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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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한자 軍威 麟角寺 普覺國師碑文
승려 나옹(懶翁)
찬자 이색(李穡)
서자 권중화(權仲和)



번역문

  • 출처: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사4, 가산문고, 1997.[1]


禪覺王師之碑 (題額)

고려국(高麗國)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 시선(諡禪) 각(覺) 탑명(塔銘)과 아울러 서문 전조열대부(前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중대광(重大匡) 한산군(韓山君)예문관사(藝文館事) 겸성균대사성(兼成均大司成 ) 신(臣) 이색(李穡)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상호군(上護軍) 제점(提點) 서운관사(書雲觀事) 신(臣) 권중화(權仲和)는 교지(敎旨)에 따라 단사(丹砂)로 전액(篆額)과 글씨를 쓰다

현릉(玄陵)께서 재위(在位)한 지 20년만인 경술(庚戌) 9월 10일 스님을 개경(開京)으로 영입(迎入)하여, 16일에 스님이 주석하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양종(兩宗) 오교(五敎)에 속한 제산(諸山)의 납자(衲子)들이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 고시장을 열었는데 스님도 나아갔으며, 임금께서도 친히 행차(幸次)하여 지켜 보았다. 스님은 염향(拈香)을 마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말씀하기를 “금고(古今)의 과구(窠臼)를 타파하고, 범성(凡聖)의 종유(蹤由)를 모두 쓸어버렸다. 납자의 명근(命根)을 베어버리고, 중생의 의망(疑網)을 함께 떨쳐 버렸다. 조종(操縱)하는 힘은 스승의 손아귀에 있고, 변통(變通)하는 수행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있다. 삼세(三世)의 부처님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가 교화 방법은 동일한 것이니, 이 고시장에 모인 모든 스님들은 바라건대 사실대로 질문에 대답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모두 차례로 들어가 대답하되 긴장된 모습으로 몸을 구부려 떨면서 진땀을 흘렸다.그러나 모든 응시자의 대답은 맞지 아니하였다. 혹자는 리(理)에는 통하였으나 사(事)에는 걸리고, 어떤 이는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다가 일구(一句)의 질문에 문득 물러가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공민왕의 얼굴 빛이 언짢은 듯이 보였다. 환암혼수선사(幻庵混脩禪師)가 최후에 와서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에 대하여 낱낱이 문답하였다.

이 공부선(功夫禪) 고시(考試)가 끝나고 스님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갔다. 신해년(辛亥年) 8월 26일 공부상서(工部尙書)인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친서(親書)와 직인과 법복과 발우(鉢盂) 등을 보내어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칭(法稱)과 함께 왕사로 책봉하였다. 이어 송광사(松廣寺)는 동방(東方) 제일의 도량이므로 왕명으로 거주토록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가을에는 지공(指空)스님이 지시한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서 주석하라는 기별(記莂)이 우연히 생각나서 곧 회암사(檜嵒寺)로 이석(移錫)하려 하였는데, 때마침 왕의 부름을 받아 회암사 법회(法會)에 나아갔다가 여기에 주거(住居)해 달라는 청을 받았다. 스님이 이르기를 “선사(先師)인 지공스님께서 일찍이 이 절을 중창하려고 계획하였는데 병화(兵火)로 불타버렸으니 감히 그 뜻을 계승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에 대중 스님과 협의하여 전당(殿堂)을 확장하여 공사(工事)가 모두 끝나고 병진년(丙辰年) 4월에 크게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회향하였다. 이 때 대평(臺評)이 유생(儒生)의 입장에서 불교의 왕성(旺盛)함을 시기하여 말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 청신사(淸信士)와 청신녀(淸信女)들의 오고 감이 계속 이어져 밤낮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아혹은 지나치게 맹신(盲信)하여 생업(生業)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교지(敎旨)를 내려 나옹스님을 서울과 멀고 벽지(僻地)인 형원사(瑩原寺)로 이주(移住)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출발을 재촉하여 가던 도중에스님이 마침 발병(發病)하였다. 출발 당시 가마가열반문(涅槃門)을 통과할 때 모든 대중(大衆)이 무슨 이유인지를 의심하면서 실성 통곡하므로, 스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말하기를 “노력하고 또 거듭 노력하여 나로 인하여 슬픔에 잠겨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가다가 마땅히 여흥(驪興)에서 그칠 뿐이다”라고 하였다. 한강(漢江)에 이르러 호송관(護送官)인 탁첨(卓詹)에게 이르기를 “내 병세가 심하니 뱃길로 가자” 하여 배(주(舟))로 바꾸어 타고 7일간 소류(遡流)하여 여흥에 이르렀다. 이 때 또 탁첨에게 부탁하기를 “몇일만 머물러 병을 조리하고 떠나자”고 하니 탁첨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신륵사(神勒寺)에서 머물고 있는데 5월 15일에 탁첨이 또 출발하기를 독촉하므로 스님께서 이르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 하고, 이 날 진시(辰時)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군민(郡民)들이 바라보니 오색(五色) 구름이 산정(山頂) 에 덮여 있었다.

화장(火葬)이 끝나고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비장(秘藏)한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스님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를 태운 배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 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스님이 입적한 사실을 조정(朝廷)에 보고하니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추증하고, 신(臣) 색(穡)에게는 비문(碑文)을 짓고 신(臣) 중화(仲和)로 하여금 단사(丹砂)로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게 하였다.

신(臣)이 삼가 스님의 행적을 살펴보니, 휘는 혜근(惠勤)이고 호는 나옹(懶翁)이며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였다. 세수는 57년을 살았고 법랍은 38하였다. 고향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이며, 속성은 아씨(牙氏)이다. 아버지의 휘는 서구(瑞俱)이니 벼슬은 선관령(膳官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니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어머니 정씨가 꿈에 금색(金色) 새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쪼다가 오색(五色)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여 연우(延祐) 경신년(庚申年) 1월 15일에 탄생하였다. 나이 겨우 20살 때이웃에 사는 친한 벗이 사망하므로, 슬픔에 잠겨 부로(父老)들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 모두 말하되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하여 슬픔만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으로 달려가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몸을 던져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요연선사가 이르되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出家)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고, 중생을 이익(利益)케 하고자 함입니다”라 하고 또 스님의 지도를 청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온 정체가 무슨 물건인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능히 말하고 능히 듣고 능히 여기까지 찾아온 바로 그 놈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하였다. 요연(了然)스님이 말씀하되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알지 못하니, 다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묻고 배우라”고 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甲申年)에 회암사로 가서 주야로 홀로 앉아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참방(參訪)하고 유학할 뜻을 굳히고, 출국하여 무자년(戊子年)3월 연도(燕都)에 도착하여 지공(指空)스님을 참방하고 법(法)을 물었는데 서로간의 문답이 계합(契合)하였다. 10년 경인(庚寅) 정월(正月)에 지공스님이 대중을 모아놓고 법어(法語)를 내리니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나, 혜근(惠勤)이 대중 앞에 나와서 몇 마디의 소견(所見)을 토출(吐出)한 다음, 삼배(三拜)하고 물러나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백팔대(百八代) 조사(祖師)이다. 그 해 봄에는 남쪽으로 강절(江浙) 지방을 두루 순례하고 8월에는 평산처림(平山處林)을 친견하였더니, 평산(平山)이 묻기를 “나에게 오기 전에 누구를 친견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서천의 지공스님을 만나 뵈었는데 일용천검(日用千劒)하라 하더이다”라 하였다. 평산이 이르기를 “지공천검(指空千劒)은 그만두고 너의 일검(一劒)을 한 번 보여 보아라”고 하였다. 혜근이 좌구(坐具)로 평산을 덮여 씌워 끌어 당겼다. 평산은 선상(禪床)에 거꾸러져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혜근이 이르되 “나의 이 칼은 능히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또한 능히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라고 하면서 평산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 때 평산은 설암(雪嵒)이 전수(傳授)한 급암종신(及庵宗信)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신물(信物)로 주었다.

신묘년(辛卯年) 봄에는 보타낙가산(寶陁洛迦山)에 이르러 관세음보살상에 예배하고, 임진년(壬辰年)에는 복룡산(伏龍山)에 이르러 천암(千嵒)스님을 친견하였다. 천암은 그 때 마침 일천여명의 납자(衲子)를 모아 놓고 입실(入室) 자격고시(資格考試)를 열고 있었다. 이 때 천암이 혜근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혜근이 대답하니, 천암이 이르기를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기 전에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하니, 혜근이 이르되 “오늘은 4월 2일입니다”라 하니, 천암이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북방(北方)으로 돌아가서 연도(燕都) 법원사(法源寺)에 있는 지공스님을 두 번째로 친견하였다. 이 때 지공은 법의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신물로 전해 주었다. 이에 다시 연대(燕代)의 산천(山川)을 두루 돌아 보았으니, 소연(蕭然)한 한 한가로운 도인(道人)으로써 그 이름이 원조(元朝)의 궁내(宮內)에까지 들렸다. 을미년(乙未年) 가을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명을 받들어 대도(大都)의 광제사(廣濟寺)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병신년(丙申年) 10월 15일 지공(指空)으로부터 수법(受法)한 기념법회(紀念法會)를 가졌는데, 순제는 원사(院使)를 보내어 축하하였고,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폐백(幣帛)을 하사하였으며, 황태자(皇太子)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象牙拂子)를 가지고 와서 선사하였다. 혜근스님이 가사 등의 선물을 받고 대중에게 묻기를 “담연공적(湛然空寂)하여 본래부터 일물(一物)도 없는 것이다. 이 가사의 휘황하고 찬란함이여! 이것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하니, 이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스님께서 천천히 말씀하시기를 “구중궁(九重宮) 금구중(金口中)에서 나왔느니라” 하고, 곧 가사를 입고 염향(拈香)하고 성복(聖福)을 축원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주장자(柱杖子)를 가로 잡고 몇 말씀 하고 곧 내려왔다.

무술년(戊戌年) 봄에는 지공스님을 하직하고 기별(記莂)을 받아 귀국길에 올라 동쪽으로 돌아오는 도중 머물기도 하고 계속 오기도 하면서 청중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설법해 주었다. 귀국한 후 경자년(庚子年)에는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신축년(辛丑年) 겨울에는 공민왕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어 스님을 개경(開京)으로 영입하여 법문을 청해 듣고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하사하였고, 공주(公主)는 마노불자(瑪瑙拂子)를 헌납하였으며, 태후(太后)도 직접 찾아와서 포시(布施)를 하였다. 임금께서 신광사(神光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스님은 이를 사양하였다. 이 때 임금께서도 매우 섭섭하여 실망 끝에 말하기를 “이젠 불법(佛法)에 손을 떼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부득이 신광사로 가게 되었다. 11월에 이르러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경기(京畿) 지방을 유린하였으므로 거국적(擧國的)으로 국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스님들도 공포에 휩싸여 스님께 피난을 떠나시라 간청하였다. 스님께서 말하기를 “오직 생명은 이미 정해져 있거늘 적(賊)들이 어찌 침해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요지부동하였다. 수일 후 피난을 떠나시라고 간청함이 더욱 화급(火急)하였다. 이 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얼굴에 검은 반점이 있었다. 의관(衣冠)을 갖추고 스님께 절을 올리고 고하기를 “만약 대중이 절을 비우고 떠나면 적들이 반드시 절을 없애버릴 것이오니, 원컨대 스님의 뜻을 고수(固守)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토지신장(土地神將)의 탱화를 보니그 얼굴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이 꿈에 만난 신인과 같았다. 신인의 말대로 홍건적들은 과연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계묘년(癸卯年)에는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공민왕께서 내시(內侍)인 김중손(金仲孫)을 파견하여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했다. 그리하여 을사년(乙巳年) 3월 궁궐로 나아가서 있다가 퇴산(退山)을 간청하여 비로소 윤허(允許)를 받아 용문(龍門)·원적(元寂) 등 여러 산을 순례하였다. 병오년(丙午年)에는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으며, 정미년(丁未年) 가을부터는 청평사(淸平寺)에 주석하였다. 그 해 겨울에는 보암(寶嵓)스님이 원(元)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편에 지공(指空)스님의 가사(袈裟)와 편지를 가지고 와서 스님에게 전달하면서 말하기를 “지공스님이 유언하신 내용이다”라고 하였다. 기유년(己酉年)에는 다시 오대산에 들어가 머물렀으며, 경술년(庚戌年) 봄에는 원나라 사도(司徒)인 달예(達睿)가 지공스님의 영골(靈骨)을 모시고 왔으므로 회암사에 조장(厝藏)하고 스님은 스승의 이 영골탑(靈骨塔)에 예배를 올렸다. 이어 왕의 부름을 받아 광명사(廣明寺)에서 여름 결제(結制)를 맺어 해제(解制)를 마치고 초가을에 회암사로 돌아와 9월에 공부선(功夫選) 고시를 베풀었다.

스님이 살던 거실(居室)을 강월헌(江月軒)이라 하였다. 스님은 평생에 걸쳐 세속문자(世俗文字)를 익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어떤 선비이든 시(詩)를 음영(吟詠)하자고 청해오면 붓을 잡자마자 곧 시게(詩偈)를 읊고, 마음 속으로 깊이 구상하지 않으나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은 심원(深遠)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묵화로 산수(山水) 그리기를 좋아하여 수도(修道)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고 비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호라! 도(道)가 이미 통달되었으면 다방면에 능한 것이 또한 마땅함이 아니겠는가! 신(臣) 색(穡)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비명(碑銘)을 지었다. 명(銘)하여 이르되 살피건대 위대(偉大)하신 선각선사(禪覺禪師)여! 기린 뿔이 하나이듯 희귀(稀貴)하도다. 역대 임금 지극 정성 왕사(王師)로 모셔 인천중(人天衆)의 안목(眼目)이며 복전(福田)이로다.        ① 천만납자(千萬衲子) 한결같이 귀의(歸依)하옴이 샛강물이 바다에로 모임과 같아 나옹(懶翁)스님 높은 경지(境地) 아는 이 없어 갈고 닦은 그 도덕(道德)은 깊고도 넓네.              ② 스님께서 태어날 때 혁혁(赫赫)한 새 알 떨어뜨린 그 새 알이 회중(懷中)에 들다. 열반(涅槃) 때의 그 용마(龍馬)는 팔부(八部)인 천룡(天龍)! 입비사(立碑事)를 건의하여 윤허(允許)를 받다.           ③ 신비하신 그 사리(舍利)는 백오십오과(百五十五粿) 기도(祈禱) 끝에 분신(分身)함은 오백오십팔(五百五十八) 여천(驪川) 강물 길고 넓어 도도히 흘러 천강(千江) 유수(流水) 천강월(千江月)의 밝은 달이여!      ④ 분신(分身)이신 그 보체(寶體)는 공색(空色)을 초월(超越) 하늘 높이 비춘 달이 물 속에 왔네! 높고 높은 스님의 덕(德) 헤일 수 없고 만고(萬古)토록 우뚝하게 불멸(不滅)하소서.            ⑤ 선광(宣光) 7년 6월 일

판독문

  • 출처: 허흥식, 『한국금석전문』중세하편, 아세아문화사, 1984. [2]

	 	
 	禪覺王師之碑(題額)」
高麗國」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脩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諡禪覺▨▨▨▨▨▨塔銘幷序」

      前朝列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推忠保節同德賛化功臣
      重大匡韓山君藝文館事兼成均大司成臣李穡奉 敎撰
      輸忠賛化功臣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上護軍提點書雲  
      觀事臣權仲和奉 敎書丹幷篆額」
玄陵在位之二十年庚戌秋九月十日 召師入京十六日就師所寓廣明寺大會兩宗五敎諸山衲子試其所自得號曰功夫選」
上親幸觀焉師拈香畢升法坐乃言曰破却古今之窠臼掃盡凡聖之蹤由割斷衲子命根抖擻衆生疑罔操縱在握變通在機三世諸佛歷代祖師其揆一也在會諸德請以實答於是以次入對曲躬流」
汗皆曰未會或理通而礙於事或狂甚而失於言一句便退
上若有弗豫色然幻庵脩禪師後至歷問三句三關會罷還檜嵒辛亥八月二十六日遣工部尙書張子溫賷書降印法服鉢盂皆具封爲」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勤脩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謂松廣寺東方第一道場迺命居之壬子秋偶念指空三山兩水之記欲移錫檜嵒會以 召赴是寺法會得請居焉師曰先師指」
空盖甞指畫重營而燬于兵敢不繼其志迺謀於衆增廣殿宇工旣告畢丙辰四月大設落成之會臺評以謂檜嵒密邇京邑士女往還晝夜絡繹或至廢業禁之便於是有旨移住瑩原寺逼迫上道師適」
疾作輿出三門至池邊自導輿者從涅槃門出大衆咸疑失聲號哭師顧曰努力努力無以余故中輟也吾行當止於驪興耳至漢江謂護送官卓詹曰吾疾劇乞舟行遡流七日方至驪興又」
謂卓曰欲少留俟病間卽行卓勉從之寓神勒寺五月十五日卓又督行急師曰是不難吾當逝矣是日辰時寂然而逝郡人望見五釆雲盖山頂旣火之洗骨旡雲而雨者方數百步得舍利一百五十五」
粒禱之分爲五百五十八四衆得之灰中以自秘者莫知其數神光炤耀三日乃巳釋達如夢見龍盤燒臺下其狀如馬及以喪舟還檜嵒旡雨而水漲皆驪龍之助云八月十五日樹浮圖於寺」
之北崖頂骨舍利厝于神勒寺示其所終也覆以石鐘戒其無敢訛也事聞于朝諡曰禪覺命臣穡爲文臣仲和書丹篆額臣謹案師諱惠勤號懶翁初名元惠享年五十七法臘三十八寧海府人也」
俗姓牙氏考諱瑞俱膳官令母鄭氏靈山郡人也鄭夢見金色隼飛來啄其頭忽墜卵五釆爛然入懷中因而有娠以延祐庚申正月十五日生年甫冠鄰友亡問諸父老曰死何之皆曰所不知也中」
心痛悼走入功德山投了然師祝髪師曰汝爲何事出家對以超三界利群生且請開示曰汝之來此是何物耶曰此能言能聽者能來爾但未知脩進之術曰吾亦如汝猶未之知可往求之有餘師」
至正甲申至檜嵒晝夜獨坐忽得開悟尋師中國之志决矣戊子三月至燕都叅指空畣問契合十年庚寅正日空集衆下語無能對者師出衆吐數語三拜而出空西天百八代祖也是春南游江浙」
秋八月叅平山山問曾見何人曰西天指空日用千劒山云且置指空千劒將汝一劒來師以坐具提山山倒在禪床大呌賊殺我師曰吾劒也能殺人能活人乃扶起山以雪嵒所傳及庵衣拂子表」
信辛卯春抵寳陁洛迦山拜觀音壬辰至伏龍山叅千嵒適集江湖千餘人選入室嵒問所自師旣荅嵓云父母未生前從甚處來師曰今朝四月初二日嵓許之是歲北還再叅指空空授以法衣拂」
子梵書於是游涉燕代山川蕭然一閑道人也名聞于 內乙未秋奉」
聖旨住大都廣濟寺丙申十月望設開堂法會」
帝遣院使也先岾木兒賜金襴袈裟幣帛」
皇太子以金襴袈裟象牙拂子來錫師受袈娑問衆曰湛然空寂本無一物粲兮爛兮從何而出衆無對徐曰 九重宮
金口中乃披拈香祝」
聖升坐橫按柱杖下數語便下戊戌春辭指空得受記東還且行且止隨機說法庚子入臺山居焉辛丑冬」
上遣內詹事方節迎入京請說心要賜滿繡袈裟水精拂子」
公主獻瑪瑙拂子」
太后親施布施請住神光寺因辭」
上曰於法吾亦退矣不得巳卽行十一月紅賊蹂躪京畿擧國南徒僧徙震懼請避賊師曰唯命是保賊何能爲數日請益急是夕夢一神人面有黒誌具衣冠作禮曰衆散賊必滅寺願固師志明日至土」
地神坐視其㒵則夢所見也賊果不至癸卯入九月山遣內侍金仲孫請還乙巳三月詣 闕乞退始得夙願遊龍門元寂諸山丙午入金剛山丁未秋住淸平寺其冬猊寳嵓以指空袈裟手書授師」
曰治命也已酉再入臺山庚戌春司徒達睿奉指空靈骨來厝于檜嵒師禮師骨因赴召結夏廣明寺秋初還檜嵒九月卽功夫選也師所居室曰江月軒平生未甞習世俗文字有請題詠操筆立」
書若不經意理趣深遠晚好墨戱山水逼道權鳴呼道旣通多能也宜哉臣穡謹拜手稽首而爲之銘銘曰」
展也禪覺 惟麟之角 王者之師 人天眼目 萬納宗之 如水赴壑 而鮮克知 所立之卓 隼夢赫靈 在厥初生 龍神護喪 終然允藏 矧曰舍利 表其靈異 江之闊矣」
皎皎明月 空耶色耶 上下洞澈 邈哉高風 終古不滅」
 宣光七年六月 日」

주석

  1. 온라인 참조: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