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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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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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
한자 | 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
이칭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
주소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로 271-15(상교리)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6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찬자 | 김정언(金廷彦) |
서자 | 장단열(張端說) |
각자 | 이정순(李貞順)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찬유(璨幽) |
건립연대 | 975년(광종 26) |
승탑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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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지(高達寺址)에 있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 869-958)의 탑비.
내용
개요
귀부(龜趺)는 높이 0.91m, 길이 3.21m, 이수(螭首)는 높이 1.09m, 너비 2.33m.[1] 비는 일찍이 무너져 비신(碑身)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고달사지(高達寺址)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2]
원종대사(元宗大師)는 융제(融諦)와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855-923)의 제자로, 고달사(高達寺)에서 봉림산문(鳳林山門)의 선풍을 크게 떨쳤다.[3] 원종대사는 958년(광종 9) 입적하였고, 탑비는 975년(광종 26)에 조성되었으며, 탑은 977년(경종 2)에 조성되었다.[4] 전액에는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라고 쓰여있다.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장단열(張端說)이 썼으며, 이정순(李貞順)이 글씨를 새겼다. 비문은 정간(井間)을 치고 글자를 새겼으며 42행에 1행 70자 내외의 구성을 가진 대형 비이다.[5] 글씨는 해서체로 쓰여졌다.
귀부(龜趺)의 거북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이수(螭首)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6]
비문
앞면
비문의 내용은 원종대사(元宗大師)의 탄생과 심희(審希)에게 출가하여 당(唐)에 가서 투자대동(投子大同)에게 수학하고, 귀국하여 태조를 만나고, 혜목산(慧目山)에서 선풍을 진작하다 혜종과 정종의 귀의를 받고 광종대에 국사(國師)로 책봉되어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7]
뒷면
음기(陰記)에는 고달원(高達院)이 희양원(曦陽院), 도봉원(道峰院)과 함께 3대 사원(寺院)이 된 내용과 문하제자로 5백 여인이 있음을 말하고 4인의 삼강직(三綱職)[8]과 각자(刻字), 탑명(塔名), 송장(送葬), 재(齋), 수비(修碑), 장지필연(掌紙筆硯), 석장(石匠) 등 구체적인 탑비 건립 직책을 열거하였다.[9]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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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두산백과
-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문화재청
- ↑ 김영태, "봉림산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금석문
-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문화재청
-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 종합정보시스템
- ↑ 사찰에서 대중을 통솔하여 규칙을 유지하는 세 직책인 상좌(上座)·사주(寺主)·도유나(都維那)를 이른다. 이지관, 고달사지탑비 삼강전 주
-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 종합정보시스템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