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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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한자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승려 무염(無染)
찬자 최치원(崔致遠)
서자 최인연(崔仁渷)


번역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1]

신라국(新羅國) 고(故) 양조국사(兩朝國師) 고교시대낭혜화상(故敎諡大朗慧和尙) 백월보광탑비명(白月葆光塔碑銘) 및 서문(序文)

회남(淮南)에서 본국으로 들어와 (天子의) 국신(國信)과 조서(詔書) 등을 바친 사인(使人)이며 동면도통순관(東面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使), 내공봉(內供奉)을 지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당(唐)나라가 무공(武功)으로 (黃巢의) 난을 평정하고 연호를 ‘문덕(文德)’으로 고친 해(888년) 11월 17일 해가 질 무렵, 신라(新羅 : 海東)의 두 임금에 걸쳐서 국사(國師)를 지내셨던 선승(禪僧) (朗慧)화상(和尙)께서 목욕을 마치신 후 가부좌를 하신 채 돌아가셨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슬퍼함이 마치 두 눈을 잃을 정도로 심하였는데 하물며 그 문하의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아아! 이 땅에 태어나신 지 89년이 되었고, 승복을 입으신 지는 65년이 되었다. 돌아가신지 3일이 지나도 자리에 단정히 앉은 그대로였고, 얼굴 모습도 살아 계신 것 같았다. 문인(門人)인 순예(詢乂) 등이 소리내어 울며 유체(遺體)를 받들어 선실(禪室)에 임시로 모셔 두었다. 임금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글월로 조문(弔問)하시고, 곡식으로 부의(賻儀)하여 (葬禮의) 공양(供養)에 보탬으로써 죽은 분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셨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나서 돌을 다듬어 여러 층 되는 (스님의) 부도(浮圖)를 만들었는데 이 말이 서울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보살계(菩薩戒)를 받은, (스님의) 제자이면서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소판(蘇判)인 (金)일(鎰)과 집사시랑(執事侍郞)인 (金)관유(寬柔), 패강진도호(浿江鎭都護)인 (金)함웅(咸雄), 전주별가(全州別駕)인 (金)영웅(英雄) 등은 모두 왕족으로 임금님의 덕을 훌륭히 보필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스님의 은혜를 입곤하여서 비록 출가(出家)는 하지 않았지만 가까운 제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스님의) 문인(門人)인 소현대덕(昭玄大德) 석통현(釋通賢), 사천왕사(四天王寺) 상좌(上座) 석신부(釋愼符) 등과 함께 의논하기를 “스님이 돌아가셔서 임금께서도 슬퍼하셨는데 어찌 우리들은 풀이 죽은 채 아무 말 없이 스승에 대한 의리를 빠뜨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僧)·속(俗)이 함께 (대사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과 탑의 명(銘)을 지어줄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왕께서는 옳다고 여기시고, 곧 왕족인 병부시랑(兵部侍郞 : 夏官二卿)인 (金)우규(禹珪)를 시켜 중국에서 사신으로 온 시어사(侍御使) 최치원(崔致遠)을 부르셨다. (최치원이) 왕궁에 이르러 사람을 따라 계단을 오른 뒤, 주렴(珠簾) 밖에 꿇어 앉아 명령을 기다렸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신 성주대사(聖住大師)는 참으로 부처님이 세상에 나신 것과 같은 분이셨다. 전에 나의 부왕(父王 : 景文王)과 헌강왕(憲(獻)康王) 모두 스승으로 섬기셔서, 오랫동안 나라에 이로움을 주셨다. 나도 왕이 되어서는 선왕들의 뜻을 이으려 하였으나, 하늘은 (그런 분을) 남겨주지 않았다. 이에 나의 마음이 더욱 애달프다. 생각컨데 큰 일을 한 사람에게는 큰 이름을 주어야 하므로 시호를 ‘대낭혜(大朗慧)’, 탑의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고 하노라. 그대는 일찍이 중국에 가서 벼슬하고 이제 출세하여 고국에 돌아왔다. 전에 나의 부왕께서 (그대를) 국자(國子)로 뽑아 공부하게 하였고, 헌강왕(憲(獻)康王)께서는 (그대를) 국사(國士)로써 대우하였으니, 그대는 국사(國師)의 명(銘)을 지어서 그 은혜에 보답함이 마땅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치원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황공하옵게도 전하께서 저의 글이 벼에 알맹이는 없으면서 쭉정이만 많고, 계수나무에 향기만 있듯 실속이 없음을 용서하시고, 글을 지어 은혜에 보답하라 하시니 진실로 뜻밖의 행운이옵니다. 다만 대사(大師)께서는 유위(有爲)의 세상에서 무위(無爲)의 신비한 가르침을 널리 펴셨는데, 소신(小臣)의 한계가 있는 하찮은 재주로써 그 끝없이 큰 행실을 기록하려 한다면 약한 수레에 무거운 짐을 싣고, 짧은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의 물을 긷고자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행여 돌이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거나, 거북이 돌아보는 신조(神助)가 없으면 결코 산과 시내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숲과 골짜기의 물에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부디 글짓는 것을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사양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면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대는 힘써 행하라”라고 말씀하면서 크기가 방망이 만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어 내시로 하여금 전해주었는데 곧 (대사의) 문하 제자들이 올린 (대사의) 행장(行狀)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건데 중국에 유학한 것은 대사와 내가 같이 한 것인데, 스승이 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고, 그를 위하여 일을 해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은 높고,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를 위하여) 수고하여야 하는가. 그래서 옛날의 군자들이 배우는 것을 삼가하였던 것인가. 그러나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은 덕을 세우고,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은 말을 다듬으니, 그 덕은 말에 의지하여서야 비로소 그 내용을 제대로 전할 수 있고, 이 말은 덕에 의지하여서야 비로소 오래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덕의) 내용을 제대로 전하게 되면 마음을 멀리 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보일 수 있고, (말이) 오래 전해지게 되면 문장도 또한 옛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때에 하는 것이니, 어찌 다시 감히 실속 없는 글이라고 굳이 사양할 수 있겠는가.

비로소 방망이 같은 행장을 펼쳐보니, 대사께서 중국에 유학하고 신라에 돌아온 연대와, 계(戒)를 받고 선(禪)을 깨치신 인연,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사실, 사찰의 개창 등은 죽은 한림랑(翰林郞) 김입지(金立之)가 지은 성주사비(聖住寺碑)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부처의 제자로서 불법을 널리 전한 행적과 임금의 스승으로서 행한 업적, 세속을 진정시키고, 악마들을 항복시킨 위력, 세상에서 활동할 때는 붕(鵬)처럼 지내고, 은거하여서는 학(鶴)처럼 지낸 일 등은 태부(太傅)에 추증되신 헌강왕께서 직접 지으신 심묘사비(深妙寺碑)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다만 대사께서 열반에 드신 때와 우리 임금께서 탑의 이름을 높이신 것을 드러내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입과 손이 일을 의논하여 나의 생각하는 바대로 일을 진행하려 하는데 그때에 (대사의) 수제자(首弟子) 비구(比丘)가 와서 글을 재촉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러한 나의 생각을 드러내자, 그는 “(金)립지(立之)의 비는 세운지 오래 되어서 그 후 수십 년의 아름다운 행적이 빠져있고, 태부왕께서 신필로 지으신 글은 단지 특별한 대우가 있음을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그대는 옛 선인의 글을 읽고, 직접 임금의 명령을 받았으며, 대사의 행적에 대하여 실컷 듣고, 문하 제자들이 올린 행장을 자세히 보았으니 마땅히 두루 기억하여 빠뜨리지 말고 이야기하여 후대의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그들이 일의 시초와 끝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중국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품에 넣어 가지고 가서 중국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면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내가 어찌 (내용에) 덧붙임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대는 귀찮음을 꺼리어 재주를 숨기지 마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급히 대답하기를 “나는 초가 지붕을 매듯 (간략히) 하려 하였는데, 스님은 나에게 채소를 팔 듯 자세히 하길 바라시는군요”라고 하였다.

드디어 어지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억지로 붓을 움직이려 하니 『한서(漢書)』유후전(留侯傳) 끝 부분에 “(張)량(良)이 임금과 더불어 조용히 천하의 일을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지만 천하의 존망(存亡)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므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므로 대사가 살아 계실 때의 일들이 뛰어난 것이 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뒤의 학자들에 가르침이 되는 것이 아니면 또한 적지 않으려고 한다.

스스로 반고(班固)의 『한서』를 조금이라도 보았다고 자부하면서 이에 글을 적으니 다음과 같다.

빛이 왕성하고 충실하여 온누리를 비출 자질을 갖춘 것으로는 태양에 비길 것이 없고, 기(氣)가 온화하고 두루 통하여서 만물을 기를 능력을 갖춘 것으로는 봄의 바람만한 것이 없다. 이 큰 바람과 태양은 모두 동방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이 두 가지의 자질을 모으고, 산악이 신령한 정기를 내려서 군자의 나라에 태어나 사찰에 우뚝 서게 하였으니 우리 대사가 바로 그 분이다.

(대사의) 법호(法號)는 무염(無染)으로 달마대사의 10대 법손(法孫)이 된다.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 태종무열왕이 8대조이시다. 할아버지는 주천(周川)으로 골품(骨品)은 진골이고 한찬(韓粲)을 지냈으며, 고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조정에서는 재상, 나가서는 장수를 지내 집집에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는 범청(範淸)으로 골품이 진골에서 한 등급 떨어져서 득난(得難)이 되었다. [나라에 5품이 있는데 성이(聖而), 진골(眞骨), 득난(得難) 등이다. (得難은) 귀성(貴姓)을 얻기 어려움을 이야기한 것이다. 『문부(文賦)』에서 ‘혹 구하기는 쉽지만 얻기는 어렵다’고 말한 것을 따서, 6두품의 수가 많지만 귀성이 되기는 제일 낮은 관등[一命]에서 가장 높은 관등[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 4, 5품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만년(晩年)에는 무술을 좋아하였다. 어머니 화씨(華氏)가 꿈에 긴 팔을 가진 천인(天人)이 연꽃을 내려주는 것을 보고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얼마 후에는 다시 꿈 속에 서역의 도인(道人)이 나타나서 스스로 법장(法藏)이라고 하면서 10계(戒)를 주면서 그것으로 태교(胎敎)를 하게 하였다. 마침내 1년이 지나서 (대사가) 태어났다.

대사는 아해(阿孩)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니 중국말과 다르지 않다] 적에 걷거나 앉을 때 반드시 합장을 하고 가부좌를 하였으며,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로 무엇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불상이나 탑을 본떴다. 하루도 부모님의 곁을 떠나지 않다가 아홉 살 때에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눈으로 본 것은 반드시 입으로 암송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해동의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열두 살을 넘기고 나서(13세)는 여러 학문을 비루하게 여기고 불도(佛道)에 들어가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먼저 어머니에게 그 뜻을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이전의 꿈을 생각하고는 울면서 “예[우리말로 허락이다]”라고 하였다. 뒤에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자신이 늦게서야 깨달은 것을 후회하였으므로 기뻐하며 “잘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입으로는 경전을 부지런히 읽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데 힘을 다하였다.

이 절에 법성선사(法性禪師)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일찍이 중국에 가서 능가선(楞伽禪)을 배웠었다. 대사는 이분에게 수년간 배웠는데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이었으므로 법성선사가 말하기를 “빠른 발로 달린다면 뒤에 출발하여도 먼저 도착한다는 것을 나는 너에게서 직접 보았다. 나는 아는 것이 적어서 그대에게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 너와 같은 사람은 중국에 유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사는 “알았습니다” 하였다.

밤중의 새끼줄은 뱀으로 속기 쉽고, 허공의 베올은 분간하기 어렵다. 물고기는 나무에 올라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토끼는 나무 그루터기를 지킨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승이 가르친 것과 내가 깨달은 것에는 서로 나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진주를 얻고, 불을 피웠으면 조개와 부싯돌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도(道)에 뜻을 둔 사람들에게 어찌 꼭 정해진 스승이 있겠는가.

곧 그곳을 떠나 부석산(浮石山)의 석징대덕(釋澄大德)에게 화엄(華嚴)을 배웠는데, 하루에 서른 사람 몫의 공부를 하니 푸른 색과 붉은 색이 남초(藍草)와 천초(茜草)의 원래 색을 무색케 하는 것 같았다. 대사는 조그만 구멍에 담긴 물에서는 잔이 뜰 수 없듯,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곳에서는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생각하고서 “동쪽을 바라보기만 하다가는 서쪽의 담(중국)은 보지 못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가 멀지 않을 터인데 어찌 살던 곳만 고집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선뚯 산에서 나와 바다로 나아가 중국으로 건너갈 기회를 엿보았다. 때마침 나라의 사신이 天子가 하사한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천자에 조회할 일이 있었으므로 그 배에 의지하여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거칠어져서 큰 배가 깨어지니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대사는 벗 도량(道亮)과 함께 한장 널판지에 걸터앉아 바람에 맡긴 채 떠다니게 되었다. 밤낮없이 반달 가량을 떠다닌 후에 검산도(劒山島 : 黑山島)에 표착(漂着)하게 되었다. 무릎 걸음으로 물가에 도착하여 한참이나 실의에 잠겨있다가 말하기를 “물고기 배 속에서도 간신히 몸을 건졌으니 용의 턱밑에도 손을 넣어 (바라는 구슬을) 아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구르는 돌이 아니니 물러남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장경(長慶 : 821~824) 초에 조정사(朝正使)로 가게된 왕자 흔(昕)이 당은포(唐恩浦)에 배를 대었기에 태워줄 것을 부탁하니 그러라고 하였다. 마침내 지부산(之罘山) 기슭에 도착해서는 전에는 어려웠던 일이 이제 쉽게 됨을 생각하고서 해약(海若 : 바다의 신)에게 공손히 절하고서 “큰 파도를 자제하고, 바람의 마군과 잘 싸우셨습니다”고 하였다.

(스승을 찾아) 다니다가 대흥성(大興城) 남산(南山)의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러서는 화엄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부석사에서 배운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 한 얼굴이 검은 노인이 말을 걸고서 “멀리 자신 밖의 사물에서 (道를) 구하려 하기보다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닫고서 이때부터 경전 공부하는 것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불광사(佛光寺)에서 여만(如滿)에게 도(道)를 물었다. 여만은 강서마조(江西馬祖)에게서 심인(心印)을 얻었고, 향산(香山)의 백상서(白尙書) 악천(樂天)과는 불법을 같이 이야기하는 벗이었지만 (대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매우 부끄러워 하면서 “내가 여러 사람을 겪어 보았지만 이 신라사람같은 사람은 있지 않았다. 후일에 중국에서 선(禪)이 사라진다면 곧 동이(東夷)에 가서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곳을 떠나 마곡(麻谷) 보철화상(寶徹和尙)을 찾아가 모시면서 힘든 일을 하는 것을 가리지 않고, 남이 하기 어려워 하는 것을 쉽게 해내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선문(禪門)에 있어서 유검루(庾黔婁)와 같은 남다른 행실을 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보철화상은 대사의 노력을 현명히 여기고서 하루는 불러서 말하기를 “전에 나의 스승인 마화상(馬和尙 : 馬祖道一)께서 나와 헤어질 때에 말씀하시길 ‘봄에 꽃이 많으면 가을에 열매가 적은 법이다. 보리수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을 슬프게 여긴다. 지금 너에게 심인(心印)을 전하니 후일에 제자 가운데 재주가 뛰어나서 북돋아 줄만한 사람이 있으면 북돋아 주어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간다는 말은 거의 예언에서 나온 말이니 해뜨는 곳(동쪽)에서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바탕이 거의 완숙해졌을 것이다. 만일 네가 동쪽 사람으로서 눈으로 말할 만한 사람을 얻어 잘 이끌어 지혜의 물이 바다 바깥(중국 바깥)에 까지 덮도록 한다면, 그 덕이 적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다. 스승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네가 왔으니 기쁘구나. 이제 심인(心印)을 전하여 동방에서 선종의 으뜸가는 사람이 되게 하니 가서 삼가 실행하거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지금은 강서(江西) 마조(馬祖)의 수제자이고, 후세엔 해동(海東) 선문(禪門)의 할아버지가 될 터이니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구나”고 하였다.

그곳에 머무른 지 얼마 안되어 보철화상이 세상을 떠나 묵건(墨巾)을 머리에 쓰고 이내 말하기를 “큰 배가 이미 떠나버렸는데 작은 배가 어디에 묶여 있을 것인가”라 하고 이때부터 각지를 유랑하였는데 바람처럼 하여 그 기세를 막을 수 없고,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분수(汾水)를 건너고 곽산(崞山)을 오르기까지 오래된 (불교의) 자취는 반드시 찾아가고, 참된 승려는 반드시 만나 보았다. 머무르는 곳은 인가를 멀리하였으니 그것은 위태로운 것을 편안히 여기고 고생을 달게 여기며, 몸은 종처럼 부리되, 마음은 임금처럼 받들기 위해서였다. 이런 가운데도 오로지 병든 사람을 돌보고, 고아와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도와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지독한 추위나 더위가 닥쳐,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손이 트고 얼음이 박히더라도 전혀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 이름을 듣는 사람은 멀리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의를 표하면서 동방(東方)의 대보살(大菩薩)이라고 크게 떠들어댔다. (중국에서의) 30여 년간의 행적은 이와 같았다.

회창(會昌) 5년(845)에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황제가 (외국 승려들을 귀국하도록)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여러 성(城)과 바꿀 수 있는 귀한 보배가 다시 돌아왔으니 이것은 하늘이 해주신 일로 땅에는 복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마치 벼와 삼같이 빽빽하였다. 서울에 들어와 어머니를 찾아뵈니 (어머니는) 크게 즐거워하면서 “돌이켜 보니 전에 내가 꾼 꿈이 우담화가 한 번 드러난 것이 아니겠느냐. 바라건대 내세를 제도하라. 나는 다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에 곧 북쪽으로 나아가서 종신토록 몸 붙일 곳을 찾아다녔다. 그때 마침 왕자 흔(昕)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산중(山中)의 재상(宰相)으로 불렸는데 우연히 바라는 바가 합치되었다. (昕이) 말하기를 “스님과 나는 함께 용수(龍樹) 을찬(乙粲)을 조상으로 하고 있으니, 스님은 안팎으로 모두 용수(龍樹)의 자손입니다. 참으로 놀라와 감히 미칠 바가 못됩니다. 그러나 바다 밖에서 함께 했던 일이 있으니 옛적의 인연이 결코 얕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웅천주(熊川州) 서남쪽 모퉁이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나의 조상인 임해공(臨海公) [휘(諱)는 인문(仁問)이고, 당나라가 예맥(濊貊 : 실은 高句麗를 말함)을 정벌할 때에 공이 있어서 임해공(臨海公)으로 봉해졌다]께서 봉토로 받은 곳입니다. 그 사이 커다란 불이 일어나 사찰이 반쯤은 재가 되어버렸으니, 자비롭고 현명하신 분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대사는 대답하기를 “인연이 있다면 머물러야겠지요”라고 하였다.

대중(大中 : 847~859) 초에 그곳으로 가서 머물기 시작하면서 말끔히 단장하였던 바, 얼마 되지 않아 도(道)가 크게 행하여지고 절은 크게 번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의 먼 곳에서부터 도(道)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천리 먼 길을 반걸음처럼 가깝게 여기고 찾아오니 그 수가 이루 셀 수 없었다. 이처럼 무리가 많아졌지만 대사는 종이 늘 쳐주기를 기다리고 거울이 얼굴을 비춤에 피곤해 하지 않듯, 온 사람은 모두 지혜의 횃불로 그 눈을 이끌어 주고, 불법의 즐거움으로 배를 채워주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을 이끌어 주고 무지(無知)한 습속을 변화시켰다.

문성대왕(文聖大王)께서는 대사가 행하는 일이 왕도(王道)를 행함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들으시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기셔서 급히 어찰을 보내어 위로하였으며, 또한 대사가 산중(山中) 재상(宰相)에게 대답한 네 마디 말[有緣則住]을 중하게 여기셔서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바꾸고 대흥륜사(大興輪寺)에 편입시키도록 하셨다. 대사가 왕의 사자(使者)에게 대답하기를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지어주신 것만 하여도 절로서는 영광스럽고 지극한 총애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중이 외람되게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이것은 바다새가 바람을 피해오자 뭍의 새가 봉황으로 오해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흐린 날에는 숲에 숨어서 자신의 무늬를 윤택하게 한다는 표범에게는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즉위 전의) 헌안대왕(憲安大王)께서는 사찰의 시주(施主)인 계서발한(季舒發韓)인 위흔(魏昕)과 더불어 남북(南北) 재상(宰相)[각기 자신의 관사에 있어 좌상(左相), 우상(右相)과 비슷하였다] 이었는데, 멀리서 제자의 예를 행하며 향과 차를 예물로 보내어 한달도 그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렇게 (大師의) 명성이 온 나라에 가득하여 선비들은 대사의 선문(禪門)을 모르는 것을 일세의 수치로 여길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대사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물러나와서 반드시 감탄하면서 “직접 뵈니 귀로 듣던 것보다 백배나 낫다. 입으로 말씀하지 않아도 벌써 마음에 와 있었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래서 원숭이나 호랑이가 관(冠)을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사람들도 곧 그 조급함을 떨치고, 사나운 마음을 고쳐서 착한 길로 다투어 달려 나갔다. 헌안왕께서 즉위하심에 이르러 대사에게 글을 보내어 도움이 될 말을 청하였는데, 대사는 대답하기를 “주풍(周豊)이 노공(魯公)에게 대답한 말이 뜻이 깊습니다. 예경(禮經)에 적혀있으니 자리 옆에 새겨 두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사(太師)를 추증받으신 선대왕(先大王 : 景文王)께서 즉위하셔서도 (대사를) 공경하고 존중하심이 선조(先朝 : 憲安王) 때와 같아서 대우해 주는 것이 나날이 두터워졌다. 일을 시행할 때에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어 물어본 후에 거행하였다. 함통(咸通) 12년(871) 가을에 (왕께서는) 대사에게 교서(敎書)를 급히 보내고 사람을 시켜 부르면서 말하기를 “산림(山林)을 어째서 가까이 하시면서 도성(都城)은 멀리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대사는 제자들에게 “갑자기 진후(晉侯)가 백종(伯宗)을 부르듯하니 (산문에서 밖에 나오지 않았던) 혜원공(慧遠公)에게는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도(道)를 행해지게 하려면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부처께서 (불법이 전해지도록) 부촉(付囑)하신 바를 생각하니 내가 가야 되겠다”라고 말하고 즉시 서울에 도착하여 왕을 뵈었다. 선대왕께서는 면복(冕服) 차림으로 절을 하여 스승(王師)으로 삼았고, 왕비와 세자, 그리고 왕의 동생이신 상국(相國) [돌아가신 후에 왕으로 높이고 시호를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고 하였다]과 여러 왕자, 왕손들이 빙 둘러싸고 한결같이 우러렀는데 마치 옛날 가람의 벽 그림에 서역의 여러 왕들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제자가 말 재주는 없습니다만, 글 짓는 것은 조금 좋아합니다. 전에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유(有)에만 얽매이거나, 무(無)만을 고집하면 편벽된 이해에 나아갈 뿐이다. 참된 근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반야(般若)의 절대적인 경지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절대적인 경지가 무엇인지 가르침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경지가 이미 절대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설명할) 이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전하는 것(心印)이니 말없이 행해질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과인은 조금 더 배우기를 청합니다”고 하자 대사는 제자 중의 뛰어난 자에게 번갈아 가며 질문을 하게 하여 차근차근 속속들이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주어 막힌 것을 해결하고 번거로운 것을 떨쳐 버리기를 마치 가을 바람이 어두침침한 노을을 밀어내듯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셔서 대사를 늦게 만나본 것을 안타까와 하시며 말씀하시길 “성인께서 자연스럽게 바른 길(南宗)을 가리켜 주셨는데, 순(舜)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라고 어찌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궁에서 나오자 재상들이 다투어 마중하니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일반 백성들이 뒤쫓으며 따르니 떠나고자 하여도 그럴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귀한 보배(佛性)가 있음을 깨달아 이웃집의 보석을 탐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새장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생활을 괴롭게 여겨서 (서울을) 떠나고자 하였다. 임금께서는 억지로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곧 교서(敎書)를 내려서 상주(尙州)의 심묘사(深妙寺)가 서울로부터 멀지 않으니 선종의 별관으로 삼아 머무르라고 하셨다. 대사는 거역할 수 없어 그곳에 가서 머물렀는데, 잠시 머물지라도 반드시 수리하였으니 곧 엄연한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부(乾符) 3년 (876) 봄에 선대왕(先大王)께서 병환이 나셨는데 근시(近侍)에게 “빨리 우리 대의왕(大醫王)을 모셔오라”고 명하셨다. 사자가 오자 대사께서는 “산승(山僧)의 발이 왕궁에 이르는 것은 한 번만 하여도 심하다고 할 것이므로 나를 아는 사람은 ‘성주(聖住)가 머무르는 곳이 없게 되었다 [無住]’고 말할 것이고,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염(無染)이 물이 들었다 [有染]’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임금과 서로 맹세한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임금께서 도리천에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찌 가서 작별인사를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다시 왕궁으로 가서 약이 되는 말씀을 하여 주고, 잠계(箴戒)를 베푸시니 (왕께서) 깨닫는 가운데 병이 조금 나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한 달이 지나서 (경문왕이 돌아가시고) 헌강대왕께서 거상(居喪)을 하게 되었다. (왕께서는) 울면서 왕족인 훈영(勛榮)을 통하여 뜻을 전하였으니 “내가 어려서 부모의 상을 당하여 정사를 담당할 수 없습니다. 임금을 인도하고 부처를 받들어 사해(四海)의 사람을 널리 구제하는 것은 자기 한 몸만을 착하게 하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컨데 대사께서는 멀리 계시지 마시고 (서울에서) 머무를 곳을 고르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사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스승의 가르침은 6경(經)에 기록되어 있고, 지금 보필할 사람은 3경(卿)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늙은 산승(山僧)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누리[蝗]처럼 앉아서 땔나무와 곡식을 축낼 뿐입니다. 단지 세 마디 말로 남겨드릴 만한 말씀이 있으니 ‘관리를 잘 등용하라 [能官人]’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산의 무리를 이끌고 새처럼 떠나고 말았는데, 이때부터 역마(驛馬)들이 왕명을 전하려고 산중에 그림자를 이었다. 역졸(驛卒)들은 가야할 곳이 성주사인 것을 알면 곧 모두 뛸듯이 기뻐하며 손을 모아 말고삐를 고쳐잡고 왕명이 한걸음이라도 늦을까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왕명을 전하는 근시(近侍)들은 급히 전할 말이 있어도 쉽게 행해질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건부제(乾符帝)가 헌강대왕의 즉위를 인정한 해(878년)에 (임금께서는) 나라 안의 진언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가져오고 해로움을 없앨 수 있는 계책을 올리게 하였는데 특별히 우리나라의 종이를 사용하여 말을 적게 하였다. 천자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다. 나라에 이익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사는 하상지(何尙之)가 송(宋) 문제(文帝)에게 바친 말로써 대답하였다. 태부왕(太傅王)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동생인 예부령(禮部令 : 南宮相)에게 말씀하시길 “삼외(三畏)는 불교의 삼귀의(三歸依)에 비교될 수 있고, 오상(五常)은 불교의 오계(五戒)와 비슷하다. 왕도(王道)를 잘 실천하는 것이 부처의 마음에 부합되는 것이다. 대사의 말이 옳은 것이다. 너와 나는 성실하고 부지런히 실천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건부제(乾符帝)가 (黃巢의 亂을 피하여) 서쪽으로 피난한 중화(中和) 원년 (881쪽) 가을에 임금께서 시인(侍人)에게 “나라에 커다란 보배 구슬이 있는데 평생토록 궤에 감추어 두는 것이 잘한 일인가?”하고 묻자 “아닙니다. 때때로 꺼내어서 많은 백성들의 눈을 뜨게하고 사방 이웃 나라의 마음을 쏠리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나에게 마니(摩尼)의 귀한 구슬이 있는데 숭엄산(崇嚴山)에서 빛을 감추고 있다. 만약 그 감춘 것을 열기만 한다면 3천세계를 환히 비출 수 있으니 수레 열둘을 비춘다는 구슬이야 비교가 되겠는가. 나의 부왕께서 간절히 맞이하셨을 때, 두 번이나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옛날에 소하(蕭何)는 한 고조가 한신(韓信)을 대장(大將)으로 임명하면서 아이 부르듯 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 하면서 상산(商山)의 네 노인을 부를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하였다. 지금 천자께서 피난하셨다는 말을 들었으니 달려가서 위로해 드려야 할 것인데, 천자를 위로함에는 부처에게 의지함이 가장 우선일 것이다. 이제 대사를 맞아들임에 있어서는 반드시 세상의 평판에 따를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왕이라고 하여 나이 많고 덕이 높으신 분에게 무례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며 관직이 높은 사람을 사자(使者)로 보내고 말을 겸손하게 하여 부르셨다. 이에 대사는 “외로운 구름이 산에서 나오는 것이 어찌 다른 마음이 있어서이겠는가. 대왕의 정치에 인연이 있으니 고집함이 없는 것이 뛰어난 선비[上士]의 도리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와서 왕을 뵈었다. 임금께서 대사를 인견함은 선조(先朝 : 景文王) 때의 예절과 같았는데 예에 덧붙여진 것으로서 손꼽을 만한 것으로는, 임금께서 직접 음식을 봉양한 것이 첫째이고, 손으로 향을 전하신 것이 둘째이며, 몸·입·뜻의 삼업(三業)으로 세 번이나 경의를 표하신 것이 셋째이며, 작미로(鵲尾爐)를 잡고 영생의 인연을 맺은 것이 넷째이며, 법칭(法稱)에 ‘광종(廣宗)’을 더하여 준 것이 다섯째이며, 다음날 어진 이들에게 대사가 머무는 절에 나아가 기러기처럼 열을 지어 인사드리도록 한 것이 여섯째이며, 나라 안의 시(詩)를 짓는 사람들에게 대사를 송별하는 시(詩)들을 짓게 하여서 재가제자(在家弟子)인 왕족 소판(蘇判) 억영(嶷榮)이 가장 먼저 시(詩)를 지으니 그것을 거두어서 두루마리로 만들고, 시독(侍讀)이며 한림관(翰林官)인 박옹(朴邕)이 거기에 인(引)을 붙여서 떠날 때에 준 것이 일곱째이며, 행차를 담당하는 관리들에게 정결한 방을 준비하도록 거듭 명하여 그곳에서 작별하신 것이 여덟째이다.

고별에 임하여 임금께서 신묘한 비결(秘訣)을 구하시니, 이에 제자들에게 눈짓하여 진요(眞要)를 들려주라고 하였다. 순예(詢乂), 원장(圓藏), 허원(虛源), 현영(玄影)과 같은 이는 사선(四禪)을 행하여 청정(淸淨)을 얻은 사람들로서, 지혜의 실을 뽑아 깊은 뜻을 짜냈는데, 뜻을 기울여 소홀함이 없었고, 임금의 마음을 계발(啓發)함에 여유가 있었다. 임금께서 매우 즐거워하여 두 손을 마주잡고 경의를 표하며 말씀하기를 “전에 저의 부왕(父王)께서는 증점(曾點)과 같은 현인이셨는데, 지금 저는 증삼(曾參)과 같은 아들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를 이어서 덕이 있는 사람에게 지극한 도리를 얻고, 그것을 받들어 간직함으로써 뒤엉켜진 근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 위수(渭水)가에서 낚시하던 강태공(姜太公)은 사실은 명예를 낚으려는 자였으며, 흙다리 위의 장량(張良)도 그런 전철을 밟았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여도 단지 세 치의 혀를 놀린 것에 불과하니 어찌 나의 스승께서 은밀한 말로써 마음을 전한 것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받들어 실천하고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부왕(太傅王)께서는 아름다운 말과 시문(詩文)을 잘하셔서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도 관계없이 입을 여시면 짝이 맞는 말을 만드셨는데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하여 둔 것 같았다.

대사께서 왕궁을 물러나온 후에 다시 왕손인 소판(蘇判) 일(鎰)의 청함을 받아들였다. 같이 여러 차례 이야기를 주고 받고선 (대사께서) 감탄하여 말씀하시길 “옛날의 임금들은 장수하는 분은 있어도 생각이 깊지 못하였는데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그 둘을 겸비하셨고, 신하들은 재상이 될만한 재주는 있어도 그러한 덕망이 없었는데 그대는 두루 갖추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마땅히 덕을 좋아하십시오.”라고 하고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산으로 돌아가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에 임금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방생장(放生場)의 경계를 표시하니 새와 짐승이 즐거워하였고, 뛰어난 글씨로 ‘성주사(聖住寺)’의 제액(題額)을 써주시니 마치 용과 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좋은 일도 끝이 있고 한창 때도 끝나는 법이다. 정강대왕(定康大王)께서 즉위하셔서는 (景文王과 憲(獻)康王) 양조(兩朝)에서 은혜를 베푼 것을 본받아 행하고자 하여 승려와 속인으로 거듭 사신을 보내어 맞아 오게 하였으나 (대사는)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하였다. 태위대왕(太尉大王 : 眞聖王)께서는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온 나라를 덮었고 덕있는 사람을 존경하기를 높은 산을 바라보듯 하였다. 즉위하신 지 9개월만에 안부를 묻는 사자가 10번이나 다녀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는 허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國醫가) 도착하여 아픈 정도를 물으니 대사는 살짝 웃으며 “노병(老病)일 뿐이니 번거롭게 치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國醫가) 미음을 하루에 두 번 들이되 반드시 (朝夕공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은 후에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대사께서 식력(食力)을 잃게 될까 걱정하여 몰래 종 치는 사람에게 거짓으로 (여러 번) 치도록 부탁하였다. 하지만 대사께서는 직접 창 밖을 내다보시고 그 거짓을 알고 그만두게 하셨다. 돌아가실 즈음에 옆의 시중드는 사람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유훈(遺訓)을 남기셨다. “내 나이 이미 80[中壽]을 넘었으니, 죽음[大期]을 피하기 어렵다. 나는 멀리 떠날 것이니 너희들은 잘 지내도록 하라. 공부하기를 한결같이 하며, (수행의 태도를) 지키고 잃지 말라. 옛 관리들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지금 선(禪)을 닦는 사람들이야 힘써 노력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대사는 성품이 공손하고 삼가하여, 말이 좋은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았다. 『예기(禮記)』에 이른바 “몸은 겸손하고, 말은 잘 못하는 듯이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학승(學僧)들을 반드시 ‘선사(禪師)’라고 불렀으며,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그 사람의 신분이 다르다고 해서 대우를 다르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방에 가득한 자비에 제자들이 즐거워하며 따랐다.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는 5일을 기한으로 하여 의심나는 것을 묻게 하였다.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은 마땅히 마음의 스승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음이 걱정이지, 도(道)가 너희를 멀리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배우지 못한) 시골뜨기라고 할지라도 속세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달리면 반드시 나아가게 될 것이니, 부처와 스승이라고 해서 별다른 종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저 사람이 마신 것이 나의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저 사람이 먹은 것이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니, 노력하여 스스로 마시고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다르다는 종지(宗旨)를 보지 못하였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이고, 나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생활하며, 교사(巧詐)한 마음을 버리는 것, 이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행동에 가까울 것이다. (부처의) 그 말은 분명하니 그대로 따르고, (부처의) 그 뜻은 오묘하니 그대로 믿으라. 도(道)를 부지런히 행할 뿐 샛길 속의 샛길은 보지 말아라.”

(대사는) 젊어서부터 노년(老年)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낮추어서 먹는 것을 남과 다르게 하지 않았고, 입는 것은 늘 같은 옷이었다. 건물을 짓고 수리할 때에는 남들보다 앞장서서 일하고 늘 “가섭조사(迦葉祖師)께서도 진흙을 이기신 적이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잠깐이라도 편히 지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때로는 물을 길어 나르고, 땔나무를 나르는 일까지도 직접 하시면서 “산이 나 때문에 더럽혀졌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기도 하였다. 자기의 몸을 다스리고 일에 힘쓰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대사께서는 어려서 유가(儒家)의 경전을 읽었고, 그 공부한 것이 여전히 입에 남아 있었으므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에는 위와 같이 韻을 맞춰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문하(門下)의 제자로서 이름을 들 수 있는 사람이 거의 2천여 명이 되고,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 사찰을 주재하는 이는 승량(僧亮), 보신(普愼), 순예(詢乂), 심광(心光) 등이다. 그리고 문하의 손자에 해당하는 자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무리가 번성하니 실로 마조도일이 용의 새끼를 길렀고, 동해(東海 : 新羅)가 서하(西河 : 중국)를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논(論)하여 말한다. 『춘추(春秋)』에 말하지 않았던가. 훌륭한 집안[公侯]의 자손은 반드시 그 조상을 본받는다고. 옛날 무열대왕께서 을찬(乙粲)으로서 예맥[실은 백제와 고구려]을 무찌를 군사를 빌기 위하여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명을 받들고 소릉황제(昭陵皇帝)를 알현했을 때, 직접 황제에게 중국의 역법(曆法)을 시행하고 의복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기를 청하였었다. 이에 황제가 허락하고 중국 의복을 하사하고, 특진(特進)의 관작(官爵)을 내려주셨다. 하루는 (황제께서) 여러 나라의 왕자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는데, 술을 크게 베풀고 온갖 보화를 쌓아놓고 마음대로 가지라고 하셨다. 대왕께서는 술 드시는 것은 예의를 지켜 어지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셨고, 화려한 비단은 지혜를 써서 많이 얻으셨다. 하직인사를 드릴 때, 황제께서는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며 “나라의 인재로다”라고 감탄하셨고, 중국을 떠나올 때에 황제께서 직접 짓고 쓴 온탕(溫湯)과 진사(晉祠)의 두 비문(碑文)과 직접 편찬하신 『진서(晉書)』 한 질을 내려 주셨다. 당시 비서감(秘書監 : 蓬閣)에서 이 책을 베껴 두 질을 올렸는데 한 질은 황태자에게 주시고, 다른 한 질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었다. 또한 높고 귀한 관리들에게 장안성(長安城) 동문(東門) 밖에 나아가 전송하라고 명하셨으니, 이러한 각별한 은총과 두터운 예우에는 지혜에는 어두운 사람일지라도 보고 들어서 놀라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미개에서 문명국으로 되었는데, 그로부터 8세손(世孫)인 대사께서는 중국에 유학하여 배운 것으로 우리나라를 교화시켜서 이상적인 나라로 변화시키셨으니 (그 공은) 비할 데 없이 크다. 이런 분이 아니라면 누구를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선조(先祖)는 두 적국(敵國)을 평정하고 문명에 접하게 하여주셨고, (後孫인) 대사께서는 불법을 방해하는 악한 것을 물리쳐서 마음의 덕을 닦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두 임금께서는 스승으로 모셨고, 사방의 백성은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는데, (대사가) 원하는 대로 따르면서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그러니 5백년 마다 현인(賢人)이 나타난다는 말대로 성인이 이 세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니겠는가. ‘(훌륭한 집의 자손은 반드시) 조상을 본받는다’는 말에 어찌 부족함이 있는가.

전에 장량(張良)은 한(漢) 고조(高祖)의 스승이 되었으면서, 만호(萬戶)에 봉(封)해지고 제후가 된 것을 크게 자랑하여 한(韓)나라 정승의 자손으로서 지극히 명예로운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비루한 일이다. 비록 신선술(神仙術)을 공부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태양 위로 날아 갈 수 있겠는가. 중간에 그쳐서 학(鶴) 위에 한 몸을 얹고 다니는 데에 머무를 뿐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 대사가 세속의 무리 가운데 뛰어나서, 여러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를 깨끗이 하는 것으로 시종일관 한 것에 견줄 수 있겠는가.

뛰어난 덕의 모습을 칭송하는 데에는 옛날부터 송(頌)을 사용하였으니, (불교의) 게송(偈頌)도 비슷한 것이다. 침묵을 깨고서 명(銘)을 지으니 다음과 같다.

도(道)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늘 몸에 지니는 것은 풀 위의 이슬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고, 불법에 나아가 참된 부처가 되는 것은 물 속의 달을 잡는 것과 같다. 그런데 도를 늘 몸에 지니고 참된 부처가 된 사람은 해동(海東)의 김상인(金上人)이다. 본래 성골(聖骨)의 자손이고, 상서로운 연꽃을 인연으로 하여 태어났네. 오백년만에 땅을 골라 태어나서, 열세 살에 속세를 벗어났네. 화엄이 불법에의 길을 열어주었고, 배를 타고 求法에 나섰네. (하나)

중원에서 두루 공부하고서, 어느 것에 집착하지 않음을 깨쳤네. 선진(先進)들이 모두 감탄하네, 수행에 따를 자 없다고. 중국에서 불교가 도태되어 귀국한 것은 하늘이 기회를 주신 것이네. 깨우침의 구슬이 마곡(麻谷)에서 빛나고, 거울 같은 눈이 우리나라를 비추었네. (둘)

이미 봉황의 훌륭한 모습, 뭇 새가 다투어 따르네. 한번 용의 변화하는 재주를 보라. 보통 생각으론 헤아리지 못하리. 온나라에 능력을 보이고서 성주사(聖住寺)에 힘써 머무르셨네. 여러 절을 두루 돌아다님에 바위 사이 길 다니지 않음이 없었네. (셋)

임금의 총애를 바라지 않았고, 임금의 뜻에 영합하지도 않았네. 때가 이르면 나아갔으니 그것은 옛 인연과 불법을 전하라는 부처의 부촉을 위해. 두 왕이 존경하니 온 나라가 부처의 가르침에 젖었네. 용이 나오면 골짜기가 가을빛, 구름이 돌아가면 바다와 산이 저녁. (넷)

세상에 나오면 섭룡(葉龍)보다 귀하였고, 세상을 벗어나면 기러기보다 더 높이 날았네. 물을 건너 나옴은 소부(蘇父)를 비루하게 여겼기 때문이고, 산에서 수도할 땐 승량(僧朗)보다 열심이었네. 한 번 귀국한 뒤로 세 번 궁중에 갔네. 어리석은 사람은 그르다고 생각하지만, 지극한 이치엔 다름이 없네. (다섯)

이 도(道)는 담백하여 맛이 없지만, 힘써서 마시고 먹어야 하네. 남이 마신 술 내가 취하지 않고, 남이 먹은 밥 내가 부르지 않네. 대중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지라 했나, 명예는 겨처럼 부귀는 쭉정이처럼. 세속의 몸가짐은 무엇을 권했나, 인(仁)을 갑옷으로 의(義)를 투구로. (여섯)

이끌어 지도함에 빠뜨림 없어, 실로 인류의 스승이시다. 전에 살아계심엔 온나라가 유리(琉璃)같더니, 돌아가심에 온통 가시밭이네. 열반은 왜 이리 빠른지, 전과 지금 다같이 슬프네. (일곱)

탑(塔)을 만들고 비(碑)를 새겨서 형체는 감추고 자취는 드러낸다. 사리탑은 푸른 산에 자리하고, 거북이 업은 비석은 푸른 절벽에 버티고 섰네. 이것이 어찌 여태까지의 마음이 되리오마는, 다만 문자로라도 살펴서 뒤에 오는 사람이 오늘을 알게 함이니, 지금에 옛일이 드러남과 같은 것. (여덟)

임금의 은혜, 천년을 흐르고, 대사의 교화는 만대(萬代)에 존경되리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로 인재를 키우고, 누가 줄없는 거문고로 가르침을 이을까. 선경(禪境)을 비록 지키지 못한다 해도 번뇌야 어찌 들어오리오. 계족산(鷄足山) 아래서 미륵을 기다림이니, 어서 동쪽 계림(鷄林)에 나타나소서.

종제(從弟)인 조청대부(朝請大夫), 전(前)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인연(崔仁滾)이 왕명을 받들어 씀.

판독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2]

有唐新羅國故兩朝國師敎諡大朗慧和尙白月葆光之塔碑銘幷序」

淮南入本國送國信詔書等使前東面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

帝唐揃亂以武功易元以文德之年暢月月缺之七日日蘸咸池時海東兩朝國師禪和尙盥浴已趺坐示滅國中人如喪左右目矧門下諸弟子乎嗚呼應東身者八十九春服西戎者六十五夏去世三日倚繩座儼然面如生門人詢乂等號奉」

遺身本假肂禪室中上聞之震悼使弔以書賻以穀所以資淨供而贍玄福越二年攻石封層冢聲聞玉京菩薩戒弟子武州都督蘇判鎰執事侍郞寬柔貝江都護咸雄全州別駕英雄皆王孫也維城輔君德險道賴師恩何必出家然」

後入室遂與門人昭玄大德釋通賢四天王寺上座釋愼符議曰師云亡君爲慟奈何吾儕人灰心木舌缺緣飾在參之義乎迺白黑相應請贈諡曁銘塔敎曰可旋命王孫夏官二卿禹珪召桂苑行人侍御使崔致遠至蓬萊宮因得竝」

琪樹上瑤墀跽竢命珠箔外上曰故聖住大師眞一佛出世昔文考康王咸師事福國家爲日久余始克纘承願繼餘先志而天不憖遺益用悼厥心余以有大行者授大名故追諡曰大朗慧塔曰白月葆光乃嘗西宦絲染錦歸顧」

文考選國子命學之康王視國士禮待之若宜銘」

國師以報之謝曰主臣殿下恕粟饒浮秕桂飽餘馨俾報德以文固多天幸第大師於有爲澆世演無爲秘宗小臣以有限麽才紀無限景行弱轅載重短綆汲深其或石有異言龜無善」

顧決叵使山輝川媚反瀛得林慙澗愧請筆路斯避上曰好讓也盖吾國風善則善已然苟不能是惡用黃金牓爲爾勉之遽出書一編大如椓者俾中涓授受乃門弟子所獻狀也復惟之西學也彼此俱爲之而爲師者何人爲役者何人豈心」

學者高口學者勞耶故古之君子愼所學抑心學者立德口學者立言則彼德也或憑言而可稱是言也或倚悳而不杇可稱則心能遠示乎來者不杇則口亦無慙乎昔人爲可爲於可爲之時復焉敢膠讓乎篆刻始繹如椓狀則見大師西遊」

東返之歲年稟戒悟禪之因緣公卿守宰之歸仰像殿影堂之開剏故翰林郞金立之所撰聖住寺碑叙之詳矣爲佛爲孫之德化爲君爲師之聲價鎭俗降魔之威力鵬顯鶴歸之動息贈太傅獻康大王親製深妙寺碑錄之備矣顧腐儒之今作也止」

宜標我師就般涅槃之期與吾君崇窣堵婆之號而已口將手議役將自適其適這有上足苾芻來趣韲臼語及斯意則曰立之碑立之久矣尙闕數十年遺美太傅王神筆所紀蓋顯示殊遇云爾吾子口嚼古賢書面飮今君命耳飫國師行目」

醉門生狀宜廣記而備言之殆貽厥可畏俾原始要終脫西笑者或袖之脫西人笑則幸甚吾敢求益子無憚煩狂奴態餘率爾應曰僕編苫者師買采乎遂絆猿心强搖兎翰憶得西漢書留侯傳尻云良所與上從容言天下事甚衆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則大師時順間事蹟犖犖者星繁非所以警後學亦不書自許窺一班於班史然於是乎管述曰光盛且實而有暉八紘之質者莫均乎曉日氣和且融而有孚萬物之功者莫溥乎春風惟俊風與旭日俱東方自出也則天鍾斯二餘慶嶽降于」

一靈性俾挺生君子國特立梵王家者我大師其人也法號無染於圓覺祖師爲十世孫俗姓金氏以武烈大王爲八代祖大父周川品眞骨位韓粲高曾出入皆將相戶知之父範淸族降眞骨一等曰得難(國有五品曰聖而曰眞骨曰得難」

言貴姓之難得文賦云或求易而得難從言六頭品數多爲貴猶一命至九其四五品不足言)晩節追蹤趙文業母華氏魂交覩脩臂天垂授萬殳花因有娠幾踰時申夢胡道人自稱法藏授十護充胎敎過朞而誕大師阿孩(方言謂兒與華无異)時行坐必掌合趺對至與群兒戱畵墁聚沙必摸樣像塔而不忍」

一日違膝下九歲始鼓篋目所覽口必誦人稱曰海東神童跨一星終有隘九流意入道先母白母念已前夢泣曰䚷(方言許諾)後謁父父悔己晩悟喜曰譱遂零染雪山五色石寺口精嘗藥力銳補天 有法性禪師嘗扣馹䮚伽門于中夏者大師師事數秊撢」

索無孑遺性歎曰迅足駸駸後發前至吾於子驗之吾悏矣無餘勇可賈於子矣如子者宜西也大師曰惟夜繩易惑空縷難分魚非緣木可求兎非守株可待故師所敎己所悟互有所長苟珠火斯來則蚌燧可棄凡志於道者何常師之有尋」

迻去問驃訶健拏于浮石山釋登(燈?)大德日敵三十夫藍茜沮本色顧坳盃之譬曰東面而望不見西墻彼岸不遙何必懷土遽出山竝海覗西泛之緣會國使歸瑞節象魏下仛足而西及大洋中風濤欻顚怒巨艑人不可復振大師與心友道亮跨隻」

板恣業風通星半月餘飄至劒山島勑行之碕上悵然甚久曰魚腹中幸得脫身龍頷下庶幾攙手我心匪石其退轉乎洎長慶初朝正王子昕艤舟唐恩浦請寓載許焉旣達之罘㯟顧先難後易土揖海若曰珍重鯨波好戰風魔行至大興城南山」

至相寺遇說雜花者猶在浮石時有一䃜顔耆年言提之曰遠欲取諸物孰與認而佛大師舌低大悟自是置翰墨遊歷佛光寺問道如滿滿佩江西印爲香山白尙書樂天空門友者而應對有慙色曰吾閱人多罕有如是新羅子他日中國失」

禪將問之東夷也去謁麻谷寶澈和尙服勤無所擇人所難己必易衆目曰禪門庾異行 澈公賢苦節嘗一日告之曰昔吾師馬和尙訣我曰春蘤繁秋實寡攀道樹者所悲吒今授若印異日徒中有奇功可封者封之無使刓復云東流之說盖出鉤讖」

則彼日出處善男子根殆熟矣若若得東人可目語者畎道之俾惠水丕冒於海隅爲德非淺師言在耳吾喜若徠今印焉俾冠禪侯于東土往欽哉則我當年作江西大兒後世爲海東大父其無慙先師矣乎㞐無何師化去墨巾離首乃曰筏旣捨」

矣舟何繫焉自爾浪遊飄飄然勢不可遏志不可奪於渡汾水登崞山跡之古必尋僧之眞必詣凡所止舍遠人煙大要在安其危甘其苦役四體爲奴虜奉一心爲君主就是中顓以視篤癃恤孤獨爲己任至祈寒酷暑且煩暍或皸瘃侵曾無卷力容耳」

名者不覺遙禮囂作東方大菩薩其三十餘年行事也其如是會昌五年來歸帝命也國人相慶曰連城璧復還天實爲之地有幸也自是請益者所至稻麻矣入王城省母社大歡喜曰顧吾疇昔夢乃非優曇之一顯耶願度來世吾不復撓倚」

門之念也已矣迺北行擬目選終焉之所會王子昕懸車爲山中宰相邂逅適願謂曰師與吾俱祖龍樹乙粲則師內外爲龍樹令孫眞瞠若不可及者而滄海外躡蕭湘故事則親舊緣固不淺有一寺在熊川州坤隅是吾祖臨海公(祖諱仁問)唐醻伐獩貊功封爲臨海」

君公)受封之所間劫㳅菑金田半灰匪慈哲孰能興滅繼絶可强爲杇夫住持乎大師答曰有緣則住大中初始就居且肹飭之俄而道大行寺大成繇是四遠問津輩視千里猶䞨步其不億寔繁有徒大師猶鍾待扣而鏡忘罷至者」

靡不以慧炤導其目法喜娛其腹誘憧憧之躅變蚩蚩之俗文聖大王聆其運爲莫非裨王化甚㤎之飛手敎優勞且多大師答山相之四言易寺牓爲聖住仍編錄大興輪寺大師醻使者曰寺以聖住爲名招提固所爲榮至寵庸」

僧濫吹高藉寔避風斯媲而隱霧可慙矣時憲安大王與檀越季舒發韓魏昕爲南北宰相(各居其官猶左右相)遙展攝禮贄以茗馞使無虛月至使名東國士流不識大師門爲一世羞得禮足者退必唶曰面謁倍百乎耳聞口未出而心已入」

抑有猴虎而冠者亦息其趮諽其虣而傹犇馳善道曁憲王嗣位賜書乞言大師答曰周豊對魯公之語有旨哉著在禮經請銘座側逮贈太師先大王卽位欽重如先朝志而日加厚焉所施爲必馳問然後擧咸通十」

二年秋飛鵠頭書以傳召曰山林何親城邑何疎大師謂生徒曰遽命伯宗深慙遠公然道之將行也時乎不可失念付囑故吾其往矣欻爾至轂下及見先大王冕服拜爲師君夫人世子旣太弟相國(追奉尊諡惠成大王)群公子公孫環」

仰如一一如古伽藍糸貴壁面寫出西方諸國長侍勃陀樣式上曰弟子不侫小好屬文嘗覽劉勰文心有語云滯有守無徒銳偏解欲詣眞源其般若之絶境則境之絶者或可聞乎大師對曰境旣絶矣理無矣斯印也黙行爾」

上曰寡人固請少進爰命徒中錚錚者更手撞擊舂容盡聲剖滯祛煩若商飇之劃陰靄然於是上大喜懊見大師晩曰恭己南面司南南宗舜何人哉余何人也旣出卿相延迓與謀不暇士庶趍承欲去不能自是國人皆認衣珠隣叟罷窺廡」

玉焉俄苦樊笯中卽亡去上知不可强迺降芝檢以尙州深妙寺不遠京請禪那別館謝辭不獲往㞐之一日必葺儼若化城乾符三年春先大王不預命近侍曰亟迎我大毉王來使至大師曰山僧足及王門一之謂甚知」

我者謂聖住爲無住不知我者謂无染爲有染乎然顧與吾君有香火因緣忉利之行有期矣盍就一訣復步至王居設藥言施箴戒覺中愈擧國異之旣踰月獻康大王居翌室泣命王孫勛榮諭旨曰孤幼遭閔凶未能知政致君奉佛誧濟海」

人與獨善其身不同言也幸大師無遠適所㞐唯所擇對曰古之師則六籍在今之輔則三卿在老山僧何爲者坐蝗蠹桂玉哉就有三言庸可留獻曰能官人翌日挈山裝鳥逝自爾騎置傳訊影綴巖溪遽人知往抵聖住卽皆雀躍叢手易轡」

慮滯王程尺寸地由是騎常侍倫伍得急宣爲輕擧乾符帝錫命之歲令國內舌杪有可道者貢興利除害策別用蠻牋書言荷天寵有所自因垂益國之問大師引出何尙之獻替宋文帝心聲爲對太傅王覽謂介弟南」

宮相曰三畏比三歸五常均五戒能踐王道是符佛心大師之言至矣哉吾與汝宜惓惓中和西狩之年秋上謂侍人曰國有大寶珠畢世而藏之其可也曰不可不若時一出俾醒萬戶眼醉四隣心曰我有末尼上珍匿曜在崇嚴山」

脫闢秘藏宜照透三千界何十二乘足之道哉我文考懇迎嘗再顯矣昔酇侯譏漢王拜大將召小兒不能致商於四老人以此今聞天子蒙塵趣令奔問官守勤王加厚歸佛居先將邀大師必叶外議吾豈敢倚其一慢其二哉乃」

重其使卑其辭徵之大師云孤雲出岫寧有心哉有緣乎大王之風無固乃上士之道遂來見見如先朝禮禮之加焯然可屈指者面供饌一也手傳香二也三禮者三三也秉鵲尾爐締生生世世緣四也加法稱曰廣宗五也翌日」

命振鷺趍鳳樹雁列賀六也敎國中磋磨六義者賦送歸之什在家弟子王孫蘇判嶷榮首唱斂成軸侍讀翰林才子朴邕爲引而贈行七也申命掌次張淨室要叙別八也臨告別求妙訣乃眴從者擧眞要有若詢乂圓藏虛源玄影四禪中得淸淨者」

緖抽其慧表纖旨注意無怠沃心有餘上甚悅撎拜曰昔文考爲捨瑟之賢今寡人忝避席之子繼體得崆峒之請服膺開混沌之源則彼渭濱老翁眞釣名者圯上孺子盖履迹焉雖爲王者師徒弄三寸舌也曷若吾師語密傳一片心」

乎奉以周旋不敢失墜太傅王雅善華言金玉音不患衆咻聒而能出口成儷語如宿構云大師旣退且往應王孫蘇判鎰共言數返卽歎曰昔人主有有遠躰而無遠神者而吾君備人臣有有公才而無公望者而吾全國其庶乎宜好」

德自㤁及歸謝絶於是遣輶軒標放生場界則鳥獸悅紐銀鉤扎聖住寺題則龍虫也活盛事畢矣昌期忽兮定康大王莅阼兩朝寵遇師而行之使緇素重使迎之辭以老且病太尉大王流恩表海仰德高山嗣位九旬馳訊十返俄聞」

腰之苦遽命國醫往爲之至則請苦狀大師微破顔曰老病耳無煩治糜飱二時必聞鍾後進其徒憂食力虧陰戒掌枹者陽密擊乃目牖而命撤將化往命旁侍警遺訓于介衆曰已過中壽難逃大期我儂遠遊爾曹好住講若畵一守而勿失」

古之吏尙如是今之禪宜勉旃告訣裁罷慹然而化大師性恭謹語不傷和氣禮所云中退然言吶吶然者乎黌侶必目以禪師接賓客未嘗殊敬乎尊卑故滿室慈悲烝徒悅隨五日爲期俾來求者質疑諭生徒則曰心雖是身主身要作心師」

患不爾思道豈遠而設是田舍兒能擺脫塵羈我馳則必馳矣道師敎父寧有種乎又曰彼所啜不濟我渴彼所噉不救我餒盍怒力自飮且食或謂敎禪爲無同吾未見其宗語本夥頤非吾所知大較同弗與異弗非晏坐息機斯近縷褐被者歟其言顯」

而順其旨奧而信故能使尋相爲無相道者勤而行之不見有岐中之岐始壯及衰自貶爲基食不異糧衣必均服凡所營葺役先衆人每言祖師嘗踏泥吾豈蹔安栖至摙水負薪 或躬親且曰山爲我爲塵安我得安身其克己勵物皆是類」

大師少讀儒家書餘味在脣吻故醻對多韻語門弟子名可名者厪二千人索居而稱坐道場者曰僧亮曰普愼曰詢乂曰心光諸孫詵詵厥衆濟實可謂馬祖毓龍子東海掩西河焉論曰麟史不云乎公侯之子孫必復其始則昔武烈大王爲」

乙粲時爲屠獩貊乞師計將眞德女君命陛覲昭陵皇帝面陳願奉正朔易服章天子嘉許庭賜華裝受位特進一日召諸番王子宴大置酒堆寶貨俾恣滿所欲王乃杯觴則禮以防亂繒綵則智以獲多臮辭出文皇目送而歎曰」

國器及其行也以御製幷書溫湯晉祠二碑曁御撰晉書一部賚之時蓬閣寫是書 裁竟二本上一錫儲君一爲我賜復命華資官祖道靑門外則寵之優禮之厚設聾盲乎智者亦足駭耳目自玆吾土一變至於魯八世之後大師西學而東」

化加一變至於道則莫之與京捨我誰謂偉矣哉先祖平二敵國俾人變外飭大師降六魔賊俾人修內德故得千乘主兩朝拜起四方民萬里奔趍動必頤使之靜無腹非者庸詎非應半千而顯大千者歟復其始之說亦何慊乎哉彼文成」

侯爲師漢祖大誇封萬戶位列侯爲韓相子孫之極則㑋矣假學仙有終始果能白日上昇去於中止得爲鶴背上一幻軀爾又焉珿我大師拔俗於始濟衆於中潔己於終矣乎美盛德之形容古尙乎頌偈頌類也扣寂爲銘其詞曰」

可道爲常道如穿草上露卽佛爲眞佛如攬水中月道常得佛眞海東金上人本枝根聖骨瑞蓮資報身五百年擇地十三歲離塵雜花引鵬路窾木浮鯨津(其一)觀光堯日下巨筏悉能捨先達皆歎云苦行無及者」

沙之復汰之東流是天假心珠瑩麻谷目鏡燭桃野(其二)旣得鳳來儀衆翼爭追隨試覰龍變化凡情那測知仁方示方便聖住强住持松門遍掛錫巖徑難容錐(其三)我非待三顧我非迎七步時行則且行爲緣付囑故」

二王拜下風一國滋甘露鶴出洞天秋雲歸海山暮(其四)來貴乎葉龍去高乎冥鴻渡水陿巢父入谷超朗公一從歸島外三返遊壺中群迷澷臧否 至極何異同(其五)是道澹無味然須强飮食他酌不吾醉他飱不吾飽」

誡衆黜心何糠名復粃利勸俗飭身何甲仁復冑義(其六)汲引無棄遺其實天人師昔在世間時擧國成瑠璃自寂滅歸後觸地生蒺蔾泥洹一何早今古所共悲(其七)甃石復刊石藏形且顯跡鵠塔點靑山龜碑撑翠壁」

是豈向來心徒勞文字覛欲使後知今猶如今示昔(其八)君恩千載深師化萬代欽誰持有柯斧誰倚無絃琴禪境雖沒守客塵寧許侵鷄峯待彌勒將在東鷄林(其九)」

從弟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臣崔仁渷471)奉敎書」

탁본

주석

  1.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郞慧和尙白月葆光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郞慧和尙白月葆光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3. "낭혜화상 탑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