하였다. 경희(慶喜)는 가섭의 제자가 되었고, 상나화수(商那和修)가 아난(阿難)의 법을 전해 받아 제3조(祖)가 되었다. 그로부터 제12조(祖)인 마명(馬鳴)에 이르러 아름다운 자취를 계승하면서 묘법(妙法)을 삼승(三乘)에 드리웠고, 제14조(祖)인 용수(龍樹)는 꽃다운 향기를 드날리면서 (결락) 보았다. 그가 주창한 법(法)은 즉상(卽相)이나 이상(離相)이며, 몸이 아니나 곧 몸인 것이다. 강급(降及)(결락) 처음으로 원각대사(圓覺大師)가 중국의 양조(梁朝) 때 들어왔고, 비로소 대홍(大弘)을 만났다. 달마는 양무제를 만난 다음, 북쪽 위(魏)나라로 가서 효명제(孝明帝)를 만났다. 그리하여 대조(大祖)인 혜가(慧可)를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계합(契合)하여 동풍(同風)을 부촉하였다. 그로부터 조법(祖法)을 상승(相承)하되 심등(心燈)을 계승하여 대대로 이어져 단절되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화(一花)가 훌현(欻現)함에 육엽(六葉)이 거듭 무성하였다. 근래 강서(江西 : 馬祖道一)로부터 해예(海裔)까지 흘러 들어왔다. 따라서 봉림가(鳳林家)의 제자요, 장경(章敬)의 증손인 우리의 진공대사(眞空大師)가 다시 선종을 천양하였다.

대사의 법휘는 충담(忠湛)이요, 속성은 김씨며, 그의 선조(先祖)는 계림(鷄林)의 관족(冠族)이고, 토군(兎郡)의 종지(宗枝)로서 분파(分派)되어 영광을 누렸으며, 상진(桑津)에 의해 별파(別派)로 갈라졌다. 원조(遠祖)는 다(多) (결락) 도잠(陶潛) (결락)이 벼슬에 얽매어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겠다 하였고, 가후(賈詡)와 같은 공을 세우기를 희망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녹위(祿位)를 귀함이겠는가. 그러므로 고반(考盤)과 같이 도(道)를 즐겼다. 일찍부터 『장자』와 『열자』 등의 서적을 전공하였고, 초야에 살면서 은사(隱士)를 불러 같이 노래를 읊으며 시정(市井)과 조정(朝廷)의 명예를 피하였다. 모어(母於) (결락) 현지자(賢之子)이니 어찌 성선(聖善)의 마음을 닦음이 없었으랴! 이러한 영기(靈寄)로운 태몽을 감득하고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를 희망하던 중 함통(咸通) 10년 1월 1일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나면서부터 남다른 특수한 모습을 가졌고, 어려서부터 농담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결락) 초인적(超人的)인 영특한 성품(性品)을 가졌으며 신비한 지혜는 따를 자가 없었다. 괴시(槐市)에서 경을 배웠고, 행원(杏園)에서 과거(科擧)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부모가 관상 보는 사람을 불러 관상을 보였더니 “감라(甘羅)가 입사(入仕)하던 나이에 이르면 이름을 떨침이 헤아리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가의(賈誼)가 박사(博士)되던 나이에 (결락)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대사는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孤兒)가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장순선사(長純禪師)가 절로 데리고 가서 상좌를 삼아 득도(得度)시켜 사미계를 받게 하였으니, 이전부터 장순(長純)은 대사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다. 대사(大師)는 장순장로(長純長老)를 따라 거처를 얻어 (결락) 속진(俗塵)을 여의고 공문(空門)에 들어가 바야흐로 승위(僧位)에 올라 부지런히 정진 수도하여 승당도오(昇堂覩奧)하므로 입실건당(入室建幢)하게 하여 전법제자를 삼았으니, 이심전심한 사자(師資)의 정이 마치 고리처럼 연결되어 돈독하였다. 후배들이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 와서 뒤에 출발하였으나,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적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으며, 각(覺)의 지파(枝派)가 계속 이어지면서 먼저 시작하여 늦게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선림(禪林)에서 지내면서 (결락) 우유(優遊)하였다. 인도에서 발상한 불교를 거듭 중흥하여 마침내 계계승승의 법맥(法脈)을 이었다. 능가(楞伽)인 선종이 재흥(再興)할 기회를 엿보면서 발원하여 오다가 용기 원년(龍紀 元年)에 무주(武州) 영신사(靈神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이어 법상종(法相宗)과 율장(律藏)을 연구하였다. (결락) 종지(宗旨)를 들어 도(道)를 토론하면서 학인(學人)들에게 이르되, “처마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도 계속 떨어지면 능히 돌을 뚫으며, 두 사람의 마음이 굳게 합쳐지면 능히 쇠도 끊을 수 있다”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불을 붙이려고 나무와 나무끼리 마찰하는 것과 같이 계속적인 노력과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은 달통(達通)을 얻게 된 그 원인은 모두 적미(積微)와 같은 작은 일도 쉬지 아니하며, 비록 규보(跬步)라도 계속 전진(前進)한 탓으로 마침내 학해(學海)의 공을 이룩하고, 길이 빛나는 (결락) 성취하였다. 석자(釋子)인 천일(天日)선사가 당시 전후 현실인 흉년과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산야(山野) 곳곳에 말라 흩어진 폭골(曝骨)과 아직 썩지 아니한 시신이 낭자한 광경을 보고 생각하되 “다른 산중(山中)들은 조용한 곳이 많으니 어찌 피난할 곳이 없겠는가. 이곳은 위험한 곳이므로 오랫동안 거주(居住)할 생각은 없었다.” (결락) 지화(之華) (결락) 자(者)와 같이 배를 타고 가서 피안(彼岸)에 도착하였다. 이 때 그 길로 곧바로 운개사(雲蓋寺)를 찾아가서 부원대사(淨圓大師)를 친견하였다. 대사(大師)는 구름 덮인 산골에 살면서 석상(石霜)의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 학인을 지도하고 있었다. 지(知) (결락) 대사가 원이(遠離) (결락) 원남(圖南)의 웅지를 품고, 분지를 발하여 구름을 덮을 수 있는 날개를 펴고 견성성불하여 광도중생(廣度衆生)하려는 서원이 날로 향상하여 불일(拂日)하는 예장나무 가지를 높이 흔들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대사가 이르되 “네가 이곳에 와서 유학(遊學)하되 마치 천우교목(遷于喬木)과 같이 다시 정진할 원력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곳인 보소(寶所)를 떠나지 아니하고 (결락) 그 후 하동(河東)으로 가서 자악선원(紫嶽禪院)에 입방하여 처음부터 성전(聖典)을 연구하고 다시 우혈(禹穴)지방을 탐방하고, 그로부터 영적(靈跡)을 답사하는 행각을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연대(燕臺)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천우(天祐) 15년 6월에 (결락) 이르러 귀국하게 되었다. (결락) 학인(學人)들이 함께 와서 친견하고 환희에 가득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손뼉을 치면서 앙모하였다. 그리하여 수월(數月) 동안 선(禪)을 논하고 수년간(數年間) 법문을 물어 왔다. 마치 미천(彌天)이 입을 벌리고 이왈(離曰)이 입술을 놀리는 것과 같아서 어로(語路)의 발단을 헤아리며, 언어(言語)의 단서를 잘 짐작하였다. 이 때 양지(兩地)에서 지난날의 자취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결락) 지광(之光). 갑병(甲兵)의 빛이 나타남을 걱정하다가 홀연히 김해를 떠나 옥경(玉京)을 향해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마치 마륵(摩勒)이 다시 퍼진 것과 같을 뿐 아니라, 또한 우담바라가 한 번 나타난 것과 같았다. 공손히 내전(內殿)으로 맞이하여 모시고 (결락) 모든 중신과 궁내인(宮內人)들이 법문을 청함에 스님은 법상에 올라앉아 상왕(象王)의 설(說)을 토(吐)하니, 거듭 경의를 표하며, 제자(弟子)의 예의를 펴고, 들은 법어(法語)를 낱낱이 기록한 다음,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결락) 청정한 정려(精廬)로 옮겨 모셨다. (결락) 어느 날 다시 단겸(丹慊)을 떠나 경기(京畿)에 도착하였으므로 왕은 별도로 옥당(玉堂)을 꾸며서 승탑(繩榻)에 오르시게 하고 대사(大師)에게 묻되, “과인(寡人)이 어려서부터 위무(威武)는 숭상하였으나, 학문에는 힘을 쓰지 아니한 탓으로 선왕(先王)의 법도를 알지 못함이니, 어찌 (결락) 존망(存亡)의 뜻을 (결락)를 분별하겠습니까?”

기쁘게 여기는 바는 명제(明帝)가 꿈을 꾸고 노력한 것과 같이 노력하지 않고도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마치 한(漢)나라 명제(明帝)인 세종(世宗)이 마등과 법란을 만남과, 또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보지공(寶誌公)스님을 만난 것도 이와 비교할 수 없다. 세세생생에 영원히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 길이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지극한 신심(信心)을 표했다. 그리하여 흥법선원(興法禪院)을 중건하고 스님을 여기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길상지(吉祥地)가 오히려 지난날의 미덕(美德)을 논하게 되니, 복을 맞이하는 명당(明堂)임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이곳을 세상을 마치려는 종신지지(終身之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선원을 크게 확장한 후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구름과 같고, 배우는 사람들이 날로 진취됨이 마치 안개와 같았다. 의구(依舊)히 유리 (결락) 어국(於國) (결락) 모두가 불법 중흥주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직접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느 절에 가도 거절되고 더불어 말조차 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룻밤의 유숙도 허락받지 아니 하였으니, 어찌 대사(大師)가 평소에 이러한 편벽된 생각이 있었겠는가. 덕의 부유(富有)함은 (결락) 좌품(座品)의 (결락) 과 달랐다. 천복(天福) 5년 7월 18일 이른 아침, 문인들에게 이르되 “만법(萬法)은 모두 공(空)한 것이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나려하니 너희들은 일심(一心)을 근본 삼아 부지런히 정진하라”하고, 적연(寂然)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얼굴빛은 생전(生前)과 다름이 없었다. 세속 나이는 72세요, 승랍은 (결락) 이었다. 땅은 진동하고 산은 무너지며, 구름은 수심에 잠기고 해는 처참하였다. (결락) 그리하여 산곡(山谷)에는 애도와 슬픔이 가득하였고, 사부대중(四部大衆)과 천인(天人)들은 모두 절학(絶學)의 슬픔을 더하였으니, 어찌 뼈에 사무치게 애통하지 아니하랴! 제방(諸方)의 사서(士庶)들은 모두 스님의 열반에 대해 울면서 통곡하였다. 따라서 과인(寡人)도 갑자기 열반 소식을 듣고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간절히 스님의 크신 덕을 추모하여 마지못했다. 특히 종림(宗林)의 선백(禪伯)이고, 말세(末世)의 고황(古皇)으로 (결락) 긴 수명을 누리지 못하시고 뭇 중생의 우러름을 어겼도다. 지금 비록 스님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 진실인 법체(法體)는 길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먼저 물이 고이니, 고기가 찾아옴을 기꺼워했고, 뒤에는 숲이 없어지니 새가 날아가는 것을 슬퍼하도다. 바라는 바는 조속히 명체(明禮)를 갖추어야 할 때가 다가왔다 하고, 시호를 진공대사(眞空大師), 탑호를 (결락) 지탑(之塔)이라고 추증하였다.

대사(大師)는 설산(雪山)에서 성도하고, 연동(煙洞)에서 마음을 증득하여 18대(代)의 조종(祖宗)을 전하였고, 3천년의 선교(禪敎)를 통괄하였으니, 말세의 중생을 크게 교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광범하게 교화한 공적을 열거한다면 비록 황여(黃輿 : 地球)라고는 하나, (결락) 모든 향기는 사라지고, 문득 호접(胡蝶)의 마음을 끌어 일으키니, 수(水) (결락) 망기(忘機) (결락) 생전(生前)에 스님과 과인(寡人)은 마치 압구(狎鷗)처럼 친했던 감회를 일으키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화(敎化)와 도덕이 무한(無限)함을 나타내고자 하니, 참으로 신독(身毒)의 풍속을 드날리고, 축건(竺乾)의 법을 부연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문도 제자 5백여 명이 (결락) 신지속(身之贖). 높고 푸른 산이 깊은 골짜기로 변하고, 넓은 발해 바다가 (결락) 전답(田畓)으로 변할까 염려되어 나에게 진정(陳情)하여 비석을 세우려고 비문(碑文)을 주청하였다. 이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마침내 나는 윤허(允許)를 받았으니, 바라는 바는 스님의 무위덕화(無爲德化)를 나타내어 마치 물과 구름처럼 영원(永遠)히 썩지 않게 하려고 금석(金石)에 새기는 것이다. 애통한 마음으로 가능한 데로 제구(虀臼)를 지어 문인(門人)을 위로하고, 민(閔) (결락) 지심(之心). 아름다움을 백대(栢臺)로 돌리고, 국사(國士)들이 스님을 추모하는 뜻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에 명(銘)을 지어 가로되,

(결락)

(결락) 소인기(蘇認己)

보배를 감추고 법인(法印)을 알았네.

자비의 그 배는 풍랑(風浪)에 빠졌고

지혜의 등불은 그 빛을 잃었네.

은빛 난 석등(石燈) 불 영원히 비추리.

【陰記】

영봉산(靈鳳山) 고국사(故王師) 진공대사탑음(眞空大師碑陰)

대개 듣건대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물을 여는 것과 같은 인정(仁政)을 베풀었고,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결락) 서축(西竺)에서 발상한 불교가 중국에 전래(傳來)된 이후, 유일(唯一)한 호법왕(護法王)일 뿐만 아니라 보지공(寶誌公)스님을 친견하고 마주 앉아 동방(東方)의 풍속을 이야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가 널리 홍포되기 시작하였다. 위(魏)나라 손권(孫權)은 조신(朝臣)들을 모아 거마(車馬)로써 강승회(康僧會)스님을 맞아들여 존경하여 왕과 함께 동울(東菀)에서 놀았으며, 또한 같은 여(輿)를 타고 함께 다니기도 하였다. (결락) 우리나라에서도 삼한(三韓)이 각립(角立)하여 아직 누가 승리할 것인지 진위(眞僞)를 구별할 수 없었으나, 이젠 고려 일국(一國)이 웅비(雄飛)하여 문득 전쟁의 우열을 가렸고, 멀리에서 성덕(聖德)을 입고, 널리 (결락) 대사(大師)께서 표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는 정기가 사유(四乳)와 같고, 눈에는 두개의 눈동자가 빛납니다. 그러므로 이찰(梨察)은 원황(元皇)의 자리에 있었음이 마치 불도징(佛圖澄)이 후조의 고조인 석륵(石勒)의 귀의를 받음과 같다 하겠다. 그러나 오히려 (결락) 스님들은 시정(市井)에 내주(來往)하기를 싫어하고, 뜻이 산가(山家)의 울창한 숲 속에서 수행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도인(道人)은 곧 해국(海國)의 고요한 곳에 주(住)하게 되었으니, 질질(秩秩)한 군자들이 불교에 귀의하기를 희망하였다. 련기(憐其) (결락) 대사께서는 이제 낙토(樂土)를 버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자 커다란 일축의 글을 구중(九重)의 궁궐로 보내왔다. 과인(寡人)이 대사와 더불어 정(情)의 깊음이 아교와 칠보다 더하였고, 의리는 (결락) 동국을 불국화(佛國化)하려는 서원이었다. 흥법선원이 비록 고사(古寺)이긴 하나, 오히려 동방(東方)에 있어서 화상(和尙)의 생전(生前)에 길이 중생을 교화할 곳을 삼았던 절이다. 대사의 재가제자(在家弟子) (결락) (以下는 『金石苑』에 의함).

주반(州官)

통현상좌(通玄上座)

낭중(郞中):민회타(旻會朵) 광휴장로(廣休長老) 김순타(金舜朶)

시랑(侍郞):흥림타(興林㭐) 혜태장로(惠泰長老) 수영타(秀英㭐)

상타(上㭐) 신희타(信希㭐)


판독문

  • 출처: 허흥식, 『韓國金石全文』 中世上, 아세아문화사, 1984.[2]

故眞空

(題額)

大師碑

高麗國原州靈鳳山興法寺王師眞空之塔

▨▨▨▨▨▨     臣崔光胤奉 敎集 太宗文皇」

盖聞微言立敎始開鷲嶺之譚妙旨傳心終入雞山之定雖曰別行法眼竊惟同禀玄精慶喜於是當仁和修以其嗣位至於馬鳴繼美垂妙法於三乘龍樹揚芳見其▨▨▨▨▨」

相離相非身是身降乃▨▨▨▨▨▨▨▨▨▨▨▨▨▨▨▨▨▨▨▨▨▨▨▨▨▨▨▨▨初聞圓覺東入梁朝始見大弘北遊魏室於是師資所契付同風」

祖法相承心燈不絶所以一花歘現六葉重榮近自江西流於海裔亦有鳳林家子章敬曾孫惟我大師再揚吾道者焉 大師法諱忠湛俗姓金氏其先鷄林冠族兎郡宗枝▨▨」

島以分榮託桑津而別派遠祖多▨▨▨▨▨▨▨▨▨▨▨▨▨▨▨▨▨▨▨▨▨▨▨▨▨▨陶而不事王侯希賈詡而寧求祿位所以考盤樂道早攻莊列」

之書招隱攀吟常避市朝之譽母於▨▨▨▨▨▨▨▨▨▨▨▨▨▨▨▨▨▨▨▨▨▨▨▨▨賢之子豈無修聖善之心感此靈奇求生法胤以咸通十年正八月」

一日誕生 大師生有殊相弱無戱言▨▨▨▨▨▨▨▨▨▨▨▨▨▨▨▨▨▨▨▨▨▨▨▨▨▨性靈超衆神悟絶倫槐市橫經杏園命筆二親甞邀相者相之」

云若至甘羅之歲鳳舉難量終臻賈誼之▨▨▨▨▨▨▨▨▨▨▨▨▨▨▨▨▨▨▨▨▨▨▨▨至失於怙恃唯恨栖遑爰有長純禪師是導師修度世之緣當」

亡父結空門之友 大師隨其長老得居▨▨▨▨▨▨▨▨▨▨▨▨▨▨▨▨▨▨▨▨▨▨▨▨▨俗塵方登僧位尋令昇堂覩奧入室鉤深迅足駸駸後發先至」

覺枝脉脉前開晚成所以偃仰禪林優游▨▨▨▨▨▨▨▨▨▨▨▨▨▨▨▨▨▨▨▨▨▨▨▨▨▨認印度重光終至相傳窺楞伽再闡迺於龍紀元年受戒」

於武州靈神寺旣而習其相部精究毗尼捧▨▨▨▨▨▨▨▨▨▨▨▨▨▨▨▨▨▨▨▨▨▨▨▨宗論道謂學人曰淺溜穿石同心斷金鑽燧之勤寫甁之易皆」

由積微不己跬步遄征俄成學海之功永就▨▨▨▨▨▨▨▨▨▨▨▨▨▨▨▨▨▨▨▨▨▨▨▨釋子天日禪僧此間觀曝骨之墟見殭屍之處他山靜境豈無」

避地之方此地危邦終絶居山之計▨▨▨辶華▨▨▨▨▨▨▨▨▨▨▨▨▨▨▨▨▨▨▨▨▨▨▨者同載而征達於彼岸此時徑登雲葢禪宇虔禮淨圓大師」

大師是栖雲壑之居佩石霜之印知▨大師遠離▨▨▨▨▨▨▨▨▨▨▨▨▨▨▨▨▨▨▨▨▨▨圖南逈奮垂雲之翼豫章向上高揮拂日之枝大師謂曰汝」

還認其到此階梯預呈其遷喬所以不離寶所▨▨▨▨▨▨▨▨▨▨▨▨▨▨▨▨▨▨▨▨▨▨▨▨河東叅禪門於紫嶽故能初窺聖典久栖禹穴之旁始覽靈」

蹝方到燕臺之畔迺於天祐十五年六月得達於▨▨▨▨▨▨▨▨▨▨▨▨▨▨▨▨▨▨▨▨▨▨▨學俱於問訊慶抃交深數月論禪周年問法惟彌天發▨乃」

離日搖脣量語路之端酌言之▨此日揣於兩地心▨▨▨▨▨▨▨▨▨▨▨▨▨▨▨▨▨▨▨▨▨之光愁見甲兵之色所以便辭金海遙指玉京行道遲遲於」

焉入境不唯摩勒重敷兼亦優雲一現奉迎內殿尋以▨▨▨▨▨▨▨▨▨▨▨▨▨▨▨▨▨▨▨▨▨仕遙屢吐象王之說重重避席恭披弟子之儀一一書紳結」

以王師之禮翌日請移▨▨▨▨▨▨淨精廬永元▨▨▨▨▨▨▨▨▨▨▨▨▨▨▨▨▨▨▨▨▨▨ 大師遠從丹縑再到京畿所以別飾玉堂令昇繩榻問」

大師曰 寡人少尙威武未精學▨不曉先王之典寧▨▨▨▨▨▨▨▨▨▨▨▨▨▨▨▨▨▨▨▨▨存亡之志所喜不勞漢夢仍覩秦星世宗之遇摩騰梁武之」

逢寶誌無以加也生生世世永修香火之因子子孫孫終表奉持之至所以重起其興法禪院以住持▨▨▨吉祥之地尙論往美更知延福之庭志有終焉心無悔矣然」

則遂於此地高敞禪扄來者如雲學如人霧依舊瑠璃▨▨▨▨▨▨▨▨▨▨▨▨▨▨於國▨▨▨▨▨聞興法之談不受 大師之誨者處處精舍其徒擯之終日」

了無語言一宵堅不留宿豈期大師素無疾疹富有▨▨異於座品之▨▨▨▨▨▨▨▨▨▨▨▨▨▨五年七月十八日詰旦告門人曰萬灋皆空吾將去矣一心」

爲本汝等勉旃顔貎如常寂然坐▨俗年七十有二僧▨▨地動山崩雲愁日慘▨▨▨▨▨▨▨▨▨▨▨悲盈四部天人增絶學之哀寧惟慟徹諸方士庶泣亡師之」

賢 寡人忽聆遷化尤慟于懷追切洪德不能已已特宗林禪伯季葉古皇朝▨▨▨▨▨▨▨▨▨▨萬壽之遐長乖群情之敬仰今則果雖核矣室可修焉然則先」

忻於水積魚歸後恨於林傾鳥散所冀早儀明禮正當▨▨贈諡眞空大師塔号▨▨▨▨▨▨▨▨▨▨▨之塔惟 大師雪山成道煙洞證心傳十八代之祖宗統」

三千年之禪敎則知浹洽浮世舉其廣則誰曰黃輿周▨▨香散馥便牽胡蝶之心水▨▨▨▨▨▨▨▨▨忘機仍引狎鷗之興幾多盻蠁無限昭彰可謂闡揚身毒之」

風敷演竺乾之法者矣門徒弟子五百▨▨▨▨▨▨▨身之贖切恐蒼山變谷渤▨▨▨▨▨▨▨▨▨成田陳情而特請龜文瀝懇而頻干鳳德所冀顯無爲之化留衆在水雲期不朽之緣刻於金石▨恤之慟措詞黹臼慰門人閔▨▨▨▨▨▨▨▨▨▨▨▨▨▨▨▨▨之心歸美百臺旌國士追攀之志乃爲銘曰」

▨▨▨▨▨▨▨▨▨▨▨▨▨▨流雍袂賢佐褰裳▨▨▨▨▨▨▨▨▨▨▨▨▨▨▨▨▨▨蘇認已藏寶知印慈航沒浪慧炬沉光銀燈石塔」

(陰記)  

靈鳳山故 王師眞空大師碑陰

盖聞湯王滅夏終敷開網之仁武帝(中缺)西陲之敎親窺寶誌爰談東夏之風由 是大集朝臣車」

馬以奉迎僧會出遊東菀輦輿而同(中缺)我國家三韓角立未知彼此之僞眞一國雄飛忽辨戰爭之優劣遐霑聖德廣(中缺)」

大師奏表曰 殿下精同四乳眼耀雙瞳以此梨察

在元皇之座圖澄逢趙主之憐然猶(中缺)僧憚於來往志在登臨山家之欝欝森森道人旣住海」

國之幽幽秩秩君子攸寧伏乞憐其(中缺)大師今辭樂土欲入深山高飛一軸之文聊送」

九重之闕寡人與大師情深膠柒義(中缺)東化所誓其興法禪院縱爲古寺尙在仁方和尙生前永作栖遑之處 大師」

在家弟子(中缺)州官」

通玄上坐 郞中 旻會朵 廣休長老 金舜朵」

侍郞 興林惠泰長老秀英」

上 信希」


주석

  1. 온라인 참조: "흥법사진공대사비(興法寺眞空大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흥법사진공대사비(興法寺眞空大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