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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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한자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승려 정현(鼎賢)
찬자 김현(金顯)
서자 민상제(閔賞濟)
각자 배가성(裵可成), 이맹(李孟)



번역문

  • 출처: 이지관[1]


증시(贈諡) 혜소국사비명(慧炤國師碑銘)(題額)

▨▨▨▨▨▨▨▨▨▨▨▨▨▨▨▨▨▨▨▨리(利) 낭철파유(朗哲破有) 통화무저(通化無著) 영민연오(靈敏淵奧) 구행정각(具行定覺) 도수도승통(道首都僧統) 증시(贈諡) 혜소국사비명(慧炤國師碑銘) 병서(幷書) 조의대부(朝儀大夫)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주국(柱國) 겸(兼) 태자소보(太子少保) 신(臣) 김현(金顯)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선덕랑(宣德郞) 전중승(殿中丞) 기도위(騎都尉)이며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민상제(閔賞濟)는 선조(宣詔)를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결락) 가섭 마등과 축법란(竺法蘭) 스님이 동쪽인 단역(旦域)으로 왔다. 넓게로는 모래수와 같은 많은 세계를 포괄하고, 좁게로는 마치 우사(藕絲)와 같이 작은데까지 들어가서 삼승(三乘)인 권실(權實)의 문을 열며, 일미(一味)인 편원(偏圓)의 교(敎)를 개설하였으니, 법륜(法輪)이 항상 전파되어 10찰(刹)의 향도(香塗)에 홍포(弘布)하고, 각수(覺樹)가 꽃이 피어 천년의 무성한 열매를 맺었다. (결실) 금(金)으로 만든 불전(佛前)에 놓인 향로로써 손바닥을 비추어 친히 부촉(付囑)한 말씀을 계승하고, 옥경(玉鏡)으로 마음을 맑혀 색(色)이 공(空)한 진리를 깨달았다. 지나(支那)의 말속(末俗)을 교화하되, 신독(申毒)의 미묘한 진리의 말씀을 연설한 이는 곧 우리 국사(國師) 스님이시다.국사의 휘는 정현(鼎賢)이요, 속성은 이씨(李氏)이다. (결락) 후지언(後之言), 입으로 한번 뱉은 말씀은 항상 잊지 않고 반드시 실행에 옮기면서 되풀이하였다. 조심스러운 몸가짐은 항상 결여한 점을 고치되 마치 높은 손님을 대한 것과 같이 방심하지 아니하고마음에 그윽히 본받았으며, 조상은 항상 연익(燕翼)의 염원을 품어서 상명(象明)의 덕을 갖춘 맏아들얻기를 생각하였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부덕(婦德)의 아름다움이 마치 노내자(老萊子)의 부인과 같으며,공손하고 우아함은 양홍(梁鴻)의 처와 비교되었다.결혼해서는 백년해로(百年偕老)의 징험을 보았으며, (결락) 밝은 달이 방안에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꿈으로 말미암아 곧 임신하였다.그 후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아버지는 자색(紫色) 가사(袈裟) 열 벌을 스님들에게 헌납하였고, 어머니는 보현보살 탱화 500정을 조성하고 발원(發願)하기를, '만약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출가하여 스님이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로부터 항상 음식 중에 오신채(五辛菜)와 고기는 일체(一切) 먹지 아니하였다. (결락) 5년 (결락) 출산(出産)하였다. 국사의 목에 마치 보룡(寶龍)의 턱 언저리에 여의주(如意珠)와 같은 원상(圓相)이 있었다.범백요(范伯繇)가 부강(負襁)의 나이에이미 명필(名筆)과 양오동(揚烏童)으로 추대되었고, 참현(參玄)의 시대에 이르러 바야흐로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곧 바로 광교사(光敎寺)에 가서 충회대사(忠會大師)를 은사로 하여 정수리에 있는 주라(周羅)를 잘라 버리고, 몸에는 가사를 입고 스님이 되었다. (결락) 종지(宗旨)를 구하기 위해 (결락)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였다.

(결락) 13살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행문중(萬行門中)에 구화(傴和)가 가장 중요하지만 성(性)과 상(相)이 함께 통하는 것은 십칠지(十七地)인 유가교문(瑜伽敎門)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종전에 의행(依行)하던 구화문(傴和門)을 버리고 이 유가수행문(瑜伽修行門)으로 나아가야겠다"고 하였다. 고향과 먼 곳에있는 칠장사(漆長寺)에 가서 융철(融哲)스님을 예방하였더니, 철(哲)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어제 밤 꿈에 동방(東方) (결락) 보살을 친견 (결락) 야(也)라" 국사가 남쪽으로 가면서 선지식을 찾아 헤매다가 과연 우리 스님을 만나서부터 달람(怛纜)의 근본으로 좇아 깊이 구라(拘羅)의 뜻을 음미하였다. 그 후 영통사(靈通寺)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니, 참으로 일승(一乘)의 교리를 착실히 연마하였다. 국사는 총명함이 뛰어나, 마치 각현삼장(覺賢三藏)이 하루 동안 공부하는 진척이 다른 사람의 서른 날 공부함을 대적함과 같았다.(결락) 법심(法探) (결락) 백천의 게(偈)를 깊이 연구하여 질문하기를, "이(而) (결락)." 홀언불체(忽焉不滯)하여 건노(健拏)의 신본(新本)을 연설함에 있어서는 모든 화엄 학인(學人)들이 눈을 부릅뜨고 따라가려 하였으나 추종을 불허하였다.

통화(統和) 14년에 미륵사(彌勒寺)의 오교(五敎)대선(大選)에 나아가서 선정(禪定)의 법운을 화정(火頂)의 문(門)으로 배출하며,높이 번갯불과 같이 민첩한 변설을 날려작감(嚼甘) (결락) 난(瀾)하되, 그 명성이 강장(講場)에 떨쳤으며 칭송이 담회(談會)에 쟁쟁하였다. 이에(仍) (결락) 옥(玉)을 타산(它山)에서 캐고 배를 타고 해외에 가서 유학하지 않고도 이미 보주(寶珠)를 적수(赤水)에서 탐색하였다.이와 같이 제방(諸方)으로 다니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하다가, 뒤에 본사(本寺)인 칠장사(漆長寺)로 돌아갔다. 어느 날 꿈에 하늘을 쳐다 보았더니, 성운간(星雲間)에 한 개의 큰 흑점(黑點)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사(師) (결락) 이것이 어찌 당연(唐捐)한 일이겠는가! 연가론(延伽論)을 해설하니 부처님의 뜻과 문합(脗合)하여 아름다운 칭송이 자자하였다.추선(推善) (결락) 길상(吉祥). 기해세(己亥歲)에 칙명(勅命)으로 대사(大師)의 법계를 첨가(添加)하고,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불법(佛法)의 진리를 크게 홍포(弘布)하기를 마치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이 순조롭게 하여 선각자(先覺者)로 하여금 길을 양보하게 하였고, 손에는 언제나 책을 놓은 적이 없어서 후배들로 하여금 절조(節操)를 굳게 가지도록 장려하였다.

임자년(壬子年)정월(正月)로부터 (결락) 내(內) (결락) 자운사(慈雲寺) 도량에 나아가서 포화(布貨)로써 첨인(詹人)들이 생포한 비둘기와 바꾸어 방생하였다.(결락) 풀려난 비둘기들은 높이 구름 속으로 날아갔으니 그 수가 무려 332마리나 되었다. 그 후 속리산(俗離山) 입구 대천(大川)에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 있어, 강물 속에서 그물 벼리를 잡고 앞으로 구부려 엉금 엉금 다가옴을 보고, 영량(嬴粮)으로써 어부가 잡은 고기와 바꾸어서 수중에 놓아 주면서 (결락) 갈마(羯摩)인 방생의식을 행하여 8계(八戒)를 받는 연유(因由)를 설(說)하되, 보승여래(寶勝如來)의 명호를 념(念)하게 하였으니, 잡혔던 고기들이 (결락) 꼬리를 흔들면서 기꺼워하는 표정으로 물 속으로 흩어져갔다. 이에 미루어 보건대, 스님의 신심은 비늘을 달고 물 속에 잠겨 사는 고기에까지 미쳤으며 덕화는 날개를 가지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에까지 끼쳤으니,이른 바 가라지(迦羅池)의 신합(蜃蛤)이 법문을 듣고 고통에서 벗어났고,수달다장자(須達多長者)의 집에 있던 앵무새가 아함경에 담긴 4체법문(四諦法門)을 듣고 4천왕천(四天王天)에 태어난 것과 같은 예라고 하겠다. (결락) 생(生). 계(戒)를 가짐이 모두 이와 같은 일이었다.

현종(顯宗)조에 이르러 석사(石師)를 더욱 존중히 여겨 특별히 국사에 대한 기행(琦行)이 뛰어나심을 표창하고 마납(磨衲) 가사 한 벌을 드렸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수좌(首座)의 법계를 더하였으니 이는 모두 예리한 질문을 받으면 마치 종(鐘)을 치듯 응해주고, 해론(論)을 결정함에는 항상 중석(重席)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太平) 계유세(癸酉歲)에 (결락) 왕궁과 국사가 있는 칠장사(七長寺)와의 중간 지점에는 왕이 수시로 문안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한 우편소(郵便所)인 우정(郵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그 후 국사의 병세는 여러 해 동안 점점 깊어져 갔다. 노쇠(老衰)함이 날로 더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신체의 방산(泐散)이 심하여졌으니 백방(百方)으로 보신치료(補身治療)를 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스님은 (결락) 마치 백족(百足)이 죽어도 쓰러지지 않는 것과 같이 솔곤(率籲)와 같은 동심의 류(類)가 하루에 모였고, 유수도식(游手徒食)하는 무리가 한 곳으로 모여 들었는데,그 가운데 황색, 흑색의 두 마리의 소가 있어 굴레와 고삐도 없이 스스로 찾아왔으므로, 그를 사육하면서 역사(役事)에 종사하게 했다. (결락) 착실하게 일을 잘하다가 어느 날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죽었으니,이것이 어찌 선성(先聖)이 강령(降靈)하여 소의 몸으로 화현(化現)하여 역사(役事)를 돕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종(德宗)이 교지(敎旨)를 내려 법천사(法泉寺)에 주석(住錫)토록 하였는데, (결락) 류(流)와 오악(五岳)의 군영(群英)으로 하여금 권장하여 참천(參天)의 극수(極數)를 나타나게 하고,4하(四河)의 석종(釋種)들이 옥일(沃日)과 같은 관대함을 성취하도록 기대하였으니, 또한 어찌 관목(窾木)에 의탁하여 몸을 망각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험준한 산을 넘고깊은 물을 건너면서 선지식을 참방하였다. (결락) 추붕준(推鵬俊) (결락) 간(簡) (결락) 응(鷹). 기(耆) (결락) 왕이 승통(僧統)으로 추대하고 현화사(玄化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하고, 자색으로 수(繡)를 놓은 승가리(僧伽梨) 한 벌과 (결락) 일령(一領)을 하사하였다. 중희(重熙) 갑신세(甲申歲)에는 광제사(廣濟寺)절 문앞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배 고픈 사람을 초대하여 무차 반식(無遮 飯食)을 행하였으므로 천균(千囷)에 쌓였던 곡식이 탕진하였고, 백곡(百斛)을 나누어 주되 조금도 인색(恡嗇)함이 없었다. 이 때 유일(有一) (결락) 희기간(喜機幹)하여 앙감질 걸음으로 무서대회(無遮大會)에 참석하였다. 이 때 의일대사(義日大師)가 이를 보고 매우 이상하게 여겨 그의 뒤를 따라 미행하였으나 조금 가다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는 반드시 지(智) (결락) 외(聵)의 감득한 바라 하겠다.

을유세(乙酉歲)에 삼각산에 사현사(沙峴寺)를 창건하고 이어 큰 가람(伽藍)을 이룩하였는데, 부근에는 호랑(虎狼)이 살고 있었으며, 도적떼가 우글거려서 흉악하고 잔악한 무리들이 황지(黃池)보다 심하고 포도(逋逃)들이 모인 것은 마치 연수(淵藪)와 같이 많았다. 자(自) (결락) 이곳은 실로 여러 갈래의 길로 갈라지는 요충지대(要衝地帶)이며, 손에는 책 보따리를 들고 어깨에는 배낭을 매고 지나가나,왕래(往來)에 경색(梗塞)함이 많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결락) 장차 이러한 험난함을 구하고자 하여 석로(舃鹵)의 밭을 평지로 만들어 범우(梵宇)를 창건하고, 오유(鼯鼬)만이 다닐 수 있는 가파른 길을 매축하여 거로(蘧廬)를 지었다. 건물의 표와(縹瓦)는 날아가고자 하고, 겹겹으로 된 중인(重闉)은 양쪽 문짝이 활짝 열렸다.법당(法堂)에는 우두전단향(牛頭栴檀香)을 항상 사루어 도량(道場)의 안팎 수 리까지 향기가 진동하였고, 국사를 찾아오는 사대부(士大夫)들의 상마(象馬)가 서로 먼지를 날리면서 왕래하였다.그리하여 법당 밑으로는 백중(百重)의 보사(寶肆)가 나열하였으므로 연림(綠林)과 청독(靑犢)이 민가에 가서 물건을 겁탈하는 좀도둑들의 구과(鉤瓜)와 거아(鋸牙)가 감히 포효(咆哮)하면서 도둑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임금께서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 성취되었으므로 조단(朝端)을 잘 간택하고 사천승(司天丞)인 반주보(潘周寶)로 하여금 터를 정하게 하고, 전중승(殿中丞)인 (결락) 검(儉)에게 명하여 원액(院額)을 홍제원(弘濟院)이라 하고 관액(館額)을 서인관(棲仁館)이라 써서 보냈다. (결락) 단월(檀越)들의 시주를 모연하니 화회(貨賄)를 실은 우마가 분농(紛繷)하게 이르러 왔다. 소(所) (결락) 어느 날 도둑들이 절 근처에 잠복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으나, 한 소아가 있어서 미친개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절에 투숙하였는데, 그 개가 밤이 새도록 짖는 바람에 도둑들이 침입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다음 날 개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으나 모든 사람들이 큰 이익을 얻었다. 우리 황상(皇上)인 문종 임금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丙戌年) 봄 정월에 이르러 마음을 향해(香海)에서 씻고 복을 정전(情田)에 심었으며, (결락) 국사께서는 호국 안민을 위하여 금고경(金鼓經)을 강설하였으니, 이는 실로 천태(天台) 지의대사(智顗大師)가 다시 태어난 것이며 성견(成覸)이 다시 화현(化現)한 것으로 여겨자색(紫色) 비단에 수를 놓은 승가리(僧伽梨) 한 벌과 비단을 붙여서 만든 법의(法衣) 한 벌 등을 하사하였으니, 살타(薩埵)를 (결락) 승전(僧田)에 비추는 것에 비견할 만하다.

그후 무자세(戊子歲) 5월에 날씨가 크게 가물었을 뿐만 아니라냉해(冷害)가 심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비가 내리기를 희망하였으나 이익이 없었고, 백신(百神)에게 기우제를 지냈지만 영험이 없었다. (결락)이 무렵 국사께서는 문덕전(文德殿)에서 8권본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설하고자 손으로 은도향로(銀塗香爐)를 들고, 서서히 상왕(象王)의 걸음을 걸어 몸이 연좌(蓮座)에 올라 사자(師子)의 음성을 높여 제1권을 아직 다 설하기도 전에 사방으로 구름이 덮히더니 소나기가 쏟아져 골고루 줄아(茁芽)를 적시어, 보전(甫田)에 심은 농작물이 마치 손으로 뽑아 올리듯 자랐다.임금께서 밀사(密使) (결락) 로 하여금 다향(茶香)을 보내어 위로하고 앙모(仰慕)하는 편지를 보냈다. 기축세(己丑歲)에 임금이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여망(呂望)을 사상부(師尙父)로 삼았고 후한(後漢)의 명제(明帝)는 환영(桓榮)을 발탁하여 관내후(關內侯)로 책봉하였다. 지금 우리 정현승통(鼎賢僧統)의 학식은 진심(眞心)에 관철하고 의리는 운천(雲天)보다 고상(高尙)하니 마치 마니(摩尼) 천고(天鼓)가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진동하며 또한 우담발화의 꽃이 상계시대(像季時代)에 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스님은 진실로 이와 같이 도덕이 높았으므로 감히 누구도 (결락)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한림학사(翰林學士) 비서감(秘書監) 정걸(鄭傑)과 좌부승선(左副承宣) 상서좌승(尙書左丞) 고숙성(高肅成)등으로 하여금 조서를 가지고 세 번이나 초빙하였으나 스님은 끝내 응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봉은사(奉恩寺)에 행행(幸行)하여 왕사(王師)에게 막배(膜拜)를 드리고 친히 (결락) 계금(罽錦) 비단으로 만든 납의(衲衣)와 법구(法具) 등을 헌납하였다. 또 국사에게 물으면 얼음장같이 풀기 어려운 의문이 모두 풀렸으니 은총이 염모(炎慕)에 두루하였다. 백료(百寮)들과 함께 공경히 받드니 마치 구마라즙 삼장(三藏)이 진왕(秦王)을 만난 것과 같고,만승천자(萬乘天子)가 구의(摳衣)하니 보지공(寶誌公)스님이 양무제(梁武帝)를 만난 것보다 더하였다. 진실로 이선(以銑) (결락) 담혜(談兮)여! 복이 자초(茨草)와 범망(梵網)처럼 이르러 오고자비한 산이 널리 덮어줌이여! 민서(民胥)가 (결락) 경(鏡)과 같이 비추었다.

갑오년(甲午年)(결락) 에 "(국사는) 나이가 들고 몸이 점점 쇠약하여 이미 치절(齒截)이 곧 임박하였으니 어찌 종루(鍾漏)에 이른 나이에 계속 복잡한 연하(輦下)에만 주거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상유(桑楡)에 임박한 노쇄한 비질(憊質)로써 왕궁을 떠나 산중으로 물러가서 이련(以連) (결락) 광려(匡閭)를 향하려 합니다" 하였으나, 왕은 국사를 찾아갔고 섭재(攝齋)하고 청법하는 신심(信心)은 더욱 견고하였다."도덕에 의지하는 정성으로 국사의 귀산(歸山)을 만류하는 마음 간절하나, 감히 어찌 고반(考槃)의 뜻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라 하고, 이(以) (결락) 왕이 직접 봉은사(奉恩寺)로 가서 법요의식(法要儀式)을 갖추고 혜소(慧炤)라는 의호(懿號)를 증가(增加)하면서 국사로 추대하여 구배(九拜)를 올리고 온갖 정성(精誠)을 다하였으니 피로함을 잊고 환희심(歡喜心)이 가득하여 하직 인사를 하고 물러 나왔다. 아울러 재신(宰臣)인 박성걸(朴成傑)을 교정(郊亭)에까지 보내어 용송(龍送)케 하고, 다시 대부(大府)소경(少卿) 김양(金陽)과 좌가승정(左街僧正) 도원(道元) 등을 호송관(護送官)으로 하여 칠장사(漆長寺)에 도착하니, 새와 짐승들까지도 국사의 귀산(歸山)을 기다리다가 원숭이는 놀라고 학은 원망하였다.종부(鍾阜)에는 (결락) 양기(楊枝). 세월이 오래 흘렀으므로 맹진(孟津) 나루터에는 천사(天沙)가 이미 다 흘러가고 다른 형태로 변하였다.

산속 암혈(巖穴)에 이르러 승상(繩牀)에서 연좌(宴坐)하였다. 몸에는 일납(一衲)을 입고 단정히 안거(安居)하되 모든 반연을 끊고 황처(遑處)하였다. 국사께서는 금계(金鷄)로부터 공양을 받으며, 동오(銅烏)가 진보(珍寶)를 바쳤다. 고통을 구제하고 미혹(迷惑)을 없애 주어 사의(思議)하기 어려운 공혜(空惠)를 운용(運用)하여 천지(天地)가 진동하는 상서를 감득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신통은 다겁생(多劫生)에 걸쳐 만행(萬行)을 닦음에 기인(起因)된 것이며, (결락) 또한 끝없는 시간 동안 중생을 화도(化度)하였으니, 승추(僧芻)와 칭수(稱首)는 등각(等覺)의 분신(分身)이라 말하기에 충분하였다. 11월 15일에 제자 중에 수좌(首座)인 영념(靈念)과 불운(昢雲),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인조(仁祚)와 심천(甚泉), 중대사(重大師)인 승당(僧幢)과 계선(繼先), 대사(大師)인 의기(義奇)와 인걸(仁傑), 란수(蘭守), 대덕(大德)인 융책(融冊)과 덕선(德先), 단직(單職)인 (결락) 10인 등을 불러 놓고 추위(諈諉)하여 유촉(遺囑)하기를, "대저 인생이란 마치 번갯불과 같이 신속(迅速)하며 바람과 같이 지나가고 별이 사라지면 해가 뜨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곧 무물(無物)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이 끝나자 마자, 가부좌를 맺고 입적(入寂)하였으니 얼굴빛과 모양은 생전과 같았다. 세수는 83세요, 승랍은 74세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태양은 그 빛을 잃고 산림은 변색하였다. (결락) 차(嗟)하며 농부들은 호미를 놓았으나 마음은 심란하고 눈앞은 캄캄하여 깊은 탄식을 일으켰다. 수좌(首座)인 영념(靈念) 등은 눈물을 씻고 묘지(峁墀)에 부음(訃音)을 주달(奏達)하였다. 임금께서 부고를 받고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우가승록(右街僧錄)인 혜영(惠英)과 태사사진(太史司辰)인 노정▨ (盧廷▨)등을 보내어 칠장사(七長寺) 남쪽 산 중턱에 장사를 지내게 했고,이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와 예빈경(禮賓卿)인 조(趙) (결락) 등을 파견하여 부의(賻儀) 금물(金物)을 보내고,또한 역명(易名)하는 의전을 거행하여 멀리 추모하는 의식을 더욱 빛나게 하고는 시호를 혜조국사(慧炤國師)라 추증하였으니 국사의 위대한 그 방유(芳㽔)가 인멸될까 염려함이었다.

혹은 낙음(樂音)은 운절(隕絶)하고 악기(樂器)의 사죽(絲竹)만 남아 있을 때를 당하여 국사의 위업(偉業)이 늑멸(泐滅)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정민(貞珉)에 새겨 후세에 영원토록 전하고자 하여 미신(微臣)에게 명(命)하시어 유촉(遺蠋)을 선양(宣揚)토록 하라 하시므로 신(臣)이 사양하여 고하기를, "방금 (결락) 영대미(靈臺美)하여 인어가 마름 밑에 가려 있는 것을 용문(龍門)의 폭포를 뛰어넘는그 위대함을 나타내며 한록(旱麓)의 시를 읊어 나는 연이 높은 하늘에 이르는 것을 서술하라 하시나, 실로 이는 엄서(嚴徐)가 강학(講學)하던 때이며 남사(南史)와 동호(董狐)의 시대와 같사오니, 신(臣)에게 비문을 지으라는 어명(御命)을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였다. 끝내 사양하였으나 더 이상 왕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번잡한 말과 기말적(枝末的)인 행장(行狀)은 과감히 깎아 버리고,단편인 작품을 엮었으니,비록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이라도 계속하면 태산(泰山)의 돌도 뚫게 되며,혹은 (결락) 남상(濫觴)의 수원이지만 계속 수천리를 흘러가면, 그 지파(支派)의 물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애오라지 적막(寂寞)을 두드려 소리를 일으키는 것과 같이 감히 수신(受辛)을 짓고 삼가 이를 명(銘)하는 바이다.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 석가(釋迦)이시여! 이를 일러 사바세계 교주(敎主)라 하네. 실날같이 그 법맥이 이어져 왔고 천만(千萬)갈래 분파되어 두루 퍼졌네! 서축(西竺)에서 육년고행(六年苦行) 시작되었고 그의 법통(法統) 유전(流傳)하여 동방(東方)에 왔네! 한량없는 인천대중(人天大衆)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정법안장(正法眼藏) 그 진리는 멀고 깊으며 시대마다 최상근기(最上根機) 배출하여서 그 법맥(法脈)을 계승하여 이어져 왔네! 개중(個中)에는 수학(受學)하여 근육(筋肉)을 얻고 어떤 이는 탐구하여 골수(骨髓)를 얻다. 혜관사(慧觀師)와 조법사(肇法師)는 연표(連鑣)를 탔고 도생법사(道生法師) 도융(道融)등은 결궤(結軌)를 했네! 그 법통을 계승할 자 누구였던가? 칠장사(七長寺)의 혜조국사 이어받았네! 부지런히 정진하여 전해받았고 미묘한 법 깊고 깊어 희이(希夷)하도다. 과(果)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청정도량(淸淨道場) 범찰(梵刹) 중에 신구(神龜)와 같네! 대원경지(大圓鏡智) 원명(圓明)하여 두루 비추며 지계청정(持戒淸淨) 실천으로 계주(戒珠)가 밝고 향기로운 그 법향(法香)은 널리 풍기며 송목(松木)처럼 고상함은 선장(仙掌)과 같네! 사부대중(四部大衆) 한결같이 귀의(歸依)하였고 여덟 가지 마군(魔軍)들은 머리 조아려 주미(麈尾)로 된 선불(扇拂)로써 높이 떨치니 청풍납자(淸風衲子) 스님들은환영(欽仰)하도다. 자비포시(慈悲布施) 널리하여 제도하시니 법계중생 빠짐없이 모두 깨었네! 반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만승(萬乘) 천자(天子) 스님 향해 정성 다했고 분(分)을 알아 일절시(一切時)에 지족(知足)하시며 법희선열(法喜禪悅) 수용(受用)으로 법락(法樂)을 삼다. 범약(汎若)하게 돌아가는 평상심(平常心)이여! 동연(恫然)하는 불자(佛子)들은 아쉬움을 품고 암혈(巖穴)로써 토굴삼아 은둔하시니 서신(棲身)하는 주변에는 산창(山窓)뿐일세! 밤낮으로 일념정진(一念精進) 근심은 없고 구름들은 높이 날아 하늘을 덮고 우리들의 생명이란 점위(阽危)하도다. 자세하게 살펴보니 무상(無常)함일 뿐.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열반 소식 들은 이는 애통해 하네. 위대하신 그 이름은 썩지 않으니 죽었지만 지날수록 아름답도다. 이 비명(碑銘)을 돌에 새겨 전하니 하늘 땅과함께 하길 발원(發願)하노라.

청녕▨▨ (淸寧▨▨) 세재상장(歲在上章) 용집곤돈(龍集困敦) ▨월 2▨에 배융교위(陪戎校尉) 신(臣) 배가성(裴可成)과 대장(大匠) 신(臣) 이맹(李孟)등은 비문을 새기다.

판독문

  • 출처: 허흥식, 『한국금석전문』중세상, 아세아문화사, 1984.[2]


贈諡慧炤國師碑銘(題額)」

▨▨▨▨▨▨▨▨▨▨▨▨▨▨▨▨▨▨▨▨利朗哲破有通化無著靈敏淵奧行定覺道首都僧統贈諡 慧炤國師碑銘幷序」
      朝儀大夫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兼太子少保臣金顯奉 宣撰」
      宣德郎殿中丞騎都尉賜緋銀魚袋臣閔賞濟奉 宣書幷篆額」
▨▨▨▨▨▨▨▨▨▨▨▨▨▨▨▨▨▨▨法蘭東來於旦域廣包沙界細入藕絲開三乘權實之門設一味偏圓之敎法輪轉轂輾十刹之香塗覺樹敷花結千年之茂實」
▨▨▨▨▨▨▨▨▨▨▨▨▨▨▨▨▨▨▨▨爐耀掌親承付囑之言玉鏡澄心頓悟色空之理化支那之末俗演申毒之微言者則 我國師之謂歟 師釋諱鼎賢俗姓李」
▨▨▨▨▨▨▨▨▨▨▨▨▨▨▨▨▨▨▨▨▨後之言口常復矣晋冀缺如賓之禮心竊効焉常懷燕翼之謀思得象明之胤母金氏美齊萊婦恭比鴻妻適鍾偕老之徵▨」
▨必▨▨▨▨▨▨▨▨▨▨▨▨▨▨▨▨▨▨▨▨月入室因而覺焉尋以有娠爺則許願紫袈裟一十領孃則約成 普賢菩薩五百生若得子必當爲僧常於飮膳之間」
▨▨葷腥▨▨▨▨▨五年▨▨▨▨▨▨▨▨▨▨▨▨▨産寶龍頷門圓在范伯繇負襁之年曾推與硯及楊烏童叅玄之歲方慕出家俓投光敎寺大師忠會頂落周羅身」
▨▨▨求宗▨▨▨▨▨▨▨勤▨▨▨▨▨▨▨▨▨▨▨▨十三自謂曰傴和最要性相通者莫若乎十七地瑜伽敎門今欲去彼就此矣遠漆長寺 融哲師哲師云昨」
▨▨▨見東方▨▨▨▨▨▨菩薩▨▨▨▨▨▨▨▨▨▨▨▨也 師擇尋南方果得我師始從怛之根深味拘羅之旨因就靈通寺戒壇受實乃▨乘肄業覺賢敵三」
▨▨▨▨法探▨▨▨▨百千之偈問而▨▨▨▨▨▨▨▨▨▨▨▨忽焉不滯演鷃拏之新本膛若難追統和十四載赴彌勒寺五敎大選排禪雲火頂之門高飛舌電嚼甘▨」
▨▨▨▨▨▨▨瀾名振講場譽錚談會仍▨▨▨▨▨▨▨▨▨▨▨玉於它山不假乘桴巳探珠於赤水爾後旋歸漆長寺夜夢仰見天上星雲間有一大黒子甚分明師」
▨▨▨▨▨▨▨豈唐捐闓延伽論脗合休徵推善▨▨▨▨▨▨▨▨▨▨吉祥巳亥歲 敕加大師丕顯懿鑠瀉瓶有易令先覺者讓途釋卷無時俾後醒者勵節自壬子正月」
▨▨▨▨▨內▨雲寺道場以布貨貿詹人生捉鳩鴒▨▨▨▨▨▨▨▨▨雲飛數至三百三十有二後於俗離山下大川見施捕魚五人匐匐而前以贏粮貿所釣魚放水▨」
▨▨▨▨▨受羯摩八戒之因由念 寶勝如來之名號魚▨▨▨▨▨▨▨散矣斯並信及鱗化孚羽翔所謂迦羅池之唇蛤聞法音而脫苦須達家之鸚鵡聽經說而▨」
▨▨▨▨▨▨▨生持戒皆此類也 顯宗朝益重石師別褒琦行超▨▨▨▨▨▨磨衲方袍一領未幾加▨首座斯皆稽問則如撞鍾決論則有重席之故太平癸酉歲」
▨▨▨▨▨▨▨▨候置中道郵亭歷星霜而寢深在修泐而無補 師▨▨▨▨▨▨▨▨百足不僵率籲同心之類一日必葺驟興游手之羣有黃黒二牛無執靷自來餼牽行役」
▨▨▨▨▨▨▨斃此豈非▨聖降靈變身助役 德宗敎移住法泉寺▨▨▨▨▨▨▨流使五岳羣英勵著叅天之極四河釋種期成沃日之寬亦何必託窽木以忘軀尋俓山▨」
▨▨▨▨▨▨▨推鵬俊簡▨鷹耆▨▨僧統請住玄化寺賜紫繡僧伽梨▨▨▨▨▨一領重熈甲申歲於廣濟寺門前列鼎爨餁以待餓人指千囷而可蠲施百斛而無恢有一」
▨▨▨▨▨▨喜機幹踔赴會大師義日甚奇之追尋因忽不見斯必智▨▨▨▨▨▨聵之所感也乙酉歲開刱三角山沙峴寺館玆地也虎狼所畜賊寇頗多嘯凶殘則甚于潢池萃逋逃則
蔚爲淵藪自▨▨▨實岐路之要衝揭篋擔囊奈往▨之多梗▨▨▨▨▨▨將救險難夷舃鹵之田搆成梵宇▨鼯鼬之徑起立蘧廬縹瓦欲翔重闉對豁牛檀薫而匪歇於▨」
▨數里▨香雲象馬坌而交犇▨下列百重之寶肆則彼綠林靑犢▨▨▨▨▨劫人鉤爪鋸牙不敢咆哮而容物 上適從願幅妙揀朝端乃 令司天丞潘周寶相地殿中丞▨」
▨儉書額院曰弘濟館曰棲仁▨欲開置檀施貨賄牛馬寔惟紛繷所▨▨▨▨▨盗有揔角小兒率瘈狗一頭來宿狗便▨之狂吠令穿窬不得犯▨而入功畢未詳歸處也▨諸▨」
生得大利益洎我 皇上踐祚丙戌歲春正月洗心香海植福情田於▨▨▨▨ 師講金鼓經▨實謂智顗重生成覵再化賜紫繡僧伽梨一領錦貼法衣一領比肩薩埵▨耀僧」
田後於戊子歲五月甘澍阻霑驕陽爲冷走羣望而無益禜百神而不▨▨▨▨▨▨師於文德殿講八卷金經 師手捧銀塗徐擧象王之步身昇蓮座高騰師子之音▨軸未」
終雲四▨霈然下雨均被於茁芽倬彼甫田滋生而如揠 上遣密▨▨▨▨▨▨▨茶香勞之優加仰己丑歲 上有詔曰昔周師呂望漢扒桓榮今 我僧統識貫▨心義」
高雲▨▨摩尼天皷櫑動於娑▨若優曇鉢花開現於像季苟如此者敢不▨▨▨▨▨使知中樞院事翰林學士秘書監鄭傑副左承宣尙書左承高肅成等適 降八▨▨行三」
返 呼而不已禮▨▨▨ 上率羣有司 幸奉恩寺膜拜 王師親獻▨▨▨▨▨罽錦衲衣法等質釋冰疑恩周炎慕百寮禮足猶羅什之遇秦王萬乘摳衣邁志公之」
遌梁帝誠以銑▨▨▨▨談兮福至如茨梵網慈山洪覆兮民胥▨鏡甲午年▨▨▨▨▨▨年頤漸逼齒截將臨豈宜鍾漏之殘年長居輦下願以桑楡之憊質退臥山中飛方底」
以連▨向匡閭而欲往攝齋請益雖增倚德之誠棹鞅言歸敢負考槃之志以▨▨▨▨▨▨▨奉恩寺備法儀 親加懿號禮爲 國師九拜忘勞一辭將退 遣宰臣朴成傑於」
郊亭 龍送仍差大府少卿金陽左街僧正道元等送到漆長寺猨驚鶴怨鍾阜▨▨▨▨▨▨▨楊枝孟津則天沙巳濟自臻巖穴宴坐繩牀披一衲以端居息萬緣而遑處」
師金鷄受供銅▨懷珍救苦拔迷運難思之空惠感天動地振不測之神▨是因多▨▨▨▨▨▨▨時之化度足謂僧芻稱首等覺分身十一月十五日召門弟子首坐靈念昢」
雲三重大師仁祚甚泉重大師僧幢繼先大師義奇仁傑蘭守大德融冊德先單職▨▨▨▨▨▨▨▨十人諈誘曰夫人生者譬若電睒宵風星霃曉日予今欲復歸無物汝等不」
敢毁傷言訖趺坐示滅色皃如生嚮年八十三僧臘七十四是時天日微光山林變色▨▨▨▨▨▨▨▨嗟耕父停鋤憒毦而起嘆首座靈念等雪涕訃奏 墀 上聞而悼焉」
遣右街僧錄惠英太史司辰盧廷▨等窆于寺之南崗續 令左諫議大夫禮賓卿趙▨▨▨▨▨▨▨▨▨等賻贈爰擧易名之典增光追遠之儀贈諡曰 慧炤國師恐厥芳甤」
或當隕絶顯竹而期於弗泐勒珉而圖以無彊爰 命微臣俾揚遣躅臣讓云方今▨▨▨▨▨▨▨▨▨▨▨靈臺美躍鱗之在藻詠於旱麓述飛鳶之戻天實嚴徐講學之年南」
董列朝之日請迴其出莫奉 曰兪强抉蕪音因編短作雖溜惟常滴泰山之石或▨▨▨▨▨▨▨▨▨▨▨難可截聊因扣寂敢著受辛謹爲銘」
惟佛作祖 是法稱王 綱條若綫 支派濫觴 起從西竺 流至東方 人天▨▨ ▨▨▨▨ ▨▨▨▨ 眞塗邈矣 代有其人 踵傳厥▨ 或得師筋 或得師髓」
觀肇連鑣 生融結軌 其誰繼者 惟我得之 精窮煥忍 妙頤希夷 果▨▨▨ ▨▨▨▨ ▨▨▨▨ 梵刹神龜 智鏡圓明 戒珠晃朗 蘭馥深林 松孤仙掌」
四衆翹▨ 八魔稽顙 塵扇高揚 毳徒悉仰 慈施廣濟 法界咸穌 飯▨▨▨ ▨▨▨▨ ▨▨▨▨ 萬乘趨偶見機知足 適性爲 汎若而歸 恫然以往」
遁跡巖扉 棲身岫幌 日夕忘憂 雲▨▨員 命也阽危 觀之忽怳 ▨▨▨▨ ▨▨▨▨ ▨▨▨▨ 遐邇盡傷 名兮不朽 沒則弥芳 銘之琬琰 配以玄黄」
淸寧▨▨歲在上章龍集困敦▨月二▨ 陪戎校尉臣裴可成大匠臣李孟等刻字」

주석

  1. 온라인 참조: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