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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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
한자 醴泉 鳴鳳寺 境淸禪院慈寂禪師陵雲塔碑
승려 홍준(弘俊)
찬자 최언위(崔彦撝)



번역문

  • 출처: 이지관, "영풍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문(榮豊 境淸禪院 慈寂禪師 陵雲塔碑文)",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1]


영풍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문


고려국(高麗國) 상주(尙州) 명봉산(鳴鳳山) 경청선원(境淸禪院) 자적선사(慈寂禪師) 능운탑명(凌雲塔碑銘)과 아울러 서문.

대상(大相) 검교상서(檢校尙書) ▨▨▨▨▨▨▨▨ 상주국(上柱國) ▨ ▨▨▨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하승(門下僧) 승(僧) ▨유(▨裕)는 교지(敎旨)에 의하여 고서중(古書中)에 집자[(集字 구양순체(歐陽詢體)]하고, 문하승(門下僧) 연훈(然訓), 법오(法悟), 심장(心藏) 등이 글자를 새기다.

허공은 형상(形相)이 없고, 불성(佛性)은 생멸(生滅)이 없다. (결락) 心 (결락) 이러한 진여(眞如)를 생각하여 모든 실성(實性)을 터득할 수 있으니, 마치 색(色)이 곧 색(色)이 아니고, 공(空) 또한 공(空)이 아닌 것과 같다고 하겠다. 중생(衆生)의 망녕된 생각이 마치 아지랑이를 보고 물인 줄 오인하는 것이고 명(名)이란 오직 거짓된 이름일 뿐이니, 흡사 신기루(蜃氣樓)와 같다. 심식(心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말장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결락) 聖 (결락) 先覺 (결락) 之者. 구하는 자는 구할 것이 없음을 구하며, 배우는 사람은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유(有)인 물질과 무(無)인 공(空) 속에 진실이 함재(含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스러운 지혜로 마음을 간직하고 그윽이 마니(摩尼)의 보배를 잘 지켜서 영성반야(靈性般若)에서 (결락) 묘용(妙用)의 심기(心機)는 (결락) 法 (결락) 한 이는 우리 선사 뿐이라 하겠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홍준(洪俊)이요, 속성은 김씨니, 그의 선조(先祖)는 진한(辰韓)의 무족(茂族)이며 토군(兎郡)의 명가(名家)였다. 혹은 자궐(紫闕) 에서 널리 선행을 하며, 혹은 황문(黃門)에서 보국(補國)하였다고 한다. 본래는 (결락) 요원(瑤源)으로부터 내려오는 별파(別派)이며, 옥수(玉樹)의 분기(分枝)였다. (결락) 名配在 (결락) 그 후 오래 동안 번복(藩服)의 귀호(貴豪)이었는데, 지금은 경주 사람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육정(陸正)이고, 아버지는 지유(志儒)이니, 혹은 오천중(五千中)에서 도를 배우고 혹은 삼백(三百)의 시편(詩篇)을 연구하되, 항상 뜻을 물으면서 토론하였으니 문학을 좋아하며 소중히 여겼다. (결락) 抄 (결락) 戒. 어느 날 어머니는 비몽사몽간에 그윽한 영감을 받는 태몽을 꾸었고, 그로부터 지혜롭고 복덕 있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오신채(五辛菜)와 고기 등은 모두 끊고, 날이 갈수록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다. 중화(中和) 2년 3월 16일에 탄생하였다. 선사는 날 때부터 특이한 자태를 지녔으며, 어려서도 어린아이답지 않았으니 유학(幼學)의 나이에 이르러 책 상자를 짊어지고 학당(學堂)으로 찾아가기도 하였다. 선사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공손하여 가풍을 잘 이었고, 항상 자신의 내면을 잘 극기하여 조덕(祖德)을 닦았다. 뿐만 아니라 재주가 뛰어나 글을 읽음에 다섯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으니, 천재라는 소문이 이려(里閭)에 떨쳤다. 일찍부터 불경을 열람하였고, 유교 또한 정통하였다. (결락) 하늘을 날고, 바다의 넓음을 뛰어 넘을 큰 포부를 가졌으니, 숲 속으로 기어 다니는 개미가 어찌 이 웅지(雄志)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爭 (결락) 於 (결락) 章之 (결락) 其大小 (결락) 이러한 뜻을 가졌기에 (결락) 출가하여 입산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부모는 아들의 출가하려는 뜻을 듣고는 애정을 억누르며 허락하였다. 출가의 길을 떠나 동쪽으로 가는 도중 태령(太嶺)을 지나 흑암선원(黑岩禪院)에 도달하여 진경대사(眞鏡大師)를 친견하니 스님은 마치 빙자(氷姿)처럼 아름답고, 옥체(玉體)처럼 맑았다. 예배를 드리고, 마음에 뜻한 바를 아뢰었다. “스님은 사계(沙界)의 제항(梯航)이며 법문(法門)의 영수(領袖)이시니 저를 받아 들여 득도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도수(道樹)의 밑에 서게 되었고, 마침내 선림(禪林)의 보배를 얻게 되었다. 어느 날 진경대사(眞鏡大師)가 스님에게 이르기를 “천축(天竺)에서 심법(心法)을 전수한 조사(祖師)가 많았으니 제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의 법을 전해 받은 달마대사는 중국으로 와서 (결락) 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었으며, 그 후 곧 동토 선종의 제6조인 조계(曹溪) 혜능에 이르렀다. 이어 조조(祖祖)가 서로 전수하여 백암(百巖)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진경대사(眞鏡大師)가 당나라로 유학 가서 백암(百巖)의 법을 받아 귀국하여 경남 창원군 상남면 봉림리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선풍을 크게 진작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그 법통이 단절되었지만, 그 도(道)는 더욱 훌륭하였다. 이제 내가 지금 너희들과 함께 혜목(慧目)의 종지(宗旨)를 천양하여 봉림가풍(鳳林家風)을 영원히 무성(茂盛)하게 하며 장래의 후생(後生)들에게 보여 주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건부(乾符) 6년 명주(溟州) 입양율사(入良律師)에게서 비구계(比丘戒)를 받고, 그 후 각 사찰을 참배하면서 두루 명산(名山)과 승지(勝地)를 탐사하고 마가연(摩訶衍)을 탐구하려고 많은 선지식을 친견하였다.

그 후 (결락) 경명대왕(景明大王)이 봉림대사(鳳林大師)는 법덕(法德)과 교덕(敎德)이 높을 뿐만 아니라 현기(玄機)가 넓고 깊다하여 특별히 단조(丹詔)를 보내서 경화(京華)로 초빙하였다. 선사는 서울로 가는 길에 여러 사찰을 거쳐 동천사(東泉寺)에서 잠깐 주석하다가 북궐(北闕)로 나아갔다. 此 (결락) 山築 (결락) 왕(王)은 국사(國師)를 맞이하는 예로써 정성껏 낭렬(曩列)을 행하였으니, 어찌 신하를 대하는 태도를 가졌겠는가. 그 후 예천(醴泉)에 이르러 한 단월(檀越)을 만나니 그는 정광(正匡) ▨▨이란 사람이다. (결락) 東瞻 (결락) 반드시 신인(神人)이 있어 나의 도성(都城)에 들어 올 것이므로 먼저 아름다운 상서를 나타냈다하고 교외(郊外)에서 영접할 때 선사(禪師)에게 경례하며 현관(玄關)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공을 치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선사가 수년간 영헌(靈軒)에 주석(住錫)할 때에는 마치 용이 앉아 비늘을 감추는 듯 하며. 산중으로 돌아와 연오(蓮塢)에서 연좌(宴坐)함에는 흡사 학이 울 때 날개를 아래로 드리우는 것과 같았다.

바야흐로 하늘에까지 들렸으니, 어찌 상께서 선사(禪師)가 선교(宣敎)의 7세손이요, 법응(法膺)의 제자임을 듣지 아니 하였겠는가. 높이 선유방편(善誘方便)을 열고 널리 미묘법문(微妙法門)을 설하니 불교를 배우려는 무리가 시시로 운집하여 큰 회상(會上)을 이루었다. 이 때 왕이 보소(寶所)로 특사를 보내어 선중(禪衆)을 반산(頒散)하고 봉성(鳳城)으로 옮겨오시라고 초빙하였다. 선사는 앞을 내다보는 고견(高見)으로 피차(彼此)를 생각하고, 조사(祖師)의 덕을 지키면서 앙례(仰禮)의 청에 감사하며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등(燈)을 보면서 탑(塔)을 참배하고 마음으로 그윽이 부촉(付囑)을 생각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경화(京華)에 도착하였다. (결락) 임금이 스님의 봉의(鳳儀)를 바라보고는 귀의(歸依)할 원심(願心)이 더욱 간절하였으며, 스님의 용보(龍步)를 보고는 기꺼이 위로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다음 날 옥당(玉堂)으로 맞아 들여 법회를 열고 법상(法床)에 올라앉으시니, 임금이 스님의 선덕(禪德)을 흠앙(欽仰)하여 다른 위인(偉人)들보다 10배나 더 영특함을 깨닫고 도풍(道風)을 이어 받들었으며, 친히 삼귀의(三歸依)의 예를 폈으니 왕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이제야 마음이 열리게 된 것을 한탄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절감하였다. 그 후 (결락) 궁사(宮使)를 보내어 스님을 초빙하여 귀산선원(龜山禪院)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하였다. 이 때 그 곳으로 가서 악개(盖)를 멈추고 회상(會上)에 개설(開設)하니 학인(學人)이 사방으로부터 모여들어 즐비하기가 도마(稻麻)와 같고, 찾아오는 사람이 신선처럼 달려 와서 열을 지어 오고 가니 도리성혜(桃李成蹊)와 같았다. 그리하여 미혹한 것으로부터 반성하게 하며, 빈손으로 가서는 가득히 얻어서 돌아가게 하였다. 칭송하는 소리는 십방(十方)을 떨쳤으며, 고명한 그 이름은 천년에 빛났다. 이는 당(唐)의 문▨(章▨)으로 더불어 (결락) 가히 동년으로 비교하여 말할 수 없다. 이 곳에서 연좌(宴坐)하는 동안 5년이 지났다. 이후 유종(遊宗)할 때가 임박하였으니, 徃依 (결락) 천복(天福) 4년 10월 1일 귀산선원(龜山禪院) 법당에서 입적(入寂)하였다. 돌아가신 모습을 살아 있는 것 같았고, 과일 같은 입술은 마치 말을 하고 있는 듯 하였다. 육신을 던져 버리는 이치가 어찌 그리 한결 같으랴. 어떤 스님은 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열반하였다. 혹은 수도 중 그래도 입정(入定)한 듯 입적(入寂)하기도 하고, 혹은 매미가 허물을 벗 듯 좌탈입망(坐脫立亡)하기도 하며, 혹은 섶을 쌓아 놓고 스스로 화장(火葬)을 하는 선사도 있었다. 선사의 세속 나이는 58세요, 승랍은 48이었다. 그 달 6일에 문인(門人) 등이 영구를 메고 명봉사(鳴鳳寺)의 북쪽 산기슭에 임시로 가장하였다. 장사하는 날 조객인 사서(士庶)는 개천을 가득히 메웠고, 열반의 향내는 산곡(山谷)을 넘쳐흘렀다. 하천(河泉)은 슬피 울었고, 구름과 해는 수심에 잠겼으며, 임금도 항상 스님의 현종(玄宗)을 앙모하다가 갑작스런 열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해 마지아니하였으며, 시호를 자적선사(慈寂禪師), 탑명을 능운지탑(凌雲之塔)이라고 추증하였다. 선사의 공(功)은 억겁(億劫)을 이루고 그 운(運)은 천년을 흘러가서 순정(淳精)에 응하여 옥을 꿰어 놓은 것과 같으니 함령(含靈)을 깨우쳐서 승경(勝境)에 출생(出生)하게 하며, 유진(有塵)의 과일은 그 법을 베풀지 아니함이 없고, 망념(妄念)의 꽃은 같은 중생에게 그 색을 나타내지 않음이 없게 하였다. 동(動)하는 곳에 있으나 항상 고요하며, 또한 고요한 곳에 있으나 항상 움직여 (그 묘용(妙用)은) 가만히 쉬지 않았다. 그 법문을 듣는 자는 바람에 먼지를 말끔히 날려 버리는 것과 같았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마치 혁혁한 일광(日光)이 캄캄한 어두움을 쫓아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선림(禪林)의 기재(杞梓)이며, 법역(法域)의 동량(棟梁)이요, 奈 (결락) 등(等)은 화성(華誠)과 자종(慈宗)의 장참(墻塹)이 되었고, 군생(群生)들의 자부(慈父)이어서 병을 치료하는 의왕(醫王)과 같다 하겠다. (결락) 법을 전해 받은 제자(弟子)인 작린(綽麟), 승담(承湛) 등 1백여 인은 모두 마음이 찢어지는 듯 생전에 스님과 대하여 말씀드리던 일을 생각하였으며, 선덕(禪德)을 추모하여 법은(法恩)을 갚고자 하였다. 其親 (결락) 좌승흠노(佐丞歆魯) 관거재보(官居宰輔) 직관궁위(職綰宮闈) (결락) 왕씨(王氏)의 연지(連枝)이며, 봉축(奉竺) (결락) 의 별파(別派)인 재가(在家) 제자 상부(尙父) 김공선소(金公善紹)와 대상홍공(大相洪公)이 있었으니 인자(仁慈) (결락) 함이 옥과 같이 맑고, 정렬(貞烈)은 쇠를 끊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이러한 재가 제자들이 함께 스님의 선화(禪化)에 힘입어 각각 불후(不朽)의 인연을 가졌고, 모두 도풍(道風)의 감화를 받아 한량없는 공덕을 닦았으니 법역(法域)의 주석(柱石)이며, 겸하여 국가의 금탕(金湯)과 같이 튼튼한 국가의 아성(牙城)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신(下臣) 언위(彦撝)는 학해의 미파(微派)이며 사림의 말품(末品)이면서 외람되게 봉조(鳳詔)를 받들어 비문을 짓게 되었다.

명(銘)하여 가로되,


축건(竺乾)에서 발상(發祥)한 우리의 불교가

제1조(第1祖)인 가섭의 법통을 이어 받았네!

멀고도 먼 서역땅인 고향을 떠나

구법승(求法僧)의 원(願)으로 동토(東土)에 전했네.

빛나는 정법안장(正法眼藏) 법통을 이어받고

서건(西乾)의 불심(佛心)과 동토(東土)의 제자들이

이심전심(以心傳心) 그 마음 가을못 달빛처럼

청명한 여름날 구름 거친 산정(山頂)에

우뚝 선 큰 나무 하늘을 찌르는 듯

봉림(鳳林)의 법통(法統)을 현관(玄關)에 걸어놓고

한수(漢水)의 남상(濫觴)처럼 흐르고 또 흘러

도도(滔滔)하게 흐르는 정정(淸淨)한 그 법수(法水)

애저(藹藷)하고 무성한 선림(禪林)의 정간(貞幹)들

자재(自在)히 흐르는 깊고 넓은 선하(禪河)여!

굳건한 의지(意志)로 심원(心猿)을 조복받고

자비는 깊고 넓어 미물(微物)도 구제했네!

선사(先師)의 간곡한 부촉을 이어 받아

위법망구(爲法忘軀) 대원(大願)으로 정진하였네!

수행(修行)은 높고 깊어 헤아릴 수 없어

현성(賢聖)을 초월한 독보적인 큰스님!

자비하신 그 원력(願力)은 바다와 같고

천진(天眞)을 잃지 않고 잘 보호하였네!

이 세상 어느 것을 견고하다 말하리!

공자(孔子)도 인생(人生)을 서천(逝川) 같다 했거늘!


천희(天福) 6년 세차신축(歲次辛丑) 10월 27일 세움.


판독문

  • 출처: 출처: 허흥식, 『韓國金石全文』 中世上, 아세아문화사, 1984.[2]


高麗國尙州鳴鳳山境淸禪院故 敎諡慈寂禪師凌雲之塔碑銘幷序」

大相檢校尙書▨▨▨▨▨▨▨▨▨上柱國▨▨▨奉 敎撰」
門下僧▨裕奉 敎撰集古書 刻字門下僧然訓法悟心藏等 虛空也無相無形佛性也不生不滅▨▨▨從▨▨心▨▨▨量此眞▨▨諸實性猶如色則非色同夫炎水之波名惟假名類彼乾城之▨心識之所▨」

▨落言▨所名夆曰▨▨▨▨▨▨▨▨▨聖▨▨先覺▨▨▨之者求無所求學之者學無所學有無之▨實在玆乎所以靈智蘊心暗守摩尼之寳靈悚」

▨若▨▨妙用心機▨▨▨▨▨▨法▨▨▨▨▨▨我禪師者乎 禪師法諱洪俊俗姓金氏其先辰韓茂族兎郡名家或紫闕廣善或黃門輔國」

▨從瑤源別派玉樹分枝▨▨▨▨▨▨▨▨▨▨▨▨▨名配在▨▨▨世藩服 貴豪今爲▨州人也大父陸正父志儒或五千學道或三百尋篇問義」

▨論故文好在重▨▨▨▨▨▨▨▨▨▨▨▨▨▨▨▨▨抄▨戒嘗於假寐▨▨▨▨▨感幽靈冀生智子斷其葷血稍淨身心以中和二年三月十」

六日誕生 禪師生有▨姿▨無兒戱至於幼學皷篋登筵温恭而克紹家風秘護而聿修祖德況又五行倶下名振里閭嘗覽釋經▨於儒敎▨▨▨」

▨▨浮天於溟㴾之源蟻蛭之林爭▨▨於▨章之▨▨▨▨其大小▨▨▨▨▨譚此際▨▨▨親出家是務父母聞此情懇愛而許之所以邐迤東行」

▨過太嶺達于黒巖禪院詔 眞鏡大師美覩氷姿▨▨玉體直授所志仰告心期 大師沙界梯航法門領袖禪師因慈師事曲盡敬恭方栖道樹之」

▨果獲禪林之寳大師乃語禪師曰天竺傳心之祖善楹達摩大師東▨中華▨▨▨▨直至曹溪之祖祖祖相傳傳彼百巖達于東海至今斷絶其道彌」

善今者吾與▨曹顯揚慧目使欲鳳林永茂冀示將來者也乾符六年受於溟州入良律師其後禮窣堵婆投勝地名山之境探摩訶衍簡明師哲匠之」

▨其後▨▨▨▨▨ 景月大王以鳳林大師法敎尊崇玄機悶邃特飛丹詔欲赴京華 禪師▨▨而行至於設佛住持於東泉寺趍觀於北闕中此▨」

▨山築▨▨▨▨▨國師之禮虔行曩列寧徵臣伏之儀以後得抵醴泉仍逢檀越便是正匡▨▨東瞻▨▨必有神人入我都城先▨嘉瑞郊迎之際▨」

禮禪師請住玄關不▨功事所以欲焉數歲暫駐靈軒龍坐藏鱗暫膺蓮塢鶴鳴栽翼方叶聞天豈謂」

▨上聞 禪師宣敎七孫法膺之子高開善誘廣說徵言學佛之徒時時雲集此時特遣王人▨於寳所方頒其禪衆來赴 鳳城禪師平視高位早▨彼」

此▨守祖師之德感深仰禮之▨在▨貪程秖爲▨傳之故看燈禮塔潜思付囑▨ 因漸漸超山行行騫嶺倍程之際尋至京華▨▨上瞻望 鳳儀實切」

歸依之願得披龍步深增喜慰之心翌日延人玉堂逈昇繩榻上欽仰禪德覺逮▨十倍之英奉承道風申親受三歸之禮所恨披雲之晚竊感▨緣仍令」

所▨▨於守內便乃龜山禪院請以住持此日暫至茅廬方停盖學人雨驟森森稻麻來者仙馳列列桃李在迷思返虗往實歸聲振十方名高千載且」

與唐之章▨不可同年而語哉宴坐於斯▨經五載遊宗所逼化往依▨▨天福四年十月一日示化於龜山法堂亡㒵如生菓唇似語捨身之理寧▨恒」

▨或攀樹泥洹或道山入定或蟬蛻而去或火焚以殂俗年五十有八僧夏四十八其月六日門人等肩舁靈函假肄于寺之北麓士庶闐川香葉溢谷▨」

泉悲▨雲日注愁 上乃常仰玄宗忽聆遷化其▨良深靈涕實慟于懷賜諡曰慈寂禪師塔名凌雲之塔禮也禪師功成億刧運叶千年應淳精而玉成」

編方含靈數而出於勝境有塵之菓無所施其法忘念之花無所呈其色栖動域而常靜處幽居而不坐聞之者風駈垢埃得之者曰破昏黒禪林梓寔」

法域之棟梁奈▨等▨華誠慈宗之墻塹作群生之慈父爲▨病之▨王者▨▨▨傳法弟子綽麟承湛等一百餘人倶切心喪永思目語追惟」

禪德以報▨法恩其親▨▨佐丞歆魯官居宰輔職綰宮闈▨王氏之連枝奉竺▨之別派與在家弟子尙父金公善紹大相洪公仁▨如玉惟貞斷金是」

視同資禪化各持不朽之緣共感道風皆薦無疆之福不唯法域柱石兼作仁國金湯下臣學海微派詞林末品叨膺鳳詔油楷龜文銘曰」

竺乾之敎 迦葉是資 自從西域 來至東陲 光▨法印 遠副心期 秋潭月規 夏嶺雲披 婁樹▨英 玄關仰止 漢廣濫觴」

滔滔法水藹藷貞幹 裊裊禪深 志切調猿 情深救蟻 先師付囑 大重因緣從凡出衆 發超聖賢 慈心如海 ▨惟保天 非愛藏壑 孔恨逝川」

天福六年歲次辛丑十月二十七日立」


(陰記)

都評省 帖洪俊和尙衆徒右法師師矣啓以僧矣段赤牙射鷲山中」

新處▨元聞爲成造爲內臥乎亦在之白賜且以入京爲使臥金達含」

進置右寺原問內乎矣大山是在以別地主無亦在彌衆矣白賜臥乎」

白如加知谷寺谷中入成造爲賜臥亦之白臥淨味及白節中」

敎旨然乎戶丁矣地▨知事者國家大福田處爲成造爲使賜爲」

天福四年歲次己亥八月一日 省史臣光」

五年辛丑八月廿一日▨國家▨山院名貴十四列郡縣契乙用」

成造令賜之」

箴成造使正朝 仁謙 停勵古寶」

國主 神聖大王 國統 坦然」

節三剛 院主 道堂 典坐 含惠 史僧 惠允」
在家弟子佐承 秀文 佐承 主忠 太相 英會」
元甫 仁剛 正甫 仁暉 元尹 昕暉」
元尹 昕▨ 正位 元▨ 正位 ▨▨」
太卿 昕▨ 吉永 ▨▨ 文忠 宗希」
▨釋 ▨翠」
輔州官班 上沙喰 元吉 第二純保 第三英希」
寺卿村主吉萱」
官班 上沙喰 宗偘 第二 今岳 第三 主道」
村主 行悟 村主 能直 村主 宣直」
鐵匠能弌居士 石匠相昕大 内外▨▨惟那 ▨▨」

주석

  1. 온라인 참조: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릉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릉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