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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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한자 聞慶 鳳巖寺 靜眞大師塔碑
승려 긍양(兢讓)
찬자 이몽유(李蒙游)
서자 장단열(張端說)
각자 섬율(暹律)



번역문

  • 출처: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1]

고려국(高麗國) 상주(尙州)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왕사(王師)이며, 시호를 정진대사(靜眞大師), 탑호를 원오지탑(圓悟之塔)이라고 추증한 비문과 아울러 서문. 봉의랑(奉議郞) 정위(正衛) 한림학사(翰林學士) 전수병부경(前守兵部卿) 단금어대(丹金魚袋)를 하사 받은 신(臣) 이몽유(李夢游)는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림랑(文林郞) 한림원(翰林院) 서박사(書博士) 신(臣) 장단열(張端說)은 왕명에 의하여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듣건대 팔극(八極) 가운데 가장 귀한 나라는 신독(身毒)이요, 삼계(三界)에서 제일 존귀한 이는 부처님인 발타(勃陁)이시다. 서역에 사신을 보내 불교(佛敎)를 전래하게 한 공덕은 한(漢)나라 명제(明帝)임금의 덕택이요, 동쪽으로 유전(流傳)된 지도이미 오래이다. 그러므로 백양(伯陽)인 노자(老子)는 부처님을 자신의 스승이라는 ‘아사지론(我師之論)’을 지었으며, 니보(尼父)인 공자도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성인(聖人)이라 할 수 없으나, 오직 석가를 서방성인(西方聖人)이라고 주장하였다. 별이 떨어진 사실이 노서(魯書)에 기록되고 있고, 한나라 명제(明帝)임금이 금불상이 방광(放光)하면서 목에 태양을 걸고 왕정(王庭)에 서 있는 꿈을 꾼 다음, 옥첩(玉牒)을 보내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게 되었다. 사체법륜(四諦法輪)을 굴리며 삼승법을 설하셨다. 45년 동안의 교화(敎化)를 마치고 열반직전에 이르러 가섭(迦葉)에게 이르시되 “내 이제 무상법보(無上法寶)를 전해주니, 이를 널리 유포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잘 호념(護念)하면서 항상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생사의 고해에 허덕이는 중생을 제도하라”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대가섭은 얻은 바의 법안(法眼)으로써 아난(阿難)에게 전수하였다. 이로부터 대대로 전승하여 중간에 혜명(慧命)이 단절하지 아니 하였으니, 서건(西乾)의 28조(祖) 중 그 중간에 대표적인 조사는 마명과 용수이고, 말대(末代)에는 학륵나(鶴勒那)와 구마라다(鳩摩羅多)가 서로 부촉한 이래로 27대(代) 후에 달마대사가 있었으니, 이를 응진보살(應眞菩薩)이라 한다. 그는 불교의 홍포를 위해 남천국(南天國)을 떠나 동하(東夏)에 와서 선풍(禪風)을 전하되 심인(心印)을 보호하여 끊어짐이 없게 하고, 신의(信衣)를 전해주어 단절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동산(東山)의 법이 점차 남쪽으로 유행(流行)하여 조계(曹溪)의 혜능에 이르기까지 6대에 전승(傳承)되었다. 그 후 법등(法燈)을 계승하여 적자적손(嫡子嫡孫)으로 면면히 전승하되, 조계(曹溪)는 남악(南岳)에게 전하고, 남악은 강서(江西)에게 전하였으며, 강서(江西)는 창주신감(滄州神鑒)에게 전하고, 신감(神鑒)은 해동(海東)에 전해 주었으니, 그의 법맥(法脈)을 이은 스님은 남악의 쌍계사 혜명(慧明)선사이시다. 그리고 혜명은 다시 현계산(賢磎山)에 있는 왕사(王師) 도헌(道憲)에게 전하고, 도헌은 강주(康州) 백암사(伯嚴寺) 양부선사(楊孚禪師)에게 전수하였으니, 양부스님은 곧 우리 정진대사(靜眞大師)의 법사스님이다. 대사의 휘는 긍양(兢讓)이요, 속성은 왕씨(王氏)로 공주 출신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숙장(淑長)이고, 아버지는 양길(亮吉)이니, 모두 인(仁)을 머리에 이고 의(義)를 실천하며 자신을 통달하려고 노력하였다. 덕(德)을 쌓으며 공덕을 풍부히 하였으므로, 그 음덕(蔭德)이 멀리 자손에까지 끼쳤다. 공무(公務)를 봉직함에는 사심(私心)없이 노력하였고, 청렴결백함은 비길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주리(州里)에서 장자(長者)라는 이름으로 존경하였고, 원근(遠近)에는 현인군자(賢人君子)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고조와 증조부 때부터 모두 군읍(郡邑)의 토호로서 집집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그들의 행적은 여기에 싣지 않는다. 어머니는 김씨니, 가정과 사회(社會)에 끼친 공이 그를 필적(匹敵)할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도(婦道)에 있어서도 규범(規範)이 있어 모범적인 주부였다. 머리를 잘라 팔아서 아들이 초대한 친구를 접대한 고사(故事)를 본받았으며,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짜던 베틀의 씨실과 날실을 모두 잘라서 아들이 중단한 공부를 독려한 것과 같이 자녀를 교육하였다. 따라서 불법승 삼보를 신봉하고, 시부모에게도 극진히 효도하였다. 어느 날 밤에 별이 흘러 와서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 크기가 독만하고 빛은 황금색으로 매우 윤택하였다. 이 같은 태몽으로 인하여 임신하였다. 그 후부터 고기와 오신채(五辛菜)는 일절 먹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재계(齋戒)를 가지면서 계속 태교(胎敎)에 정성을 다하였다. 만삭이 되어 탄생하니, 대사는 타고난 모습이 특이하고 신채(神彩)가 영기(英奇)하였다. 오색(五色)으로 찬란한 때때옷을 입을 때로부터 죽마(竹馬)를 타고 유희하는 나이에 이르러 비록 아이들과 장난을 하나, 마치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이 음전하였다. 앉을 때에는 반드시 가부(跏趺)를 맺었고, 다닐 때에는 모름지기 합장하였다. 모래를 모아 불단(佛壇)을 만들고, 불상(佛像)을 모방하여 모시고는 향기로운 잎과 꽃을 따서 불전(佛前)에 공양을 올리곤 하였다. 글방에서 공부할 나이가 되어서는 날마다 경(經)을 수지 독송하였다. 시(詩)와 예(禮)는 이정(鯉庭)에서 배웠고, 강론(講論)은 전사(鱣肆)에서 들었다. 자못 절묘하게 뛰어난 세 가지 분야인 삼절(三絶)에 정통하여 그 이름이 모든 학파(學派), 곧 구류(九流)에 가득하였다. 어느 날 간절히 자모(慈母)와 엄부(嚴父)에게 입산수도할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였다. 본주(本州) 남혈원(南穴院)으로 가서 여해선사(如解禪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득도(得度)하였다. 그 곳에서 은사스님을 모시면서 뜻은 수도(修道)에 전념하였으니,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다 하였다. 학문에 날로 정진하여 실로 그 공로(功勞)가 배증(倍增)하였으니, 누가 그의 수행이 부진하다 하겠는가. 망치로 종을 조금만 쳐도 마치 큰 독이 웅장하게 울리는 듯 하였다. 이로부터 우주를 비추는 혁혁(赫赫)한 태양 빛과 같은 선종(禪宗)이 있는 줄 안 후에는 밤에만 반짝이는 별 빛과 같은 교종(敎宗)의 길을 단념하고 산문(山門)을 나와서는 심사방도(尋師訪道)하면서 사방(四方)의 중생을 지도하였고, 수행함에는 삼종익우(三種益友)를 선택하였다. 드디어 건녕(乾寧) 4년 계룡산 보원정사에서 지범(持犯), 즉 비구계를 받았다. 그 후로부터는 좌우(坐雨), 즉 우기(雨期)인 여름결제 동안 정진하는 마음은 더욱 견고해졌고, 구름 덮인 산중(山中)에서 수도하려는 생각은 갈수록 간절하였다. 엄격하게 계주(戒珠)를 보호하되 한점의 하자도 어김이 없으며, 예리하게 지혜의 칼을 갈아 조금도 무디어짐이 없었다. 능히 계초비구(繫草比丘)와 같은 굳은 마음을 가져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벗어나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오직 법문(法門)을 듣기 위해서는 천리(千里)도 멀다 하지 아니하였다. 드디어 서혈원(西穴院) 양부선사(楊孚禪師)를 친견할 때 선사는 반기는 청안(靑眼)을 크게 뜨고 맞이하여 간절한 적심(赤心)으로 접대하였으니, 마치 유[由 : 자로(子路)]가 비파를 가지고 구[丘 : 공자(孔子)]의 문하(門下)에서 튕기는 것과 같았다. 대사는 이미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재능(才能)이 있었고, 혹은 재삼(在三)의 예(禮)를 펴면서 양부선사를 섬김에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정진(精進)하였다. 어느 날 홀연히 탄식하되 “세월은 빨라 달리는 말과 같고, 지나가는 해는 화살과 같도다. 만약 소 발자국에 고인 적은 물에만 잠겨 있어, 깊고 넓은 바다를 건너지 않으면 보주(寶洲)에 나아갈 수 없으니, 어찌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광화(光化) 3년에 중국으로 가는 큰 선편(船便)을 만나서 붕운(鵬運)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航海)하여 신숙(信宿)인 2박 3일만에 강회(江淮) 지방에 도달하였다. 천참(天壍)인 험준한 고개를 넘어 설봉(雪峰)선사의 회상으로 가려고 비원령(飛猿嶺) 위에 이르렀다. 마침 거기에서 설봉화상에게로 공양미(供養米)를 운반하는 선도(禪徒)를 만나, 그들과 함께 가다가 한자리에서 쉬게 되었다. 선도중(禪徒中) 한 스님이 말라 죽은 용(榕)나무를 지적하면서 말하되 “고목(枯木)이 홀로 선정을 점령하고 있어 봄이 와도 다시 살아날 수 없겠구나”하였다. 대사가 이 말을 듣고 대구하되 “멀리 진경(塵境) 밖에서 초연하며 오래토록 도정(道情)을 만끽하는구나”하였다. 이를 들은 대중들이 모두 탄복하여 입과 입으로 전하여 음전(吟傳)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비록 혀를 움직여 지동지서(指東指西)로 수고롭게 설하는 것이 자못 묵언으로 마음을 전하는 선지(禪旨)에 부합하였다. 드디어 태령(台嶺)에 올라가서 두루 선원(禪院)을 살펴보았고, 혹은 호랑이의 싸움을 말리는 육환장을 짚고눈이 덮인 고개를 넘었으며, 구름 자욱한 산을 지나기도 하였으며, 혹은 용의 항복을 받은 바리때를 비계(飛溪)와 현간(懸澗)에서 씻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이미 원하던 바를 많이 성취하였으나, 깊고 오묘한 진리를 찾고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곡산(谷山)으로 가서 도연화상(道緣和尙)을 친견하였으니, 그는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수제자였다. 대사가 묻되 “석상 종지(宗旨)의 적적(的的)한 대의(大意)는 어떠한 것입니까?” 화상이 대답하되 “대대로 일찍이 전승(傳承)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사가 그 말이 끝나자 크게 깨달았으니, 묵묵히 현기(玄機)를 통달하고 비밀리 법통(法統)을 전해 받았다. 밝기로는 마치 진시황제(秦始皇帝)의 거울을 비추는 것과 같았고, 깊기로는 황제(黃帝)의 현주(玄珠)와 같았다. 일진(一眞)을 투철히 궁구하고 더욱 삼매(三昧)를 닦아서 마치 푸른빛이 남초(藍草)보다 더하고, 붉은 색(色)이 꼭두서니보다 더욱 붉은 것과 같았으며,구슬과 불빛이 서로 비추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대사는 선문(禪門)의 생용(笙鏞)으로 군림하였으니, 어찌 규규(赳赳)함 뿐이었겠는가. 쟁쟁(錚錚)한 거목(巨木)이라 할 수 있다. 대사는 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화상(和尙)에게 바쳤다.

10인의 영재(英材)가 함께 급제에 응시하여 합격이 공고되어 출세(出世)하였으나, 오직 한 사람만은 낙제(落第)하였고 아홉 사람은 영광스럽게 출세하였다.

도연화상이 이를 보고 경탄해 마지 아니하였으며, 삼생송(三生頌)을 대중들로 하여금 음화(吟和)하도록 허락하였다. 대사는 용기를 길러 자신(自身)을 수양하여 남에게 끼칠 여력(餘力)이 있었고, 인(仁)을 당하여서도 사양하지 아니 하였으며, 붓을 잡아서는 이치를 분석하였다. 이 봉조(鳳藻)인 금옥(金玉)과 같은 훌륭한 문장(文章)을 모아 책을 엮었으니 구절구절마다 귀중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러한 문장은 벽운곡(碧雲曲)이 백운곡(白雲曲)보다는 고상하지만, 어찌 이것이 구경(究竟)의 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이미 책으로 엮어 세상(世上)에 유전(流傳)되므로 이 비문(碑文)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대사(大師)의 맑은 마음은 마치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고, 자취는 조각구름과 같이 걸림이 없었다. 기이한 승경(勝景)과 신령스러운 산은 빼놓지 않고 답사하였으며, 강남(江南)과 강북(江北) 으로 발섭(跋涉)의 수고로움을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양(梁)나라 용덕 4년 봄 곡산도연(谷山道緣)의 회상을 떠나 유주(幽州)와 대주(代州)를 향하였고, 장차 오대산의 성적(聖跡)을 참배하려고 만리(萬里)의 험로를 마다하지 않고, 관음사(觀音寺)에 이르러 며칠 동안 머물게 되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얼굴에 붉은 빛 종기가 생겨났으나, 구법(求法)을 위한 행각 도중에 있으므로 주후비술(肘後秘術)을 만나지 못하여 치료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오래도록 치유되지 아니하고 점점 심하여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홀로 열반당(涅槃堂)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名號)를 부르면서 기도하였다. 잠시 후 한 노스님이 방으로 들어 와서 묻되 “너는 어디서 왔으며, 병고(病苦)는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대사가 답하되 “소승(小僧)은 해좌(海左)로부터 왔는데, 오래 동안 강남(江南)으로 구법행각(求法行脚)을 하다가 이와 같은 독창(毒瘡)이 생겨 고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하였다.노스님이 말씀하시되 “너무 걱정하지 말라. 숙세(宿世)의 원결(怨結)로 그러하다”하면서, 곧 물로 부스럼을 씻으니, 마치 단술로 씻은 것 같이 씻은 듯이 낳았다. 노스님이 말씀하시되 “나는 이 산의 주인(主人)으로써 잠시 와 문병하고 위로하는 것이니, 앞으로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면서 건강에 유의하라”고 하였다. 건강을 회복하여 관음사(觀音寺)를 하직하고 떠나니 마음이 거뜬한 것이 마치 꿈을 깬 것과 같았다. 피부는 조금도 손상함이 없었고 부스럼 자리마저도 없었다. 참으로 이는 대사께서 몸소 청량산[淸凉山 : 오대(五臺)]을 참배하고 묘덕(妙德)보살을 친견한 공덕이라 하겠으며, 일찍이 귀씨(龜氏)의 종지(宗旨)를 계승하여 용종성존(龍種聖尊)을 만난 불가사의한 가호 때문이라 하겠다. 그로부터 서쪽으로는 운개회상(雲盖會上)을 참방하였고, 남쪽으로는 동산도량(洞山道場)을 지나면서 영이(靈異)한 승지는 샅샅이 답사하고, 고명한 스님은 빼놓지 않고 친견하였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2년 7월 전주(全州) 희안현(喜安縣) 포구(浦口)로 돌아와 배를 포구에 매어 놓고부터 대사는 전벌(詮筏)인 교를 버리고 단적(端的)하고 깊은 선경(禪境)에 통철하였으니, 마치 이는 맹상(孟嘗)의 구슬이 다시 합포(合浦)로 돌아오고 뇌환(雷煥)의 칼이 본래 있던 연평진(延平津)의 못으로 들어간 것과 같았다. 덕은 이미 보신(寶身)으로 빛났고, 뜻은 더욱 고상하며 견고하였다. 하물며 하늘은 복별(伏鼈)인 은사(隱士)를 빛나게 하고, 땅은 창아(蒼鵝)를 출생시켰다. 들판과 산 속에는 각기 분쟁(忿爭)의 힘을 겨루고, 암선(巖扇)과 수황(岫幌)에는 절반 이상이 병화(兵火)의 재난을 당하였다. 이에 편히 정진할 곳을 찾아 절진(絶塵)의 자취를 찾았고, 검은 표범이 안개 속에 숨어 사는 것을 본받았다. 학의 울음소리가 천자(天子)에게 들릴까 두려워하여 그림자를 산중(山中)에 숨기고 영광을 무하(廡下)에 감추었다. 비록 구름과 노을이 자욱이 덮인 산골짜기라고는 하나 점점 도리지계(桃李之蹊)를 이루어 심히 분주하게 되었으므로, 조용히 숨어서 수도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강주(康州) 백엄사(伯嚴寺)로 옮겼으니, 이곳은 서혈(西穴)의 양부선사(楊孚禪師)가 암자를 수축하여 주석(住錫)하던 곳이다. 선사(先師)인 양부스님이 입적하였다. 법장(法匠)이 열반하니 문인들이 앙모하여 슬퍼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재가불자들은 참으로 의지할 신앙대상이 없음을 탄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름이 자욱한 계곡과 안개 덮인 고개들의 사계절(四季節)의 변태상은 높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서로 부딪히는 운율(韻律)과 백뢰(百籟)의 화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곳은 마치 여산 동림(東林)의 수려함과 같아서 서역(西域)의 종지(宗旨)를 전수할 만한 곳이었다. 천성(天成) 2년 대사는 그 곳으로 옮겨 주석하였다. 이곳에 법경(法鏡)을 높이 걸어놓고 항상 닦고 비추어 무애융통하였으며, 선용(禪鏞)을 높은 틀에 달아 놓고 치기를 기다림과 같았으니, 메아리의 응함이 연(緣)을 따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을 귀의하게 하였고, 천지사방(天地四方)의 중생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였다. 도(道)를 묻는 자가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어 법문(法門)을 들으려는 불자(佛子)들의 발꿈치가 서로 닿았으니, 마치 병목(並目)처럼 나란히 하였다. 이와 같이 대사의 덕화가 해우(海隅)에 두루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명성(名聲)이 일역(日域)을 진동하였다.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이 멀리서 스님의 현장(玄杖)을 의지하여 나라의 정강(政綱)을 정돈하려 하였으며, 비록 상법(像法)과 계법(季法)시대에 해당하나, 선라(禪那)의 교를 받들려 원을 세웠다. 사신을 보내 편지를 전하되, “공손히 들으니 대사께서는 일찍이 바다를 건너 당(唐)나라로 가서 멀고도 험난한 조계(曹溪)에 이르러 도연화상(道緣和尙)으로부터 심중(心中)의 비인(秘印)을 전해 받고, 함하(頷下)의 명주(明珠)를 찾으셨으며, 지혜의 횃불을 계속 밝혀 미혹한 중생들의 앞길을 인도하였으니, 선하(禪河)는 이로부터 막힘없이 흐르게 되었고, 법산(法山)이 이에 우뚝 솟게 되었습니다. 계족산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는 가섭존자의 현풍(玄風) 이 구림(鳩林)의 먼 곳까지 전파되기를 바랐으니, 이 어찌 일방(一邦)의 의뢰(依賴)가 될 뿐이겠습니까. 이같이 덕 높은 스님은 천재(千載)에도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일입니다”하고는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별호를 올렸다. 대사는 일마다 걸림이 없어 방촌(方寸)에 바다와 같은 큰 것을 넣어도 조금도 거위(拒違)한 바가 없이 오직 선유(善誘)하는 공을 넓히려 기(機)를 나타내는 도(道) 를 더욱 삼갔다. 청태(淸泰) 2년에 이르러 생각하되 도를 넓히기 위해 좋은 산을 선택하기로 결심(決心)하고 행장을 준비하고는 출발을 지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덮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때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대사에게 이르되 “스님께서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꼭 가시려면 먼 곳으로는 가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를 지켜 본 대중들은 모두 이상히 여겨 떠나지 말고 계시라고 간청하였으나, 대사는 굳은 의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문득 떠났다. 얼마쯤 가다가 도중에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약 30리를 갔는데, 또 한 마리의 호랑이가 중로(中路)에서 영접하고 인도하되 마치 양 날개와 같이 좌우로 호위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희양산 중턱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이미 이곳까지 왔다가 물러간 자취를 보고서야 비로소 되돌아 왔다. 대사는 봉암사(鳳巖寺)에 자리를 정하고는 기꺼움이 더하여 작약(雀躍)하였다. 그리하여 산꼭대기에 올라 산 너머의 배면(背面)을 살펴보니 천층(千層)으로 된 푸른 봉우리와 만첩으로 이루어진 붉은 절벽은 산적의 방화로 불탄 흔적이 마치 괴겁(壞劫)때 타버린 겁회(劫灰)가 날아 떨어진 박암(撲巖)과 똑같았다. 그러나 중첩된 봉우리와 겹겹의 계곡은 전혀 변천(變遷)한 모양이 없었으며, 불달(佛闥)과 승방 자리는 반쯤은 가시덩굴로 뒤엉켜 있었다. 우뚝 솟은 산은 마치 거북이 비석을 지고 있는 듯 선덕(禪德)의 비명과 같았고, 험준하고 웅장한 상봉우리는 거대한 불상(佛像)인데, 신령스러운 광명(光明)은 항상 빛나고 있었다. 이미 율수(聿修)할 뜻을 굳게 가졌으니, 어찌 이 곳에 절을 중창할 뜻을 사양할 수 있었겠는가. 기원정사를 세울 때 가섭(迦葉)존자가 직접 진흙을 밟던 일을 추모하고, 목련존자가 서다림(逝多林)의 도량을 청소하였던 일을 본받아 선실(禪室)을 구축하고 학도(學徒)를 지도하되, 혹한과 혹서에도 쉬지 않았으며, 문법 대중 또한 대와 갈대처럼 문전(門前)에 열(列)을 이루었다. 대사(大師)는 사람을 가르침에 권태(倦怠)로워함이 없이 항상 중생을 이익케 하였다. 그의 지도이념은 상인(商人)들로 하여금 급히 화성(化城)을 버리게 하였고, 궁자(窮子)들은 모두 보배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빽빽이 열을 지은 전단향나무가 향기를 풍기는 듯하고, 뜰에 가득한 연꽃이 만개한 듯 하였다. 선풍을 크게 떨치고 법왕(法王)의 가르침을 홍천하였으며, 평등한 은혜로 두루 구제하고, 덕은 넉넉하여 모든 중생과 함께하였다. 비록 산중에서 정묵(靜黙)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위맹(威猛)을 역내(域內)에 두루 떨쳤다. 조용히 마군을 항복받는 술(術)을 보이며 불교를 돕고 순화하는 공을 드날렸다. 개미떼처럼 모인 흉도(兇徒)와 뱀과 같이 야합(野合)한 역당(逆黨)들로 하여금 우미(愚迷)한 성품을 고치게 하고, 난폭한 마음을 순화시켜 점차로 국토를 뺏으려 겨루는 전쟁을 쉬게 하여 각각 안도(安堵)를 기약하게 되었으니, 그 때가 바로 청태을미년(淸泰乙未歲)이었다. 우리 태조대왕의 운세가 이흉(夷兇)들까지 미쳤고, 때는 난리를 평정할 시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태조는 양장(良將)에게 군의 통수권을 주어 백제군의 잔당(殘黨)인 교굴(狡窟) 과 적군이 숨어 있는 효소(梟巢)를 지적하여 낱낱이 탕하게 하였다. 육도삼략(六韜三略)의 기이한 모책과 남다른 책략을 펼쳐 진두의 북을 치니 산하가 우뢰처럼 진동하고, 선두의 깃발이 힘차게 휘날려 산천초목도 떨었다. 고려군인 아군(我軍)은 마치 새매와 같이 용감하였고, 적군들은 고기가 썩어 흩어지듯이 무너져 뿔뿔이 흩어졌으니,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폭군)]인 제신(帝辛)을 목야(牧野)에서 축출한 일과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초(楚)의 항우(項羽)를 오강(烏江)에서 패배시킨 것과 같다 하겠다. 바닷물을 말려 고래를 잡아내며, 숲 속을 샅샅이 뒤져 외뿔소를 잡아내듯 섬과 산에 숨어 있는 잔병을 모두 찾아 소탕하였으니, 전쟁의 암울한 구름은 사기(四紀), 즉 약 50년 동안이나 있었다. 적군은 깨끗이 소탕하여 남음이 없었다. 이어 봉묘(封墓)와 식려(軾閭)를 행하고, 주왕(周王)의 고상한 자취를 계승하였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스님들을 존중하였으며, 양무제(梁武帝)의 유풍을 준수하여 오천축(五天竺)을 본받아 많은 불사를 하였다. 사대문(四大門)을 활짝 열어 놓고 영현(英賢)들을 불러들였으니, 도인들이 모여 들고 선려(禪侶)가 구름처럼 찾아와서 상덕(上德)의 종지(宗旨)를 격론하고, 높이 태평(太平)의 과업을 찬양하였다. 이 무렵 대사는 곡판(鵠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호계(虎溪)를 나와 백족(白足)을 움직여 보행으로 마치 날으는 듯 걸었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설미(雪眉)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게 하였다. 개성을 향하여 중원부(中原府)에 이르렀는데, 그 곳 연주원(鍊珠院)의 원주(院主)인 예백(芮帛)스님은 항상 능가경을 독송하여 하루도 쉬지 않았다. 이 날 밤 꿈에 동자 신선이 솔도파(窣堵波)의 꼭대기로부터 합장하고 내려오면서 말하기를 “내일 어떤 나한(羅漢)스님이 여기를 지나갈 터이니, 미리 공양(供養)을 준비해 두었다가 지극히 모시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대중을 모아놓고 지난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니, 대중들이 모두 기이한 일이라 경탄하면서 도량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저녁때에 이르러 과연 대사가 연주원에 당도하였다. 경사(京師)에 이르러 태조가 대사를 친견하고 경이(驚異)하게 여기고 꿇어앉아 공경하면서 법을 전해 받은 근원을 물으니,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유창하게 대답하였다. 태조는 스님과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면서 조용히 스님과 대화하되 “현장법사가 서역(西域)에서 불교를 유학하고 함경(咸京)으로 돌아온 후 많은 경전을 번역한 것이 보장(寶藏에) 비재(秘在)하고 있습니다. 정원(貞元) 이래로 번역된 경론(經論) 이 가장 많으므로 근세(近歲)에 민중(閩中)과 구녕(甌寧)지방에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 진본(眞本)을 구입하여 항상 전독(轉讀)하며 홍선(洪宣)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병화(兵火)로 인하여 모두 타버렸으니, 지금은 다행히 전쟁이 끝났으므로 불교를 진작하고자 하여 대장경 1부를 다시 사경(寫經)하여 나누어 양도(兩都)에 안치하려 하니 스님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대사가 답하되 “이는 비록 유위(有爲)의 공덕이긴 하지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룩하는데 큰 공덕이 되오니, 경전을 홍포한 인연으로 능히 부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불은(佛恩)과 왕화(王化)가 길이 빛나되 천장지구(天長地久)와 같으며, 복됨이 끝이 없고 공명(功名)이 영원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일심(一心)으로 공경하여 사사(四事)로 정성껏 모시되, 혹은 어전(御殿)을 열어 놓고 청법하기도 하며, 혹은 스님이 계시는 감우(紺宇)인 사원으로 찾아가서 문안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항상 학과 같이 고상한 심정(心情)으로 오히려 구름 덮인 산중(山中)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깊어져, 임금을 하직하고 천구(天衢)를 벗어나와 번개처럼 떠나려하였다. 승사(僧史)에 명하여 전송하는 일을 돕고 노자(路資)를 많이 하사하여 귀사의 길을 편안히 모시게 하였으니, 이는 마치 봉왕(秦王)인 부견(符堅)이 여광(呂光)으로 하여금 구자국을 치고 구마라집을 모시고 간 것과 같다 하겠다. 구름은 암수(巖)로 돌아가고, 노을이 산 능선에 덮여 있는 희양산에 들어가서 일곱 번의 성괴(星槐) 가 바뀌었다. 그 동안 임금이 보낸 사신의 왕래(往來)가 잦아 문안편지와 향과 차, 그리고 여타의 공양구(供養具) 등을 보냈다. 갑자기 구천(九天)의 정가(鼎駕)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해(四海)에 금사(金絲)가 끊어졌으니, “비록 망언(忘言)을 주장하며 선(禪)을 닦는 자인들 어찌 눈물을 흘리는 슬픔이 없겠는가”라 하였다. 태조가 승하하고 즉위한 혜종(惠宗)이 선조(先祖)의 유업을 이어 받아 사신을 보내어 대사에게 문안하였으니, 이는 곧 자신이 즉위(卽位)하였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사는 승개(僧介)인 혜인(專人)을 보내어 왕에게 답례를 전하되 “광사(光嗣)를 경축하고 멀리서 국리민복을 위하여 기도를 하였으나, 인연을 맺을 기회는 없었다. 비록 공동(崆峒)의 청(請)은 있었으나 남순도중(南巡途中) 창오(蒼悟)에서 돌아오지 못하였음을 어찌하랴.” 정종(定宗)이 즉위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편안함을 얻게 하려고 천명(天命)을 통괄하면서 항상 불교에 관심을 기울여 선열(禪悅)을 맛보고자 희망하였다. 대사는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험한 길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보행으로 경화(京華)에 일러 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약언(藥言)을 베풀었으니, 마치 먹줄을 따르면 목재(木材)가 곧은 것과 같아서 임금의 시정(施政)은 돌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 순조로웠고, 도(道)는 보천(補天)에 화하였으며, 마음은 항상 너그럽게 남음이 있었으니, 서신(書紳)을 가히 증험할 수 있다하여 새로 만든 마납가사(磨衲袈裟) 일령(一領)을 기증하였고, 또 의희(義熙) 14년에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진본(晋本) 『화엄경(華嚴經)』 8질을 사경하여 송증(送贈)하였으니, 이는 대사가 색(色)과 공(空)이 다르지 아니하며, 어(語)와 묵(黙)이 동일하여 부처님의 말씀인 금언(金言)을 생각해서 항상 경전인 옥축(玉軸)을 펴고 열람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성상(聖上)께서 빛나는 위업(偉業)으로 용연(龍淵)에서 덕을 길러 천재(千載)의 기약에 응하였고, 구천(九天)의 지위를 영광스럽게 계승하여 그 공이 극에 달하였으며, 왕성한 성업(聖業)으로 기틀을 다졌으니, 장차 동토(東土)의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며 깊이 서건(西乾)의 교리(敎理)를 신봉하게 하였다. 국정을 군도(君道)로 부지런히 하면서도 많은 복을 승전(僧田)에 심었다. 정수(定水)를 선하(禪河)에서 떠 마시며, 자비의 물결을 신택(宸澤)으로부터 흘려보냈다. 선종인 능가의 문이 크게 열리고 총지(總持)의 광장을 활짝 열었다. 멀리서 대사를 흠모하다가 친히 혜안(慧眼)인 스님을 친견하고자 광덕(光德) 2년 봄에 사신을 보내 친서를 전달하니, 그 내용인 즉 반드시 서로 만나기를 원하여 왕림하시길 바라는 마음을 간절히 하였다. 대사도 또한 동림(東林)을 나와 북궐(北闕)로 가서 임금을 배알하기로 결심하고 정인(淨人)에게 아침 공양을 재촉하였고, 모시고 갈 시자에게 행장을 빨리 꾸리도록 했다. 이 때 법당 한쪽에 걸려있던 북이 갑자기 스스로 울렸는데, 그 소리가 감감(坎坎) 하여 마치 우뢰와 같이 우렁찼으며, 또한 깊은 골에서 울려오는 듯하였다. 이를 들은 대중은 모두 놀라서 한결 같은 마음으로 떠나심을 만류하였으나, 대사는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서울로 향해 가던 중 과연 궁중(宮中)에서 보낸 사신을 만났다. 대사를 따르는 선려(禪侶)는 월악산(月岳山)을 지나오고, 왕이 보낸 사신 일행은 한강(漢江)을 건넜으니, 이미 우연히 만남을 기꺼워하여 준순(逡巡)의 물러남을 의론하지 않았다. 함께 기전(圻甸)의 경계까지 이르니, 왕이 보낸 일행이 교외(郊外)까지 나와 예를 갖추고 기다리다 영접하였다. 제사(諸寺)의 승도(僧徒)와 조정에 가득한 신재(臣宰)로 하여금 홍진(紅塵)을 무릎쓰고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선 호종(護從)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복잡한 거리를 보행(步行)으로 수행하게 하였다. 개성에 있는 호국(護國) 제석원(帝釋院)에 이르러 투숙하였다. 다음 날 아침 임금이 궁중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별도로 깨끗한 방을 마련하여 친히 스님을 영접하고 특별히 공양을 올리고 소박하게 찬양하는 정성을 폈으며, 대사에게 나라 다스리는 정도(政道)를 물었다. 대사도 임금을 흠모하여 이미 기울어진 운세(運勢)를 반드시 만회시키려고 하였다. 망언(忘言)의 언(言)을 말하고 무설(無說)의 설(說)을 설하였으니, 어찌 이것이 수도하는 데만 도움이 될 뿐이겠는가. 또한 능히 정치 풍토를 쇄신하여 국민을 개제(開濟)하는 공을 넓혀 마침내 귀의하는 정성에 보답하였다. 그 해 4월 사나선원(舍那禪院)으로 이주(移住)하게 하고, 마납가사(磨衲袈裟) 일령(一領)을 보내드리고 겸하여 공양을 베풀되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과인(寡人)이 어릴 때 왕위(王位)에 올라 기무(機務)를 보는 여가를 틈타 사적(史籍)을 찾아보니, 옛날 황제헌원씨로부터 주발(周發)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보(師保)를 두어 자문을 받고 왕의 잘못된 시정(施政)을 광정(匡正)하려 하였으므로, 이를 군(君)과 민(民)이라 하였으며, 사신(師臣)[신하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인 즉 군왕(君王)이요, 우신(友臣)[신하를 벗으로 여기는 것]인 즉 패왕(霸王)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스님은 그 고상(高尙)한 법덕으로 널리 이익(利益)을 끼쳤다고 할 만하였다. 이제 희양대사를 친견하니, 참으로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보살이시니, 내 어찌 스승과 제자의 예(禮)를 맺고자 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경들의 뜻은 어떤가”하고 물으니 중신(重臣)들이 “모두 지당하다”하고 한 사람도 이의(異義)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이 양가승총(兩街僧摠)인 법여대덕(法輿大德)과 내의령(內議令)인 태상황보(太相皇甫) 등에게 명하여 선경(禪扃)에 보내어 왕의 뜻을 전달하고, 다시 중사(中使)를 시켜 비단으로 사방에 깃을 둘러 만든 마납가사(磨衲袈裟) 일령(一領)과 아울러 머리에서부터 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장신구를 송증(送贈)하였다. 그 후 상(上)께서 문·무(文·武)인 양반(兩班)과 승관(僧官)을 거느리고 잠깐 주관(珠宮)을 나와 친히 금지(金地)로 왕림하여 손에 작미향로(鵲尾香爐)를 들고 용이(龍頤)를 면대(面對)하고는, 한림학사이며 태상(太相)이고 수병부령(守兵部令)인 금악(金岳)을 불러 조서를 선포하되, “옛날 진(晉)나라 안제(安帝)임금은 혜원법사(慧遠法師)를 만나 지극한 마음으로 받들었고, 오왕(吳王) 손권(孫權)은 강회승대사(康僧會大師)를 친견하고 정성을 다하여 귀의(歸依)하였으니, 인간과 천상(天上)에 왕성한 전적(傳跡)이 고금古今을 통해 길이 찬미할 만한 일이다. 과인(寡人)이 비록 덕이 왕철(往哲)에 비해서는 부끄럽지만, 뜻은 불교를 신봉하여 힘써 외호(外護)하고 마음가짐을 상상(愓愓)하게 하였다. 대사는 우담발라화꽃이 한번 나타난 것과 같이 희유하며, 혜일(慧日)은 거듭 밝아서 연꽃 같은 스님의 눈을 보면 번뇌가 저절로 사라지고, 과일빛과 같은 주홍색 입술을 보면 진노망상(塵勞妄想)이 문득 쉬게 된다. 다생(多生)의 인연으로 금생(今生)에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감히 지극한 마음으로 우러러 맑은 도덕을 듣고, 스승으로 모시는 예(禮)를 펴고자 합니다. 여러 겁(劫) 동안의 인연이 이루어지길 희망하여 몸소 송궐(松關)에 나아가 스님의 면전(面前)에서 일편단심을 표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자비로 비추시고, 구부려 과인(寡人)의 정성을 받아들이소서. 청컨대 스님의 도(道)를 더욱 빛나게 하고자 공경히 증공대사(證空大師)란 존호(尊號)를 드리니, 이 인연으로 겁겁생생(劫劫生生) 태어나는 곳마다 지혜의 기치를 반연하여 불법(佛法)의 바다에 유희하려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여쭙니다”라 하였다. 이 때 도속(道俗)과 모든 관료(官僚)들이 일제히 열을 지어 축하(祝賀)의 예를 드리되, 한 사람도 어기는 자가 없었으니, 참으로 스님의 덕이 높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대사의 자취는 사의(四依)를 나타냈으며, 공덕은 만겁(萬劫) 동안을 닦아서 말씀은 반드시 진리(眞理)에 계합(契合)하고, 행(行)은 스님을 따를 자가 없었다. 이미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고 도리천(忉利天)으로 가는 것을 기약하고는 희이(希夷)한 종지를 열어 보이고 청정한 가풍(家風)을 드날렸다. 왕의 강령(綱領)을 정돈하고 비전(丕傳)의 왕통(王統)을 유지하며 비밀리 법보(法寶)를 전해 받았으니, 왕위(王位)인 금륜(金輪)이 유구(悠久) 하도록 하며, 옥의(玉扆)로 하여금 더욱 빛나게 하였다. 자비 등불의 불꽃이 삼한(三韓)에 두루하고, 감로(甘露)의 혜택이 일국(一國)에 고루하였다. 연곡(輦轂)에 주석한 지 이미 여러 해를 지났으므로, 중생을 교화한 공이 이미 이루어졌기에 늙어 운신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산중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때는 광순(廣順) 3년 가을에 고산(故山)으로 돌아갔다. 왕이 옷을 여미고 일어나 피석(避席)하고 청법(請法)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깊은 신심(信心)을 가졌으나, 마음의 바탕에 아직 욕념(欲念)을 쉬지 못하였음을 어찌하지 못하였으니, 몸소 스님 타신 수레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스님을 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떠나는 스님의 모습은 마치 고상한 학(鶴)이 삼추(三秋)에 광야를 걷는 것 같았고, 옷깃을 떨치면서 지나가니 조도(鳥道)를 더듬어 만리(萬里)의 옛 산을 찾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후에도 방문객의 수레가 계속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으며, 왕이 보낸 사신들의 왕래하는 말의 고삐가 끊임없이 길에서 교차(交叉)하여 그 이어진 그림자는 시냇물에 비치었다. 향완(香盌)과 수병(水甁) 등을 증정하였는데, 조각의 섬세함이 극에 달하였으며, 부증품(副贈品)으로는 비둘기를 새긴 향로받침과 새를 그린 수병태(水甁台)를 올렸는데, 감미로운 차와 향기로운 향(香)으로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경축하고 의뢰함이 이미 많았고, 정성스럽고 공손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경덕(顯德) 3년 8월 19일에 이르러 갑자기 대중에 이르되 “내가 서학(西學)하고 귀국한 지 이미 3기(紀)에 이르렀다. 산문(山門)을 선택하여 회상(會上)을 열어서 후학을 지도하였고, 청산(靑山)과 백설(白雪)을 빌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중생(衆生)을 인도하되, 항상 옥게(玉偈)를 독송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이 되고자 하였다. 이젠 늙어 바람 앞의 등불이요, 물위의 거품과 같아서 능히 오래 지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나는 떠나고자 한다. 각기 굳게 마음을 잡아 부처님의 훈계를 힘써 준수하라”하시고, 또 전법(傳法)한 수제자(首弟子)인 형초선사(逈超禪師)에 이르되, “너는 마땅히 조실(祖室)을 잘 지켜서 계속 전등(傳燈)하되, 전인(前人)들 보다 더욱 빛나게 하여 상부(相付)하는 법통(法統)이 단절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조용하고 편안하게 입적하시니, 세수는 79세요, 법랍이 60이었다. 이 날 하늘에는 검은 먹구름이 덮여 비가 내리고, 땅은 진동하고 산은 흔들렸으며, 새와 짐승들은 슬피 울었고, 삼나무와 회나무 등이 모두 시들었다. 이 때 재가(在家)와 출가제자(出家弟子)들은 물론, 멀고 가까운데 있는 어린이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만물(萬物)이 변이(變異)한 비상(非常)함을 보고, 슬픔을 머금고 다투어 모여들어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였으니, 그 애통해 하는 소리가 산곡(山谷)을 진동하였다. 이것이 어찌 노성(魯聖)이 들보가 부러졌다는 노래를 부른 것과 아도세왕(阿闍世王)이 양목(梁木)이 꺾어지는 꿈을 꾸고 놀란 고사(故事)와 같을 뿐이겠는가! 임금은 부음을 듣고 진도(震悼)하여 침식을 잊고 호곡하였다. 그리하여 좌승유(左僧維)인 대덕(大德) 담유(淡猷)와 원윤(元尹) 수전중감(守殿中監)인 한윤필(韓潤弼) 등을 보내 글로써 조문하고, 식량(食糧)과 차와 향으로써 부의(賻儀)하였다. 또 시호와 탑명(塔名)을 헌증하기 위해 원보(元輔)인 김준암(金俊巖)과 부좌윤(副佐尹)인 전광평시랑(前廣評侍郞) 김정범(金廷範) 등으로 하여금 시호를 정진대사(靜眞大師), 탑명(塔名)을 원오지탑(圓悟之塔)이라 하였다. 그리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영정 일포(一鋪)를 그려서 비단으로 사면에 선(線)을 두르고 금축(金軸)으로 장식하되, 며칠 만에 영찬(影讚)과 아울러 진영(眞影)을 완성하고는 석승유(石僧維)인 대덕(大德) 종예(宗乂)와 정보(正輔)인 김영(金瑛), 정위(正衛) 병부경(兵部卿)인 김영우(金靈祐) 등을 송진영사(送眞影使)로 삼고 겸하여 크게 대중공양을 베풀었다. (결락) 자고로 장례의식이 이와 같이 엄숙하고 성대함은 비길 데가 없었으니, 대사의 도덕이 숭고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대사의 성품은 순박하였고, 기질(氣質)은 영특하고 눈에는 주명(珠明)을 점(點)하였으며, 골격은 반짝이는 금가루가 맺혀있는 듯하였다. 깊고 넓기로는 그 물결이 만경(萬頃)의 넓은 들판을 맑히며, 높고 험준함으로는 마치 큰 산이 천길을 솟을 듯 하였다. 항상 학도(學徒)를 지도하되 말씀은 간결하였으나 뜻은 아득하고 깊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는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곁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하니, 스님이 대답하되 “나도 알 수 없구나”하였다. 다시 어떤 스님이 묻되 “피차(彼此) 서로 알지 못할 때는 어떠합니까”하니, 스님이 대답하되 “동서(東西)가 멀지 않구나” (결락) “한 곳에 모여 살고 있는 것입니까”하니, 스님이 답하되 “태양이 점점 높아지니 후대(後代)에 무엇을 근심할 것인가”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어간지원(語簡旨遠)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같은 류(類)가 매우 많았다. 어찌 토목(土木)과 같은 형해(形骸)를지키는 위의(威儀)가 항상 엄연하여 털끝만치도 어긋남이 없게 함이었으랴! 그리하여 받은 계율은 굳게 지켜 하나도 어그러뜨림이 없었다. 그러므로 점점 세월이 흘러 이미 상유(桑楡)에 핍박하고 몸은 점차 서루(黍累)와 같이 가벼워지니 세수하거나 목욕할 때에는 분중(盆中)에 앉더라도 완연히 물위에 뜬 바가지와 같아 물에 잠기지 아니하였다. 또 해어진 누더기를 입고도 비록 세탁하지 않더라도 몸이 가렵지 않을 뿐 아니라 이도 생기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거의 4기(紀)를 지냈다. 일찍이 젊었을 때, 어느 날 밤 3층 석탑 위에 앉아 있는 꿈을 꾸었는데, 대중 중에 해몽하는 이가 말하되, “대사는 반드시 왕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존호(尊號)를 받아 만승의 스승, 곧 국사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모두 경탄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경하(慶賀)하였는데, 후일에 이르러 실제로 꿈의 내용과 부합하였다. 열반할 때에 이르러서는 절의 동쪽 봉우리와 서쪽 능선의 소나무, 잣나무 등이 처참하게 변색하였으되 마치 곡수(鵠樹)와 같았으며, 또 산의 북쪽 한 모퉁이가 까닭 없이 백여장(百餘丈)이나 무너졌다. 또 호랑이가 동남(東南)의 산등성이에서 나와 절을 돌고는 장고(長皐)에서 밤낮으로 슬피 우니 그 소리가 계곡을 진동하여 며칠을 계속하였다. 문하(門下)의 스님들이 대사(大師)의 기적비(紀蹟碑)를 세워 길이 빛나게 할 수 있도록 윤허를 요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으나 석판(石版)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 남해(南海)의 해변인 여미현(汝湄縣)에서 채취하여 선편(船便)으로 운반해 오도록 하였지만, 그 노비(勞費)를 계산하니 천만냥(千萬兩)만 드는 것뿐만 아니었다. 그러나 재가를 맡아 그 곳에 가서 채석공사(採石工事)를 시작하려 하였는데, 뜻밖에 문인(門人)이 본산(本山)의 기슭에서 석판(石版)을 캐냈으니 모양이 매우 크고 높고 넓었으며, 빛은 청백색(靑白色)이어서 번거롭게 다듬지 않더라도 별다른 흠이 없을 뿐 아니라, 인력을 많이 투입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이는 떳떳이 천우신조(天佑神助)에 부합한 일이었다. 이를 자세히 왕에게 보고하니 임금께서 크게 기꺼워 이를 허락하였다. 지금 사내(寺內)에는 옛 선사의 법갈(法碣)이 있는데, 이 비는 지증국사의 비로서 신라 말 전진사(前進士)였던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이다. 그 돌도 남해(南海)로부터 가져온 것이어서 지금까지도 그 역사(役事)에 대한 원성이 전해 오고 있다. 대사의 생존시에 기상(奇祥)과 비설(秘說)을 죽간(竹簡)에 기록하되, 남산(南山)의 돌을 벼루로 삼아 먹을 갈아 마멸하고, 동해(東海)의 바닷물을 먹물로 하여 그 물이 말라 다하더라도 어찌 이를 다 기록할 수 있으랴! 신(臣) 몽유(夢游)는 (결락) 술(術)하고, 학문이 계창(雞牕)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자못 폐하의 명을 받들어 비문을 지을 능력이 없다고 고사(固辭)하였지만, 끝내 면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붓을 잡고 스님의 위대한 도덕을 나타내고자 문득 직필(直筆)로써 사실대로 적었으나, 이는 마치 달팽이 껍질로 바닷물을 헤아리는 것과 같아서 헛된 수고만 할 뿐이며,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쳐다보나 별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말은 한선(寒蟬) 과 같고 행(行)은 절름발이 거북과 같다 하겠다. 실로 비문 짓는 일을 맡았으나, 상수(傷手)함을 초래할까 근심하는 바이다. 삼가 명(銘)하여 가로되,

무상심심 미묘법을 아무나 받을건가 상대(相對)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로써 전해왔네! 물 속에 비친 발을 움켜잡기 어려우며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 꿸 사람 누구인가. 역대로 전수(傳授)하는 신의(信衣)를 전해 받으니 지혜의 횃불이 우주를 비추니 그 광명(光明) 두루하여 태양처럼 혁혁(赫赫)하여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두루 비추었도다. 초연한 그 경지(境地)는 동(動)도 정(靜)도 아니거늘 그 어찌 선후좌우(先後左右) 처소가 있겠는가. 이러한 깊은 법을 터득한 이 누구인고 희양산 주인공(主人公)인 정진대사(靜眞大師) 그 분일세! 영특(靈特)한 그 바탕은 태일(太一)을 이었으니 이 같은 위인(偉人)이란 반천년(半千年)에 날까 말까 하는데 원력(願力)이 넓고 깊어 여의주(如意珠)를 찾으려고 창파(滄波)에 몸을 실어 생명(生命)을 던졌도다. 구름처럼 떠다니며 명승(名勝)을 참배하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유연(幽燕)을 지났도다. 오대성지(五大聖地)의 하나인 청량산(淸凉山) 높은 언덕 대성문수보살(大聖文殊菩薩)의 묘덕당(妙德堂) 앞에 섰네. 칠불조사(七佛祖師)인 용종상불(龍種上佛) 친견하옵고 가섭의 정법안장(正法眼藏) 계족선(鷄足禪)을 받으려고 도오원지(道吾圓智)의 제자 석상법(石霜法)을 앙모하여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제자 곡산도연(谷山道緣)을 찾았네! 진리(眞理)의 세계에 들어 심오(深奧)함을 깨닫고 쵀탁(啐啄)이 동시로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거양(擧楊)했네! 망망(茫茫)하고 고요한 진여(眞如)의 바다에서 태평가(太平歌) 부르면서 반야선(般若船)에 높이 앉아 원력을 성취하고 본국(本國)으로 돌아왔네. 아직도 치열했던 전운(戰雲)이 남아 있어서 산중(山中)에 은둔하여 학(鶴)처럼 살고 싶어 (결락) 야구(野寇)와 산적(山賊)들은 말끔히 소멸되고 승전(僧田)을 크게 열어 사사(四事)를 공양하니,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찬양하고 앙모함이 더욱 더 견고했네! 도덕은 높고 높아 네 임금이 찬양했고, 그 이름 우뚝하여 따를 이 뉘 있으랴! 망극한 그 은혜(恩惠)는 조야(朝野)를 뒤덮었고 홍대(弘大)한 그 공덕(功德)은 인천(人天)에 두루했네! 임금께서 피석(避席)하여 공경을 다하였고 예의는 정중하여 단견(袒肩)하고 예배(禮拜)했네! 사사(四事)를 공양하되 하나도 빠짐없이 별도로 구연(九筵)을 베풀 필요(必要) 없었도다. 임금께 간청하여 서울을 벗어나서 본사(本寺)로 돌아가서 운천(雲泉)에 누었으니, 밝은 하늘 가을달은 시내에 비쳤고 싸늘한 새벽 동구(洞口) 노을이 가득하네. 서방(四方)에서 찾아오는 문객(門客)은 끊임없고 임금께서 보내오는 전역(傳譯)은 줄을 이었네. 진여(眞如)의 청정법(淸淨法)은 상주(常住)하여 불변(不變)이나 변화(變化)는 무상(無常)하여 홀연히 멸진(滅盡)하는 법. 자비로운 거실(巨室)은 이미 무너졌으니, 지혜의 광명(光明)줄기 번개처럼 사라졌네! 산에 있는 송백(松柏)은 모두 말라죽었고 연못에는 물이 말라 백련(白蓮)이 고사(枯死)했네. 비석은 돌로 뭉쳐진 석봉(石峰)을 버티었고 사리탑(舍利塔)은 산봉우리처럼 높이 솟았네! 지금 세운 이 비문 영원히 남아서 초목(草木)과 함께 길이 봉암사를 비추소서!

건덕(乾德) 3년 세재을축(歲在乙丑) 5월 신미삭(辛未朔) 21일 신묘(辛卯)에 세우고, 조각하는 작업은 섬율(暹律)스님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판독문

  • 출처: 허흥식, 『한국금석전문』중세상, 아세아문화사, 1984.[2]


  靜眞大師碑銘(題額)」

高麗國尙州曦陽山鳳巖寺 王師贈諡靜眞大師圓悟之塔碑銘幷序」
     奉議郎正衛翰林學士前守兵部卿賜丹金魚袋臣李夢游奉 勅撰」
     文林郎翰林院書博士臣張端說奉 勅書幷篆額」
嘗聞八極之中括地貴者曰身毒三界之內推位尊者曰   勃陁西顧之德天彰東流之敎日遠是故伯陽著我師之論尼父發聖人之譚矧復隕星紀於魯書」
金姿放耀佩日徵於漢夢玉牒傳聲轉四諦輪說三乘法化緣已畢臨涅槃時告迦葉兼付其無」
上法寶欲令廣大宣流宜護念以常勤俾脫苦於生死由是大迦葉以所得法眼付囑阿難自此傳承未嘗斷絶中則馬鳴龍樹末惟鶴勒鳩摩相付已來二十七代後有達摩大師是謂應眞菩薩南大辭國東夏傳風護心印以無刓授信衣而不墜東山之法漸獲南行」
至于曹溪又六代矣自尒繼明重跡嫡嗣聯綿曹溪傳南岳讓讓傳江西一一傳滄州鑒鑒猶東顧傳于海東誰其繼者卽南岳雙磎慧昭禪師焉明復傳賢磎王師道憲憲傳康州伯嚴楊孚禪師孚卽」
我大師嚴師也   大師諱兢讓俗姓王氏公州人也祖淑長父亮吉並戴仁履義務存達己之心積德豐功貴播貽孫之業勞筋骨而服職抱霜雪以淸心州里稱長者之名遠近聞賢哉之譽况自高曾之世咸推郡邑之豪戶不難知故無載此母金氏女功無敵婦」
道有規擬截髪以專情指斷機而勵節敬恭僧佛禮事舅姑俄夢流星入懷其大如甕色甚黃潤因有娠焉由是味撤葷腥事勤齋護循胎敎以無已幾過期而誕生   大師天骨特異神彩英奇自曳萊衣迨跨竹騎縱爲兒戱猶似老成坐必加趺行須合掌聚沙畫」
墁模像塔以依俙採葉摘花擬供具而陳列年至鼓篋日甚帶經訓詩禮於鯉庭聽講論於鱣肆頗勤三絶謂隘九流乃懇白於慈母嚴君固請許於出家入道投於本州西穴院如解禪師因爲剃髮便以留身志在朝聞學期日益實由功倍誰曰行遲桴乍援之鍾遽」
矣於是知有赫㬢之曜休窺突奧之出指四方行擇三友遂以乾寧四載於雞龍山普願精舍禀持犯然後坐雨心堅臥雲念切護戒珠而不類磨慧劍以無鋼能持繫草之心轉勵出塵之趣唯勤請益靡滯遊方遂謁西穴院揚孚禪師禪師豁靑眼以邀迎推赤心而」
接待於是持其由瑟皷在丘門旣名知十之能或展在三之禮服膺不怠就養惟勤俄歎曰急景如駒流年似箭若跼牛涔之底未浮鼇海之波難詣寶洲焉窮彼岸乃以光化三䄵伺鷁舟之西泛逐鵬運以南飛匪踰信宿之閒獲達江淮之境纔越天壁壍往雪峯到飛」
猿嶺上遇般米禪徒同路而行一時共歇徒中有一僧指枯榕曰枯木獨占定春來不復榮 大師接曰逈然塵境外長年樂道情於是衆皆歎伏無不吟傳縱煩皷舌之勞頗叶傳心之旨遂隮于台嶺謁遍禪居或扙虎錫於雪嶠雲岑或洗龍鉢於飛溪懸㵎旣多適願」
愈切尋幽詣於谷山謁道緣和尙是石霜之適嗣也乃問曰石霜宗旨的意如何和尙對云代代不曾承      大師言下大悟遂得默達玄機密傳秘印似照秦皇之鏡如探黃帝之珠洞究一眞增修三眛藍茜沮色珠火耀光標領袖於禪門占笙鏞於法苑何啻赳赳」
實是錚錚者矣   大師又製偈子呈和尙曰十个仙才同及第牓頭若過總得閒雖然一个不迴頭自有九人出世閒和尙覽之驚歎因造三生頌許令衆和   大師養勇有餘當仁不讓搦兎毫而拆理編鳳藻以成章莫不價重碧雲韻高白雪豈眞理之究竟」
倂綴緝之硏精於世流傳故不載錄    大師心澄止水跡寄斷雲異境靈山必盡覽遊之興江南河北靡辭跋涉之勞以梁龍德四年春跳出谷山路指幽代將禮五臺聖跡遠履萬里險途届於觀音寺憇歇之際晝夜俄經忽患面上赤瘡致阻叅尋之便未逢肘後」
秘術莫資療理之功久不蠲除漸至危篤遂乃獨坐槃堂上暗持菩薩願心頃刻之閒有一老僧入門問曰汝從何所所苦何如   大師對曰來從海左久寓江南若是毒瘡弗悆而已乃曰且莫憂苦宿寃使然便以注水如醴洗之頓愈謂曰我主此山暫來問慰」
唯勤將護用事巡遊辭而出歸豁如夢覺皮膚不損瘕癬亦無者盖爲   大師躬踐淸涼親瞻妙德由早承於龜氏宗旨果獲遇於龍種聖尊不可思議於是乎在厥後西經雲盖南歷洞山境之異者必臻僧之高者必覲後唐同光二年七月迴歸達于全州喜安縣」
浦口洎至維舟深諧捨筏是猶孟嘗之珠還在浦雷煥之劒復入池德旣耀於寶身志益堅於高蹈矧屬天芒伏鼈地出蒼鵝野寇山戎各競忿爭之力巖眉岫幌半羅焚之灾爰遵避地之機仍抗絶塵之跡效玄豹之隱霧畏鳴鶴之聞天庇影山中韜光廡下而乃雖」
曰煙霞之洞漸成桃李之蹊莫遂潛藏更議遷徙康州伯嚴寺是西穴故師所修刱移住也以自 先師謝世法匠歸眞門人多安仰之悲信士發靡依之歎况又雲磎煙嶺四時之變態相高松韻竹聲百籟之和唫不斷宛秀東林之境堪傳西域之宗越以天成二秊就」
而居焉   大師臺法鏡以常磨照通無硋篪禪鏞而待扣響應有緣遂使歸萬彙之心拭四方之目訪道者雲蒸霧涌請益者接踵聯肩化遍海隅聲振日域新羅景哀王遙憑玄杖擬整洪綱雖當像季之時願奉禪那之敎乃遣使寓書曰恭聞   大師早踰溟」
渤遠屆曹溪傳心中之秘印探頷下之明珠繼燃慧炬之光廣導迷津之路禪河以之汨汨法山於是峩峩冀令雞嶺之玄風播在鳩林之遠地則豈一邦之倚賴寔千載之遭逢仍上別號曰奉宗大師焉   大師方寸海納無所拒違唯弘善誘之功益愼見機之道」
至淸泰二年念言弘道必在擇山决計而已俻行裝猶預而未謀離發忽尒雲霧晦暗咫尺難分有神人降謂   大師曰捨此奚適適湏莫遠於是衆咸致惑固請淹遲   大師確然不從便以出去有虎哮吼或前或後行可三十里又有一虎中路相接左右引」
導似爲翼衛至于曦陽山麓血餘印跡方始迴歸   大師旣寓鳳巖尤增雀躍是以陟彼峯巒視其背面千層翠巘萬疊丹崖屬賊火之焚燒致刼灰之飛撲重巒複㵎固無遷變之容佛闥僧房半是荊榛之地屹尒者龜猶戴石禪德鐫銘巋然者像是鑄金靈光照」
耀旣銳聿修之志寧辝必葺之功追迦葉之踏泥效揵連之掃地營搆禪室誘引學徒寒燠未遷竹葦成列   大師誘人不倦利物有功至使商人遽息於化城窮子咸歸於寶肆列樹而栴檀馥郁滿庭而菡紛敷恢弘禪祖之風光闡法王之敎恩均兼濟德瞻和」
光雖守靜黙於山中而示威猛於域內潛振降魔之術顯揚助順之功遂使蟻聚兇徒虵奔逆黨遽改愚迷之性勿矜强暴之心漸罷爭田各期安堵時淸泰乙未歲也」
我太祖以運合夷兇時膺定亂命之良將授以全師指百濟之狡窟䲷巢展六韜之奇謀異略桴皷而山河雷振張旗而草樹霞舒我則鷹揚彼皆魚爛黜殷辛於牧野敗楚羽於烏江竭海刳鯨傾林斬兕四紀而塵氛有暗一朝而掃蘯無遣是用封墓軾閭繼周王之高」
躅重僧歸佛遵梁帝之遺風摸五天而像飾爰崇闢四門而英賢是召於是道人輻湊禪侶雲臻爭論上德之宗高賛太平之業此際   大師不待鵠版便出虎溪動白足以步如飛伸雪眉而喜可見路次中原府府有鍊珠院院主芮帛常誦楞迦未甞休息至是夜」
夢仙竪從堵波頂上合掌下來曰當有羅漢僧經過宜以預辦供待者翌旦集衆言其所夢衆皆歎異洒掃門庭竚立以望至于日夕果   大師來及詣京師   太祖見而異之危坐聳敬因問傳法所自莫不應對如流懊見   大師之晚乃從容相謂曰」
自玄奘法師往遊西域復歸咸京譯出金言秘在寶藏降及貞元已來新本經論多故近歲遣使閩甌贖大藏眞本常令轉讀弘宣今幸兵火已熸釋風可振欲令更寫一本分置兩都於意如何   大師對曰此實有爲功德不妨無上菩提雅弘經博能諱佛心其」
佛恩與   王化可地久以天高福利無邊功名不朽矣自尒一心敬仰四事傾勤或闢紫宸而懇請邀延或詣紺宇而親加問訊而乃鶴情猶企戀雲洞以日深▨▨▨鳳扆是辭出天衢而電逝是以命僧史以援送厚淨施以寵行道路爲之光▨▨▨▨▨▨▨一」
歸霞嶠七換星槐毎傳驛之往來寔香茗之饋遺俄聞 九天之鼎駕昇遐四海之金絲遏密雖是忘言之者豈無出涕之哀曁」
惠宗纂承丕搆繼禀   先朝遣乘軺之可使稱負扆之有因由是   大師馳僧介以飛奏章慶王統之光嗣緖遙伸祈祐未暇締緣雖崆峒之請有期奈蒼梧之巡不返迨于   定宗繼明御宇離隱統天常注意於釋門冀飫味於禪悅   大師不辭跋」
履步至京華設毉國之藥言喩從繩則木正事如投水道冾補天心有餘書紳可驗乃以新製磨衲袈裟一領寄之及乎歸山又以新寫義熙本華嚴經八帙送之盖爲  大師色空無異語黙猶同每矕金言常披玉軸故也」
今聖騰暉虹渚毓德龍淵顯膺千載之期光嗣九天之位功高立極業盛承基將安東土之人深奉西乾之敎勤庶政於君道種多福於僧田定水於禪河泛慈波於   宸澤楞迦之門大啓摠持之菀廣開遂欲遠迓慈軒親瞻慧眼以  聖朝光德二年春馳」
之馹騎寓以龍緘叙相遇之必諧懇來儀之是望   大師亦擬出東林將朝   北闕催淨人之晨爨趍從者之行裝時寺有一面鼓架在法堂上忽然自鳴厥聲坎坎若山上之砰礚猶谷底之颼衆耳皆驚同心請駐   大師確不從請便以出行行至途」
中果遇中使禪侶則來經月岳 王人則去涉漢江旣忻邂逅之逢不議逡巡   之退洎乎路入圻甸禮備郊迎仍令諸寺僧徒滿朝臣宰冐紅塵而導從步紫陌以陪隨尋於護國帝釋院安下詰旦▨▨▨上高闢天門別張淨室親迎雲毳特設齋筵伸鑚仰之素誠用」
諮諏於    大師旣諧就日必擬迴天言忘言之言說無說之說豈獨資乎道味抑能道乎政風雅弘開濟之功終叶歸依之懇迺以其年四月移住舍那禪院仍送磨衲袈裟一領兼營齋設無不精勤   上謂群臣曰顧惟幼冲獲承基搆每當機務之暇」
討史籍之文昔自軒皇逮于周發僉有師保用匡不怠故曰君民也師臣則王友臣則霸况師高尙者可謂其利博哉今見曦陽   大師眞爲化身菩薩矣何不展師資之禮乎僉言可矣罔有異辭於是   上命兩街僧統大德法輿內議令太相皇甫▨▨▨▨」
詣禪扃備傳   聖旨續遣中使送錦緣磨衲袈裟一領幷踵頂之飾等然後   上領文虎兩班及僧官暫出 珠宮親臨金地手擎鵲尾面對龍頤仍詔翰林學士太相守兵部令金岳宣 綸制曰昔晉主遇於遠公傾心頂戴吳王逢於僧會禮足歸依人天盛」
傳古今美事寡人雖德慙往哲而志敬空門勵行孜孜修心愓愓   大師優曇一現慧日重明瞻蓮眼而煩惱自銷覩果脣而塵勞頓息多生因果今世遭逢敢啓至心仰聞淸德願展爲師之禮冀成累刼之緣躬詣松關面伸棗懇伏希慈鑒俯許誠祈請光師道敬」
加尊號爲證空大師刧刧生生託慈航之濟渡在在處處攀慧幟以游揚頓首謹白於是道俗具寮一齊列賀禮無違者道益尊焉   大師跡現四依功修萬刧言必契理行乃過人旣交香火之緣有期忉利之行開示希夷之旨發揚淸淨之風顯整王綱丕傳法密」
傳法寶實使   金輪悠久益能   玉扆光輝慈燈之熖透三韓甘露之澤均一國自棲輦轂屢換星霜化導之功已成肥遁之身是退越以周廣順三年秋還歸故山焉   上以摳衣避席從請益以匪虧遠致高情奈忘機之不輟躬攀法軑泣送山裝策杖」
徐行恣鶴步於三秋曠野拂衣輕擧尋鳥道於萬里舊山尒後軺騎聯翩王人往復交轡道路綴影巖磎贈之以香盌水甁極彫鏤之工巧副之以鳩坑蠻海窮氣味之芳馨慶頼旣多虔恭益切至顯德三年秋八月十九日忽告衆曰吾西學東歸將踰三紀擇山而住誘」
引後來借以靑山白雲導彼迷津失路毎或披尋玉偈資國福緣今風燭水泡未能以久難將作矣吾欲焉往各執尒心勉遵佛訓又謂傳法之首逈超禪師曰尒宜▨搆室繼以傳燈唯事光前無墜相付者言訖而洎然坐滅享齡七十九歷夏六十是日也天昏雨黑地動」
山揺鳥獸悲鳴杉栝莠悴於是緇素學流遠近耆幼覩變異之非常含悲憂而競集洒泣流於原野哀響振於山溪豈惟魯聖發壤木之歌闍王驚折梁之夢而已哉」
上聞之震悼哭諸寢焉乃遣使左僧維大德淡猷元尹守殿中監韓潤弼等吊以書賻以穀及茗馞」
又遣諡號塔名使元輔金俊嵒使副佐尹前廣評侍郎金廷範等贈淨諡曰   靜眞大師圓悟之塔仍命有司寫眞影一舖錦緣金軸不日而成幷題讃述因令右僧維大德宗乂正輔金瑛正衛兵部卿金靈祐等允送   眞影使兼營齋設若▨▨▨▨▨▨▨」
遂使飾之禮著矣尊師之道焯焉   大師立性純樸抱氣英奇眼點珠明骨聯金細汪汪焉波澄萬頃磊磊若嶽聳千尋每以勸勵學徒語簡旨遠故或問曰不離左右猶不識者何   師云我也不識闍梨問彼此不相識時如何   師云東西不辶▨▨」
成一處活   師云陽日轉高後代何憂其所謂簡遠多此類也豈土木之形骸無毫氂之差錯所禀護犯一無缺遺故得年漸逼於桑楡身轉輕於黍累或當盥浴坐在盈中宛若浮瓢未甞潛沒又衲衣壞獘縱不瀚濯軆無所癢蟣蝨不生若此已來殆餘四紀甞於微」
時夢坐于三層石浮圖上者衆中有解者云   大師必見三度加號爲萬乘師事矣聽者歎驚來如墻進尋時致賀後實果焉及臨滅時寺之東峯西嶺蒼栢寒松色變慘凋侔於鵠樹又山之北面無故崩墜約百餘丈高亦有於兎從東南 繞寺行過悲鳴長皐聲
動溪洞聠於晝夜靡有斷絶洎門下僧表請樹碑紀績耀于不朽   上許之乃爲石版可者尤難命於南海之濱汝湄縣掘取以船運至算其勞費何啻千萬裁及使人到彼人議役興功門人忽於本山之麓掘獲石版狀甚高闊色惟靑白不煩琢磨苟無瑕玷無煩人」
功雅符神授具以表聞   上乃悅許此者以今寺內有故禪師法碣是新羅末前進士姓崔名致遠者所撰文其石亦自南海而至今多說役使興譏故也   大師在世之時奇祥秘說縱使書之翻竭南山硏之波乾東海豈能備言而具載矣臣夢游▨▨▨」
術學寡雞牕謹奉   綸言莫抗固辭之禮覬彰碩德輒書直筆之詞而乃嚮碧沼以傾蠡雖迷深淺仰靑天而測管莫究星辰語類寒蟬行同跛鼈苟任抽毫之寄飜招傷手之憂謹爲銘曰   無上之法不二而傳月影難掬露珠莫穿信衣爰授智炬迺燃光明」
有赫照耀無邊非動非靜何後何先誰其覺者   我大師焉靈資太一誕叶半千志探龍頷身泛驪淵雲遊華夏浪跡幽燕淸凉山畔妙德堂前瞻龍種聖企鷄足禪仰石霜諸承谷山緣入室覩奧問道探玄游眞如海扣般若舩方迴征棹偶値戎煙鶴歸有所遯跡」
多年曁平寇壘大闢僧田倚賴罔極鑚仰彌堅道贊四主名占一賢恩流朝野德及人天   吾皇避席禮甚袒肩實供四事何暇九筵跳出京輦歸臥雲泉秋溪月浸曙洞霞塡隨身甁錫滿眼山川問訊往復傳驛聯翩法唯常住化乃俄遷慈室壤矣慧柯缺焉山變」
蒼栢池慘白蓮碑撑石巘塔聳巖巓斯文不朽永耀蓬壖」
乾德三年歲在乙丑五月辛未朔二十一日辛卯立   彫割業僧臣暹律奉」
 勅刻字」 

주석

  1. 온라인 참조: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