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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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
한자 靈巖 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승려 도선(道詵), 수미(守眉)
찬자 이경석(李景奭)
서자 오준(吳竣)


번역문

  • 출처: 이지관,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朝鮮篇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19-449쪽.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 비문 月出山道岬寺 道詵國師 守眉大禪師碑銘 (篆題) 月出山 道岬寺 道詵國師 守眉大禪師碑銘 幷序

金山에 사찰을 建立함으로서崇頭陀란 그의 이름을 길이 남겼으며, 강물에 떠내려 온 오이는 도리어 도선국사의 이름을 널리 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祖師 玄關의 문을 열어天地의 造化를 무시하고 그의 神秘함을 나타냈으며, 도갑사를 창건하여 수도 道場을 개설하고는八部神將의 옹호를 받아 모든 佛子들이 福을 닦게 되었으니,이와 같은 偉大한 이의 업적은 마땅히 貞珉에 새겨서 길이 後代에 전하여 알게 하여야 하므로 감히 旣存에 있던 마멸된 碑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국사의 휘는 道詵이니 신라의 朗州 사람이다. 어머니는 崔氏니 靈岩의 聖起山 僻村에서 眞德王의 말년에 태어났다. 어머니가 겨울철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떠내려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임신하여 俊秀한 아들을 낳았으니, 마치 后稷의 어머니 姜嫄이 巨人의 발자취를 밟고 感心하여 임신한 후 태어난 것과 같다. 또 白足和尙이 山川의 精氣를 받고 淑氣를 모아 태어났으므로 모든 俗塵을 벗어난 것과 같았다. 신비하게도 낳자 마자 숲 속에 갖다 버린 아이를 비둘기가 날개로 보호하였고, 신령스러운 독수리가 날개를 펼쳐 아이를 덮어 보호하였다. 일찍이 月南寺로 가서 佛經(貝葉)을 배웠다. 그리고 舞象하는 나이가 되기 전에使臣을 따라중국으로 가서 胡渭가 지은 禹貢의 山川說에 따라 두루 살펴보고唐家의 文物을 익혔다.唐나라 皇帝가 宮內의 延英殿에서 스님을 영접하고 간곡히 부탁하기를 朕의 꿈에 金人이 나타나 돌아가신 大行 皇帝의 新陵의 터를 스님을 초청하여 占卜토록 하라는 現夢을 받았으니, 스님은 사양하지 말고 가장 좋은 明堂 터를 잡아 달라고 청하였다. 道詵은 피할 수가 없어 竈王神이 지신한대로 황제가 타고 다니는 御馬가운데 병든 白色 말 한 마리를 내려달라고 하였다.그리하여 가장 吉한 터를 잡아 바쳤는데,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기를 天賦的으로 타고난 地理에 대해 特異한 眼目을 가졌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어찌 地術에 대한 능력뿐이겠는가! 天子도 國師로 책봉하여 존경하였으며, 一行禪師도 이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국사는 金箱과 玉笈을 두루 연구하여 꿰뚫었으며, 赤縣의 黃圖를 탐구하여 깊이 통달하였다. 그 후 동쪽으로 돌아가 연마한 地術을 振作하는한편, 北學한 金箱,玉笈,黃圖의 내용으로써 時局을 구제하겠다면서황제에게 귀국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 나라에 귀국한 후 地形을 살펴보니 行舟形局이었다.그러므로 배의 首尾를 鎭壓하기 위해서 절을 짓고 塔을 設立하게 하였다.멀고 가까운 곳을 두루 둘러보고 王建의 아버지에게 白雪이 퍼붓는 때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곳(明堂)에 집터를 잡아주어 王이 될 아들을 낳게하였을 뿐 아니라 半千年間 王業을 누릴 수 있는 松嶽에 王都를 정해 주었다. 오직 이 月出山 道岬寺는 日觀峰의 奇景일 뿐만 아니라, 산은 겹산이며, 봉우리는 絶景이어서 마치 千佛像이 나열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바위는 떨어질 듯한 위태로운 흔들 바위와 같아서 全國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魚口의 주변 경관은 마치 文殊로부터 지시를 받은 善財童子가 善知識을 친견하여 법문을 듣는 모습이며, 龍淵의 경치는 도선국사가 많은 大衆을 모아놓고 지도한다는 소문을 들은 四方 學人들이 찾아와 함께 모여 있는 모습과 같았다.구름으로 窓을 삼고, 안개로 집을 삼아 어렴풋이 十二樓로부터 海潮音과 梵音이 흘러 나오고, 風幡에서는 光明이 흘러 나와 三千大千世界를 비추었다. 국사의 뜻은 國利民福과 王圖의 鞏固에 있었으며 고상하여 世人을 멀리 여의고, 孤高하게 錫杖을 매달고는 方丈室에 住하였다. 六塵인 客觀이 모두 사라지고, 妙한 道를 乾竺인 佛經에서 탐구하고, 三昧가 성취되어 眞乘을 祇樹給孤獨園인 사원에서 闡揚하였다. 금강산과 太白山은 慈航의 首尾와 같고 黃壤은 활의 모양과 같이 생겼다. 높이 寶鏡을 달아 놓았으므로 부처님과의 간격이 없어서 過去의 如來가 現世에 계셔서 한결같이 法雨를 뿌려 平等하게 적셔주니, 兵火가 다시 닥쳤으나 저절로 消滅되었다. 오래전부터 이미 스님의 법의 비가 雲霧에 휩싸였으나, 道岬寺는 龍宮과 같이 우뚝 솟아 있다. 도선국사의 古碑에 이끼가 끼어 드디어 거북의 머리는 결락되었다. 이를 보는 스님들마다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푸른 山은 내려다 보고 슬퍼하였다. 비록 태양과 같이 빛나는 偉大한 업적이 있더라도, 만약 그것을 傳해 주는 行蹟碑가 破缺되면어찌 後人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마치 새의 날개가 자라서 멀리 날아가듯이일찍이 老宿(妙覺和尙 등)들이 建物을 보수하였으나, 상당 기간 동안 스님의 碑를 다시 세우지 못하였는데, 鸞새와 鳳새가 날아가듯 舊碑를 치우고 新碑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 때 그의 徒弟인 玉習大師가 각 사찰로 다니면서 贊助를 구하는 한편, 信徒들로부터 募金하여 무려 3년이 지나는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다시 京都로 나를 찾아와 碑文을 재촉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黃絹幼婦外孫虀臼”의 碑文을 지을만한 文章力이 부족하지만, 玉習上人의 간곡한 청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銘하여 이르기를 훌륭하신 스님만의 神秘한 境地! 어느 누가 그 境地를 따르겠는가! 分別知解 그대로는 생각도 말라! 識心分別 쉬지 않곤 알수가 없다! 글자새긴 碑文이야 있든 없든간 道詵國師 크신 業蹟 損益이 없네! 無常光陰 흐를수록 더욱 높아서 千萬劫이 지나가도 옛이 아니네!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인 李景奭은 비문을 짓고 正憲大夫 禮曹判書 兼知經筵 春秋館事 弘文館 提學 世子右賓客인 吳竣 은 비문을 쓰며 資憲大夫 刑曹判書 兼知義禁府 春秋館事 藝文館 提學 世子右賓客 五衛都摠府 都摠管인 金光煜 은 篆額을 썼다. 崇禎 丙子年 4월 일에 始役하여 癸巳年 4월 일에 세우다. 【 左面記 】 영암과 康津 兩邑의 중간에 한 山이 있는데 그 이름이 月出山이다. 산의 서쪽에 큰 伽藍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절 뒤쪽에 古碑가 있는데, 세운지 오래되어 돌이 떨어지고 글자가 磨滅되어 거의 글자를 判讀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 이에 玉習이라는 스님이 慨嘆한 나머지 분발하여 六環杖을 짚고 멀리 京師(서울)로 와서 縉紳들을 찾아가서 그 사유를 설명하고 비문을 請託하였으니 白軒 李相國은 비문을 짓고, 尙書인 吳竣은 비문을 썼으며, 漢城府尹인 金光煜은 篆額을 썼으니 國內에 제일가는 大家들이므로 더 이상 훌륭한 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9월에 드디어 礪山 동쪽에서 採石하였다. 이 때 호남도백이 礪山,益山,龍安縣 등의 守令 들에게 役夫의 동원을 지시하여, 수령들은 한결같이 농번기를 避하여民力을 동원하여 協助하였다. 총림의 스님들도 시골 벽촌 어려운 집을 돌아다니면서 佛事에 동참할 것을 권장하였다. 비록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모두 주머니를 털고, 곡식 전대를 비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와같이 적극 추진하여 이듬해 초 여름에 礪山에서 採石한 비석 돌을 黃山 船泊場까지 人力으로 끌어서 운반하고, 거기서부터 배에 싣고 加林郡 南塘浦와 群山 七山浦를 거쳐 西湖 앞바다에서 下船하였다. 그로부터 7개월만에 石工일이 끝났는데, 龜趺와 螭首가 각각 그 精妙함을 드러내어 절 뒤쪽 北便 언덕위에우뚝하게 서서 위엄을 자랑하였다. 天順年間에 名僧 守眉和尙이 도갑사 法堂을 중창하였으나, 도선국사의 碑는 다시 세울 겨를이 없었다. 그 때 한 젊은 스님이 수년 동안 계획하여 數百年 동안 이룩하지 못하였던 前碑를 빛내기 위하여 다시 後碑를 세움으로써 永遠無極토록 후세에 보여주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와같이 빠르게 이루어졌는가! 깊이 생각해보니, 국사께서는 東國의 神人이시다. 스님께서는 그 태어난 과정이 人道가 아니라 하여 父母가 낳자마자 숲속에 가져다 바위 위에 버리고 돌보지 아니하였는데, 많은 비둘기들이 날아와 날개로 덮어서 보호한 異蹟이 있었다. 지금도 가져다 버렸던 바위 위에 옛 자취가 마치 어제의 일과 같이 完然하게 남아 있어 그 마을 이름을 鳩林村이라 하고, 아이를 버렸던 바위를 國師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이 때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나이 童年이 되기 전에 月南寺에서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唐나라에 들어가 一行禪師를 친견하고 地術에 대한 그의 法을 모두 전해 받았다. 그 후 곧 귀국하여 一丘 一水의 名寺와 巨塔이 국사가 占卜하여 창건한 곳이 아님이 없을 정도였다. 이미 지나간 千百年의 옛 일과, 아직 다가오지 아니한 千百年의 未來의 일을 소상하게 마치 눈 앞에 羅列된 것을 보듯이 미리 알았으니, 어찌 佛敎에서 이른바 上乘을 초월한 신비하고도 神秘하신 스님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신라와 百濟 이후로 神僧이라는 호칭을 받은 이는 元曉와 義相같은 스님이 실로 한두 분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傑然하다고 稱할만한 스님은 손가락을 다시 꾸부릴 정도(5名 이내)도 못된다고 하였다. 늙어서 白雲山 靈珠莊에서 입적하였는데, 시체를 石龕中에 봉안하였다. 평소 스님에 대한 行蹟은 崔惟淸이 지은 光陽 玉龍寺 先覺國師碑에 자세히 실려 있다. 通訓大夫 弘文館 副修撰 李壽仁은 左記를 짓고 成均進士 金時暕은 글씨를 썼다.

國師 道詵碑 陰銘 【 陰 記 】

有明朝鮮國 全羅道 靈巖郡 月出山 道岬寺 國師道詵碑 陰銘 幷序 영암군에 月出山이 있는데, 산이 매우 奇異하고 秀麗하다. 一道國師 도선스님은 영암군 출신이다. 산 속에 절이 있는데 이름은 道岬寺이니 世人들이 전해 오기를 도선국사의 창건이라고 한다. 明나라 天順元年 丁丑年에 信眉와 守眉 두 스님이 合心하여 중창하고, 藝文提學 尹士昀이 重創記를 지었다. 天順 丁丑年은 今年 壬辰年과는 1백 9십 년의 相去가 된다. 寺中에 도선국사의 碑가 있으나, 언제 처음으로 세웠는지는 상고할 수가 없다. 비가 이미 마멸되어 玉習大師가 다시 세웠는데, 白軒 李相國으로부터 碑銘을 받고, 習師가 또 나(鄭斗卿)에게 碑陰(陰記)을 지어달라고 청탁하였다.나는 항상 天中記를 보는데, 그 내용은 鳩林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鳩林志인 것이다. 天中記를 통하여 天下의 사실들을 들은지 이미 오래되었다. 도선국사의 出生過程이 이미 奇異함을 보였으며또 그의 이름이 天下에 두루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지혜가 明敏하여 未來에 고려 太祖가 後三國을 통일하여 5백년간 社稷이 鞏固할 터임을 알았으니, 이른바 天眼을 통득한 스님을 어찌 地術 一面만을 精通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또한 奇異하시다. 이를 銘하여 이르되, 靈巖名山 月出山의 奇巖怪石은! 생각컨대 이 靈山이 神人을 낳다 降神으로 태어나신 그 人物이여! 그 人物은 다름아닌 道詵國師네! 國師께선 처음으로 태어나실 때 一般 사람 태어남과 같지 않았네! 빨래하던 어머니가 오이를 먹고 그로부터 姙身하여 태어나시다! 낳자마자 숲속에다 던져버리니 비둘기가 날아와서 날개로 덮다! 이를 보곤 그의 父母 異狀히 여겨 後悔하고 다시 거둬 養育하였다! 국사께선 新羅時代 태어났지만 偉大하신 그 業蹟은 지금도 生生 버려졌던 그 바위는 國師巖이고 태어났던 그 마을은 鳩林村이네! 비둘기가 날아와서 날개로 덮어 周의 始祖 后稷과 다름이 없네! 기러기가 모여와서 保護했으니 그 因緣을 비교하면 다름이 없네! 神僧이라 불리우는 스님 있으니 그가 바로 다름 아닌 道詵國師네! 偉大하신 高麗初의 도선국사는 民族위해 태어나신 龍象이시다! 어떤 分野 學術이던 無不通이나 그중에서 뛰어남은 地術이라네! 唐皇帝가 現夢받고 幽宅을 위해 禮를갖춰 使臣보내 招聘해가다! 中國가서 皇帝위해 占卜해주고 一行禪師 親見하고 地術을 받다! 스님께서 中國에서 受學한 다음 마음가득 체우고서 歸國하였네! 歸國 후엔 松嶽터를 살펴 보고서 五百年의 都邑터라 地相을 보다! 투철하신 스님 法眼 비길데 없어 百千年을 꿰뚫어서 밝게보시다! 朝夕禍福 吉凶이란 알 수 없지만 스님께선 慧眼으로 미리 아시네! 우리나라 地形地勢 살펴보시고 그 形局이 배 모양과 같다하시다! 鎭硾없이 뜨는 배는 危險을 招來 停泊커나 航海함에 操縱을 잃다! 地形이란 太初부터 定하여진것 그에 맞춰 調律함이 地術이라네! 해가 뜨는 동쪽나라 우리 國土는 三千里의 금수강산 半萬年歷史! 會寧에서 濟州까지 멀고 넓지만 道詵國師 두루두루 살펴보았네! 절을 짓고 塔을 세운 그 功德으로 높은 嶽과 낮은 溪川 鎭壓하였다! 月出山의 東쪽에다 절을 지으니 그 이름이 높고 빛난 道岬寺라네! 靈岩 땅의 月出山엔 달이 머물고 스님께선 이곳에서 태어나시다! 天皇峰을 主峰으로 南쪽을 向해 도선국사 이 자리에 절을 세웠네! 스님께선 解脫하여 떠나셨지만 欽慕하던 그 마음은 가실 수 없네! 절의 北쪽 언덕 위에 비를 세워서 거룩하신 스님 業蹟 세겨두었네! 그 때 세운 그 碑文은 判讀이 不能 門徒들이 힘을 모아 다시 세웠네! 李相國이 撰述하신 그 碑文이여! 絶妙하고 格調 높은 名文이로다! 거듭 다시 누를 끼쳐 글을 지어서 碑文이어 碑陰銘을 짓는 바이다!

通訓大夫 弘文館校理 兼知製敎 鄭斗卿은 글을 짓고, 成均 進士 金棐는 글씨를 쓰고, 成均 進士 金時暕은 篆題를 썼다. 崇禎 丙子年 4월 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癸巳年 4월 일에 세우다. 비의 높이는 18자이고 너비는 9자이다.

※ 以下 芳名帙에 대해서는 번역은 생략하고, 註를 달기 위하여 原文 그대로 添付해 둔다.

麟坪大君 綏祿大夫 永安尉 洪柱元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金尙憲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李敬輿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鄭太和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金堉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李時白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具仁垕 資憲大夫 吏曹判書 金集 輔國 崇祿大夫 兵曹判書 元斗杓 資憲大夫 吏曹判書 沈之源 資憲大夫 吏曹判書 林▨ 正憲大夫 戶曹判書 李時昉 資憲大夫 吏曹判書 ▨▨▨ 資憲大夫 兵曹判書 朴遾 資憲大夫 刑曹判書 南銑 崇政大夫 工曹判書 李澥 資憲大夫 刑曹判書 尹履之 嘉善大夫 吏曹參判 尹順之 嘉善大夫 大司憲 李一相 喜善大夫 大司諫 洪命夏 嘉善大夫 大提學 蔡裕後 嘉善大夫 開城留守 吳挺一 嘉善大夫 平安巡察使 許▨ 嘉善大夫 慶尙巡察使 趙啓遠 通政大夫 全羅巡察使 沈▨澤 嘉善大夫 全羅巡察使 李曼 通政大夫 弘文館副提學 愼天翊 通政大夫 吏曹參議 南老星 通政大夫 戶曹參議 鄭知和 通政大夫 戶曹參議 金佐明 通政大夫 兵曹參議 李行進 通政大夫 羅州牧使 柳碩 通訓大夫 羅州牧使 鄭之虎 通訓大夫 京畿都事 李尙眞 通訓大夫 正言 朴承健 通訓大夫 綾州牧使 郭聖龜 嘉善大夫 訓練大將 李浣 資憲大夫 訓練大將 申浚 嘉善大夫 統制使 具仁墍 嘉善大夫 海城君 金汝水 嘉善大夫 全羅兵使 柳廷益 嘉善大夫 平安兵使 朴省吾 嘉善大夫 慶尙兵使 李元老 嘉善大夫 都總官 南斗柄 折衝將軍 全羅兵使 許東昱 折衝將軍 全羅右水使 鄭檝 通訓大夫 益山郡守 金壽昌 通訓大夫 軍器僉正 曹行立 通訓大夫 靈巖郡守 李▨ 通訓大夫 靈巖郡守 李行源 通訓大夫 靈巖郡守 朴廷蓍 通訓大夫 靈巖郡守 李惟碩 文科壯元 朴世模 通訓大夫 行戶曹佐郞 李秞 禪宗大禪師 太能 禪宗大禪師 太浩 禪宗大禪師 覺性 禪宗大禪師 明照 碩德 戒環 大功德住 一俊 禪師 敬悅 京內人禪師 守初 嘉善 丁允慱子 振岌 折衝將軍 龍驤尉 副司果 金義孝 折衝將軍 咸應元 折衝將軍 李應已 同知 趙雙平 子尉 文承南 折衝將軍 金大禮 願碑禪師 道安 龍驤尉 副司果 李德一 晋州後人 姜承業 叅奉 盧俊 司果 鄭應信 禪師 行元 應全 克澄 妙兼 金秀東 本寺禪師 學厚 應均 唯克 修應 處黙 天仙 道行 德裕 玄益 忠信 雪湖 義正 義仁 釋超 釋敏 性熙 僉知判事 覺明 僉知判事 德仁 僉知判事 印岑 時任住持 尙全 持寺 仙烈 三綱 性一 持殿 智楫 首僧 玉心 看事 呂明 嘉善 崔應眞 司果 李千立 司果 周香南 司果 金望泰 司果 安孝悌 司果 蔡得南 司果 金大海 司果 林靑亢 司果 金禮龍 司果 朴顯昌 司果 千靑雲 司果 卞仁得 羅州人 李南 閑良 金麗成 副司果 文千進 副司果 文元立 副司果 金鐵鼎 司果 李夢龍 淑夫人 愛環 副司果 李忠南 司果 金皝延 司果 許良 司果 張翼 司果 張▨ 同知 張禮奉 閑良 金長云 司果 金季先 司果 千承秋 尸 + 立 ▨士 周春鶴 閑良 姜士南 司果 李仁龍 叅奉 徐孝立 閑良 趙年守 閑良 金商潤 金成虎 成龍 七龍 奉立 已云 勝峻 哲元 善敬 哲輝 別座 普宣 別座 熙尙 南平 性林 靈巖 呂環 靈巖 處元 刊刻 羅州 太尙 南平 愼年 折衝將軍石工 曹萬龍 ▨有 大什 道一 尙玲 太冏 思敏 邦淳 尙訥 儀兼 性悟 惠熙 贊冾 釋梅 文益 禪▨ 來往僧 宗允 趙萬石 卞片金 礪山人 朴時峻 車末南 車萬立 朴應 趙古公 曹氏近介 李德全 朴春陽 全州人 黃千 金千立 金乭屎 金水命 李信楊 崔悌吉 金仁 崔汗同 金善益 金淡 朱得玄 朱得仁 金者斤卜 李丑矣 陳大均 劉悌復 吳唜生 冶匠 金唜生 黃靑雲 全海奉 韓仇金 石工 曹繼洪 曹繼黃 金尙卿 淸陰 愼獨齋 兩先生 姓諱何許 不道者 剝滅戊辰 十月 金箕昶 改刊


판독문

  • 출처: 이지관,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朝鮮篇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18쪽.

靈巖 道岬寺道詵守眉兩大師碑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篆 題)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幷 序 夫以金山建刹永埀頭陀之名河水浮盃猶傳和尙之號矧乎玄關啓鍵忝造化而通神紺宇開場擁休祥而流福寔合貞珉之」 昭揭敢緩顯刻之重新國師法諱道詵新羅朗州人也母曰崔氏家于聖起山之僻村生於眞德王之季歲靑瓜孕秀同巨跡之」 感心白足禀精鍾淑氣而拔俗神鳩護持於叢竹靈鷲覆翼於平林傳貝葉於月南年未舞象隨使槎於海內運際攀龍歷踐禹」 貢之山川親覩唐家之文物接延英之溫諭帝夢金人卜大行之新陵神授白馬斯盖天賦之特異豈但地術之偏能萬乘加國」 師之稱一行有天人之許金箱玉笈究幽經而貫穿赤縣黃圖窮法眼而纖悉乞東還而振策演北學以濟時察地形之類舟鎭」 其首尾創伽藍而設塔遍於邇遐天花絶一點之緣嶽松基半千之業惟兹月出之道岬不啻日觀之奇峯山疊巒重宛千佛之」 列像巖危石動知一同之著名魚口想文殊之遠尋龍淵聞普渡之來住雲窓霧戶依俙十二之樓潮梵風幡輝暎三千之界意在利益民物期使鞏固邦基高謝世人之塡門逈臨方丈而掛錫六塵旣息探玅道於竺乾三昧斯臻闡眞乘於祇樹金剛太白」 擧屬慈航黃壞穹蒼遙懸寶鏡如來不隔過去猶存法雨一施而普霑兵火再逼而自滅浩刼雲衞獨龍宮之巍然古碑烟侵致」 龜頭之剝落緇流興歎碧嶂含愁縱靈蹟之流傳赫若前日倘銘辭之缺闕曷示後人鳥革翬飛曾賴老宿之改搆鸞翔鳳翥可」 廢舊鑱之更修其徒玉習夙奮禪林廣募檀越三經歲籥罄至誠而愈堅重到京都索拙文而彌切雖乏幼婦之語寧孤上人之」 祈銘曰獨神乎神孰覺其覺 難以知知難以識識 碑無碑有何損何益 久而愈尊今復如昔」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李 景奭撰 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 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 世子右賓客吳竣書 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春秋館事藝文館提學 世子右賓客五衞都摠府都摠管 金光煜篆 崇禎丙子四月日始癸巳四月日立 介於靈康兩邑之間有一山焉其名曰月出山之西有大伽藍世傳新羅國師所創建之地也寺後古有碑 世久剝刓殆不能識字有僧玉習者慨然發奮携」 一錫杖遠走京師辯造縉紳而請焉白軒李相國修其辭 尙書吳公書其碑漢城尹金公篆其額選一國宗匠鉅筆而無以尙矣某歲九月遂伐石於礪山之」 東於是 湖南伯曁礪益龍安數邑守宰咸以農隙出民力以助之叢林釋徒窮鄕氓之募善緣者莫不傾資虛橐 奔走趍事翌年初夏那運於黃山船泊所」 舟于加林郡南塘浦歷群山七山浦而泊于西湖前洋閱七月而工吿斷手龜跌螭首各臻其妙而屹立於寺後之北塘天順年間有名僧守眉和尙重建寺之法宇而碑則未遑焉眇爾一小禪擘畫於數載之間克擧數百年所未遑之事而光前耀後眎無極則何其捷歟窃念國師東國之神人也其生也非人道而家人棄而不擧則有群鳩覆翼之異至今巖石上舊迹宛然如昨村之號以鳩林巖之名以國師自兹始焉年未成童落髮于月南寺入唐尋叅一行禪」 師盡傳其法焉及其還 而東也名寺鉅塔一丘一水無非國師剏建指點之所前乎千百歲之己往後乎千百歲之方來昭然森列 眼前則豈非釋氏所謂超」 上乘而神乎神者邪羅濟以來號以神僧者如元曉義相輩固非一二而稱其傑 然者指不可以再屈焉老而示寂于白雲山靈珠莊在石龕中而平日行蹟具載崔惟淸所撰碑文云 通訓大夫弘文館副修撰李壽仁撰 成均進士金時暕書 (裏面) 國師道詵碑陰銘 有明朝鮮國全羅道靈巖郡月出山道岬寺國師道詵碑陰銘幷 序 靈巖郡有月出山山之奇秀盖一道國師道詵郡人也山有寺曰道岬世傳師所創大明天順元年丁丑有信眉守眉兩師者重剏焉藝文提學尹公士呁爲之記天順丁丑去今壬辰一百九十有餘年矣寺有詵師碑不知立始何代碑已磨滅有玉習師者重刻焉白軒李相國爲之銘習師又請余志碑陰余常見天中記記鳩林鳩林志天中聞天下久矣詵師厥生旣異又名聞天下智知未來成麗祖一統五百載之基所謂通釋氏天眼者豈可以一術稱哉亦異矣銘曰月出巖巖惟嶽降神降神伊何生師道詵師之始生異諸常人母漂食瓜歆而有身及生棄之鳩覆翼之見而異之收之育之師生新羅事傳至今巖曰國師里曰鳩林鳥覆后稷寒氷之寘惟此鳩林厥異何異古有神僧詵師非是猗歟詵師龍象之傑術無不通靑鳥其一感夢唐帝有詔來徵入于中國一行是承師得妙訣複還東國爰相松嶽載祀五百師有法眼洞觀▨千吉凶隆替知于未然師曰東國地形如舟舟不有鎭其無漂流地形亦然鎭其可巳東國之土數千餘里無遠無邇師無不歷創寺建塔以鎭嶽瀆月出有寺寺名道岬月出之山師之所生道岬之寺師之所營師雖去矣烏得無情寺有片石記師之跡今巳剝落其徒復刻相 國是譔絶妙之辭重虛其請續銘于碑 通訓大夫 弘文館校理兼知製 敎鄭斗卿撰 成均進士金棐書 成均進士金時暕篆 崇禎丙子四月日始癸巳四月日立長十八尺廣九尺 麟坪大君 綏祿大夫永安尉洪柱元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金尙憲 大匡輔國崇祿大 夫議政府領議政李敬輿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鄭太和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 議政金堉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李時白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具仁垕 資憲大夫吏曹判書金集 輔國崇祿大夫兵曹判書元斗杓 資憲大夫吏曹判書沈之源 資憲大夫 吏曹判書林墰 正憲大夫戶曹判書李時昉 資憲大夫吏曹判書▨▨▨ 資憲大夫兵曹判書朴遾 資憲大夫刑曹判書南銑 崇政大夫工曹判書李澥 資憲大夫刑曹判書尹履之 嘉善大夫吏曹   叅判尹順之 嘉善大夫大司憲李一相 喜善大夫大司諫洪命夏 嘉善大夫大提學蔡裕後 嘉善 大夫開城留守吳挺一 嘉善大夫平安巡察使許▨ 嘉善大夫慶尙巡察使趙啓遠 通政大夫全羅 巡察使沈▨澤 嘉善大夫全羅巡察使李㬅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愼天翊 通政大夫吏曹叅議 南老星 通政大夫戶曹叅議鄭知和 通政大夫戶曹叅議金佐明 通政大夫兵曹叅議李行進 通 政大夫羅州牧使柳碩 通訓大夫羅州牧使鄭之虎 通訓大夫京畿都事李尙眞 通訓大夫正言朴 承健 通訓大夫綾州牧使郭聖龜 嘉善大夫訓鍊大將李浣 資憲大夫訓鍊大將申浚 嘉善大夫 統制使具仁墍 嘉善大夫海城君金汝水 嘉善大夫全羅兵使柳廷益 嘉善大夫平安兵使朴省吾 嘉善大夫慶尙兵使李元老 嘉善大夫都總官南斗柄 折衝將軍全羅兵使許東岦 折衝將軍全 羅右水使鄭檝 通訓大夫益山郡守金壽昌 通訓大夫軍器僉正曹行立 通訓大夫靈巖郡守李 通訓大夫靈巖郡守李行源 通訓大夫靈巖郡守朴廷蓍 通訓大夫靈巖郡守李惟碩 文科壯元 朴世模 通訓大夫行戶曹佐郎李秞 禪宗大禪師太能 禪宗大禪師太浩 禪宗大禪師覺性 禪 宗大禪師明照 碩德戒環 大功德住一俊 禪師敬悅 京內人禪師守初 嘉善丁允愽子振岌  折衝將軍龍驤尉副司果金義孝 折衝將軍咸應元 折衝將軍李應已 同知趙雙平子尉文承南 折衝將軍金大禮 願碑禪師道安 龍驤尉副司果李德一 晋州後人姜承業 叅奉盧俊 司果鄭 應信 禪師行元 應全 克澄 妙兼 金秀東 本寺禪師學厚 應均 唯克 修應 處默 天仙 道行 德裕 玄益 忠信 雪湖 義正 義仁 釋超 釋敏 性熙 僉知判事覺明 僉知 判事德仁 僉知判事印岑 時任住持尙全 持寺仙烈 三綱性一 持殿智楫 首僧玉心 看事 呂明 嘉善崔應眞 司果李千立 司果周香南 司果金望泰 司果安孝悌 司果蔡得南 司果 金大海 司果林靑亢 司果金禮龍 司果朴顯昌 司果千靑雲 司果卞仁得 羅州人李南 閑良金麗成 副司果文千進 副司果文元立 副司果金鐵鼎 司果李夢龍 淑夫人愛環 副司果 林孝元 副司果林悌元 閑良李孝夏 僉知金琴從 司果南順立 司果全大祝 司果李大述 司果李忠南 司果金皝延 司果許良 司果張翼 司果張▨ 同知張禮奉 閑良金長云 司果 金季先 司果千承秋 㞐士周春鶴 閑良姜士南 司果李仁龍 叅奉徐孝立 閑良趙年守 閑 良金商潤 金成虎 成龍 七龍 奉立 已云 勝峻 哲元 善敬 哲輝 別座普宣 別座熙 尙 南平性林 靈巖呂環 靈巖處元 刋刻羅州太尙 南平愼年 折衝將軍石工曹萬龍 ▨有 大什 道一 尙玲 太冏  思敏 邦淳 尙訥 儀兼 性悟 惠熙 賛冾 釋梅 文益 禪 ▨ 來往僧宗允 趙萬石 卞片金 礪山人朴時峻 車末南 東萬立 朴應录 趙古公 曹氏近介 李德全朴春陽 全州人黃千 金千立 金乭屎 金水命 李信楊 崔悌吉 金仁 崔汗同 金善益 金淡 朱得玄 朱得仁 金者斤卜 李丑矣 陳大均 劉悌復 吳唜生 冶匠金 唜生 黃靑雲 全海奉 韓仇金 石工曹繼洪 曹繼黃 金尙卿 淸陰愼獨齋兩先生姓諱何許不道者剝滅戊辰十月金箕昶改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