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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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자 軍威 麟角寺 普覺國師碑
승려 일연(一然)
찬자 민지(閔漬)
서자 왕희지(王羲之)



번역문

  • 출처: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사4, 가산문고, 1997.[1]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 (題額)

고려국(高麗國) 의흥(義興) 화산(華山) 조계종(曹溪宗) 인각사(麟角寺) 가지산하(迦智山下)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와 아울러 서서(序序) 원(元)나라 세조(世祖)로부터 조열태부(朝列太夫)와 한림(翰林)직학사(直學士)의 직(職)을 받았고, 본조(本朝)로부터 정헌대부(正憲大夫) 밀직사(密直司) 좌승지(左承旨)국학(國學) 대사성(大司成) 문한(文翰) 시강(侍講) 학사(學士) 충사관(充史館) 수찬관(修撰官) 지제고(知制誥) 지판도사(知版圖司) 사세자(事世子)우유선(右諭善) 대부(大夫)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등직(等職)을 역임한 신(臣) 민지(閔漬)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죽허(竹虛)는 교칙(敎勅)에 의하여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기다

대저 맑은 거울과 탁금(濁金)이 원래 이물(二物)이 아니요, 혼파(渾波)와 담수(湛水)가 그 근원의 물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은 같으나, 지말(枝末)에 있어 다른 것은 거울의 같고 같지 않음과, 물의 요동(搖動)하고 요동하지 않는데 있을 뿐이다. 제불(諸佛)과 중생의 불성(佛性)도 또한 거울과 물의 경우와 같아서, 다만 미(迷)하고 오(悟)한 차별일 뿐이니, 누가 감히 우치하고 슬기로움이 따로히 종자(種子)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지우(至愚)인 중생으로써 대각(大覺)인 세존(世尊)과 비교하면 소양(霄壤)보다 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한 생각을 돌이켜 전미개오(轉迷開悟)하면 곧 본각(本覺)인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가섭(迦葉)이 미소(微笑)함으로부터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천(西天)에서 중국에 온 이후, 법등(法燈)과 법등이 상속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러 온 것은, 모두 이것에 의한 것이다. 스승이 그의 마음을 전함에, 제자는 그 골수(骨髓)를 얻었다. 이로부터 혜일(慧日)을 우연(虞淵)에서 회전(廻轉)하여 그 신광(神光)을 상역(桑域)에 비추게 한 분은 오직 우리 보각국존(普覺國尊)뿐이라 할 것이다. 국존(國尊)의 휘는 견명(見明)이요, 자는 회연(晦然)이었으나, 뒤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속성은 김씨(金氏)요, 경주(慶州) 장산군(章山郡)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언필(彦弼)이니, 벼슬은 하지 않고 교사(敎師)로써만 일생을 살았으므로, 죽은 후에 좌복야직(左僕射職)을 추증(追贈)받았고, 어머니는 이씨(李氏)니,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으로 봉(封)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의 꿈에 태양이 방안에 들어와 그 빛이 복부(腹部)에 비추기를 사흘 밤을 계속하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태화(泰和) 병인년(丙寅年) 6월 신유일(辛酉日)에 탄생하였다. 날 적부터 준매(俊邁)하여 의표(儀表)가 단정하고, 풍준(豊準)한 몸매에 입은 방구(方口)이며, 걸음은 우행(牛行)이고, 살핌은 호시(虎視)와 같았다.

어릴 적부터 세진(世塵)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어 나이 즉 연보(年甫)가 9살 때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로 가서 취학(就學)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 총명함이 비길 자가 없었다. 유시(有時)에는 밤이 새도록 마치 말뚝처럼 위좌(危坐)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흥정(興定) 기묘년(己卯年)에 진전사(陳田寺)의 대웅장로(大雄長老)를 은사(恩師)로 하여 득도(得度)한 다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로부터 선방(禪房)으로 다니면서 참선하여 명성이 점점 높아져서 당시 사람들이 추대하여 구산(九山) 중 사선(四選)의 수장(首長)으로 삼았다. 정해년(丁亥年) 겨울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승과(僧科)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그 후 포산(包山) 보당암(寶幢庵)에 주석하면서 마음에 간절히 선관(禪觀)을 닦았다. 병신년(丙申年) 가을에 병란(兵亂)이 있어 스님께서 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곧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염(念)하면서 감응(感應)을 기약하였더니, 홀연히 벽간(壁間)으로부터 문수보살이 현신(現身)하여 이르시기를 무주난야(無住蘭若)에 주석(住錫)하라고 계시하였다. 그 다음해 여름 다시 이 포산(包山) 묘문암(妙門庵)에 거주(居住)하였으니, 암자 북쪽에 난야(蘭若)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무주(無住)이므로, 곧 전일(前日)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기별(記莂)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 암자(庵子)에 주석하면서 항상 생계가 불감(不減)하고, 불계(佛界)가 불증(不增)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참구(參究)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활연대오(豁然大悟)하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금일(今日)에야 비로소 삼계(三界)가 환몽(幻夢)임을 알고 보니, 진대지(盡大地)가 섬호(纖豪)만치도 장애(障礙)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비수(批授)받았으며, 병오년(丙午年)에는 이어 선사(禪師)의 법계를 받았다. 기유년(己酉年)에 정상국(鄭相國)인 안(晏)이 남해(南海)에 있는 사제(私第)를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정림사(定林寺)라 이름하고, 스님을 청하여 주지로 추대하였으며, 기미년(己未年)에 이르러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받았다. 중통(中統) 신유년(辛酉年)에 왕명을 받들어 개경(開京)으로 가서 선월사(禪月社)에 주석하면서 개당(開堂)하고 목우화상(牧牛和尙) 지눌(知訥)의 법통을 요사(遙嗣)하였다. 지원(至元) 원년(元年) 가을에 이르러 여러 차례 남환(南還)을 요청받고, 오어사(吾魚社)에 우거(寓居)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인홍사(仁弘社) 주지만회(萬恢)가 일연(一然)에게 주석(主席)을 넘겨 주었는데, 학려(學侶)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무진년(戊辰年) 여름 왕명에 의하여 이름이 높은 선사(禪師)와 강사(講師) 등 1백 명을 초청하여 대장경(大藏經) 조조(彫造)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운해사(雲海寺)에 개설하고, 스님을 청하여 주맹(主盟)으로 모시고, 낮에는 금문(金文)을 독송하고, 밤에는 종취(宗趣)를 담론(談論)하니, 제가(諸家)들이 의심하던 바를 스님께서 모두 해박하게 부석(剖釋)하였으니,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유연하여 핵심적인 뜻이 귀에 속속 들어와서 경복(敬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스님께서 인홍사(仁弘社)에 주석한지 11년만에 이 절이 창건한지 아미 오래되어 전당(殿堂)이 퇴락할 뿐아니라, 또 추애(湫隘) 즉 지반이 내려 앉고, 너무 비좁아서 중수(重修)하거나, 신건(新建)하여 회곽(恢廓)하게 확장하고 조정(朝廷)에 주청하여 인홍사를 고쳐 인흥사(仁興寺)라 이름하고, 어필(御筆)로 제액(題額)을 하사받았으며, 또 포산(包山)의 동쪽 기슭에 있는 용천사(涌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개칭하였다. 충렬왕이 즉조(卽祚)한지 4년 정축(丁丑)에는 임금이 운문사(雲門寺) 주지(住持)로 추대하여 현풍(玄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께서는 스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날로 깊어져 다음과 같은 찬시(讚詩)를 지어 보냈다.


밀전(密傳)함에 어찌 구의(摳衣)를 필요(必要)하랴? 금지(金地)서 서로 만남 기이(奇異)할 뿐일새 연공(璉公)도 왕청(王請) 받아 궐내(闕內)로 갔거늘 스님은 어찌 백운(白雲)만 그리십니까?

신사년(辛巳年) 여름 왕이 동정(東征)으로 인하여 동도(東都)로 행차하여 스님께 부행(赴行)하기를 청하여 주중(駐中)에서 법문을 듣고, 크게 존경심을 일으켜 불일사(佛日社)에서 결사(結社)하게 된 그 결사문(結社文)에 제압(題押)하여 불일사에 보관토록 하였다. 다음해 가을 근시(近侍) 장작윤(將作尹) 김군(金頵)을 보내서 조서(詔書)를 가지고 궐하(闕下)로 맞이하여 대전(大殿)에서 선법문(禪法門)을 청해 듣고, 용안(龍顔)에 기꺼움이 가득하였다. 이어 왕명으로 유사(有司)에게 시켜 광명사(廣明寺)내에 원관(院舘)을 짓게 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입원(入院)케 한 날 밤중에 어떤 사람이 방장실(方丈室) 밖에 서서 이르기를 “저 왔습니다.”라고 하므로, 세 번이나 문을 열고 살펴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겨울 12월에는 충렬왕이 수레를 타고 친히 스님을 방문하여 법문을 들었다. 다음해 봄 임금께서 군신(群臣)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선왕(先王)들은 모두 석문(釋門) 중에 덕이 높은 스님은 왕사(王師)로 모시고, 또 더 큰 스님은 국사(國師)로 추대하였거늘, 부덕(否德)만이 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운문화상(雲門和尙)은 도(道)가 높고, 덕(德)이 커서 모든 국민이 함께 숭앙(崇仰)하거늘, 어찌 과인(寡人)이 스님의 자택(慈澤)을 크게 입었음이랴! 마땅히 모든 국민들과 함께 존숭하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우승지(右承旨)인 염승익(廉承益)을 보내서 윤지(綸旨)를 받들어 청하여 합국존사(闔國尊師)의 예를 행하려 하였으나, 스님은 표장(表狀)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사신을 보내서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고,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등을 보내어 책봉하여 국존(國尊)으로 삼고, 호를 원경충조(圓徑冲照)라 하였다. 4월 신묘일(辛卯日)에 대내(大內)로 맞이하고, 왕이 몸소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구의(摳衣)의 예(禮)를 행한 다음, 국사를 고쳐 국존이라 하게 된 것은, 대조(大朝)[원(元)]의 제도인 국사(國師)란 칭호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스님은 평소에 경연(京輦)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노모를 곁에서 모시기 위해 구산(舊山)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비는 그 사의(辭意)가 심히 간절하여 임금께서 거듭 그 뜻을 어기고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윤허하시고, 근시(近侍) 좌랑(佐郞) 황수명(黃守命)에 명해서 귀산(歸山)을 호행(護行)하여 영친(寧親)토록 하였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출가자(出家者)로써 희유(希有)한 효심(孝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 다음해에 노모께서 96세로 별세(別世)하였다. 그 해에 바로 조정(朝廷)에서는 인각사(麟角寺)로써 스님의 하안지지(下安之地)로 삼고, 근시 김용일(金龍釰)에게 명하여 절을 수즙(修葺)케 하고, 또 토지(土地) 백여경(百餘頃)을 헌납하여 상주(常住)를 갖추도록 하였다. 스님께서 이 절에서 구산문(九山門)의 도회(都會)를 개설하니, 총림의 성황(盛況)이 근고(近古)에 비길데 없었다.

기축(己丑)년 6월 병(病)이 일어났고, 7월 7일에 이르러 손수 대내(大內)에 올릴 편지를 쓰고, 또 시자(侍者)를 시켜 편지를 써서 상국(相國)인 염승익(廉承益)에게 보내어 장왕(長往)을 알리도록 하고는, 모든 선로(禪老)들과 더불어 날이 저물도록 문답하였다. 이날 밤 1척이나 되는 큰 별이 방장실(方丈室) 후원에 떨어지는 징후가 있었다. 다음 날 을유(乙酉)일 새벽 일찍이 일어나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 대중(大衆)에 이르기를, 내가 오늘 떠나려 하는데, 혹시 중일(重日)이 아닌지? 하고 물었다. 시자가 대답하되 중일은 아닙니다. 그러면 좋다 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법고(法鼓)를 치게 하고 스님께서는 선법당(善法堂) 앞에 이르러 선상(禪床)에 걸터 앉아 인보(印寶)를 봉함하여 장선별감(掌選別監)인 김성고(金成固)에 명하여 다시 거듭 봉필(封畢)하고, 천사(天使)가 오거든 노승(老僧)의 말후사(末後事)를 알리라 하였다. 어떤 스님이 국존(國尊)의 앞에 나타나 묻기를 “석존(釋尊)께서는 학림(鶴林)에서 열반에 드셨고, 화상(和尙)은 인령(麟嶺)에서 입적(入寂)하시니, 그 상거(相去)[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나이다.” 하니, 스님께서 주장자를 잡고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상거가 얼마냐?”고 반문하였다. 나외여 이르되 “그렇다면 금(今)과 고(古)가 마땅히 변천함이 없어 분명하게 목전(目前)에 있나이다.” 하니, 스님께서 또 주장자(柱杖子)를 잡고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분명히 목전에 있다.”라고 하였다. 나외여 이르되, “뿔을 세 개 가진 기린이 바다에 들어가고, 공여(空餘)에 달린 조각달이 물속에서 나오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훗날 다시 돌아오면 상인(上人)과 더불어 거듭 한 바탕 놀자.”고 하였다.

또 어떤 스님이 묻기를, “화상께서 백년후에 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다만 일상생활 이것 뿐이라.”고 했다. 나외여 이르되 “군왕(君王)과 더불어 일개(一箇) 무봉탑(無縫塔)을 조성하더라도 무방(無妨)하겠습니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기를 “어느 곳으로 왔다 갔다 하는가?” 하였다. 나외여 이르되, “법(法)을 묻고자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시길 “이 일은 모두 아는 사실이니, 더 이상 묻지 말라.” 하였다. 또 어떤 스님이 화상에게 묻기를 “스님은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마치 세상에 없는 것과 같으며, 몸을 보되 또한 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더 오래도록 세상에 살아 계시면서, 대법륜(大法輪)을 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이 세상에 있거나, 저 제상에 있거나, 가는 곳마다 불사(佛事)를 하고 있느니라.” 하였다. 이와 같이 문답이 끝난 다음, 스님께서 모든 선덕(禪德)에게 이르시되, “날마다 공부하는 경지(境地)를 보고하라. 가려운 통양지(痛痒之)[유념(有念)]와 가렵지 않은 불통양지(不痛痒之)[무념(無念)]가모호하여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고는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이것이 곧 통양(痛痒)이라.” 하고, 또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이것은 불통저(不痛底)라.” 하며, 세 번째 내리치고는 “이것은 통지(痛之)냐? 부통지(不痛之)냐? 시험삼아 자세히 살펴보라.” 하고는, 법상에서 내려와 방장실(方丈室)로 돌아가서 조그마한 선상(禪床)에 앉아서 담소함이 평소와 같았다. 잠시 후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조용히 입적하시니, 오색 광명이 방장실 뒤쪽에서 일어났는데, 곧기가 당간(幢竿)과 같고, 그 단엄하고 욱욱(煜煜)함은 불꽃과 같으며, 화염상(火炎上)에는 백운(白雲)이 일산(日傘)과 같이 덮인 속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떠나갔다. 때는 가을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얼굴 모양은 생전과 같이 선백(鮮白)하고 지체(支體)는 윤택하며, 굴신(屈伸) 작용은 생시와 같이 유연하였다. 원근(遠近)으로부터 참관(參觀)하러 찾아온 사람이 운집하여 마치 담장처럼 주변을 가득 채웠다. 정해일(丁亥日)에 도유(闍維)하고 영골(靈骨)을 수습하여 선실중(禪室中)에 안치하고, 문인(門人)이 유장(遺狀)과 인보(印寶)를 가지고 역마를 타고 화급히 임금께 주문(奏聞)하였다. 부음을 접한 임금은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를 보내어 척연(倜然)하게 식종(飾終)의 예식을 거행토록 하고, 또 안렴사(按廉使)에 명하여 장례를 감호(監護)케 하고는, 이어 제조(制詔)를 내려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조(靜照)라 하였다. 10월 신유일(辛酉日)에 탑을 인각사의 동쪽 산등성이에 세웠는데, 세수는 84이고, 법랍은 71세였다. 스님은 사람 됨됨이가 말할 때에는 농담하는 일이 없고, 천성(天性)은 가식(假飾)하는 일이 없다. 항상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고, 많은 대중과 같이 있으나, 마치 홀로 있는 것과 같이 조용하였다. 국존의 위치에 있으나, 항상 자신을 낮추었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스승으로부터 수학(受學)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통달하였다.

이미 도를 깨닫고는 온실(穩實)하고 자유자재하여 무애변재(無礙辯才)를 갖추어 고인(古人)들의 기연어구(機緣語句)가 반근(盤根)과 착절(錯節)처럼 얽히고 설키며, 와선(渦旋)과 파험(波險)같이 복잡한 부분을 해박하게 결척(抉剔)하여 막힌 부분을 소통케 하므로서 마치 거울처럼 훤히 보게 하여 주시니, 그 회회언(恢恢焉)하며 유인유여(游忍有餘)한 솜씨를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참선하는 여가(餘暇)에는 다시 장경을 열람하여 제가(諸家)의 장소(章䟽)를 연구하고, 곁으로 유서(儒書)를 섭렵하는 한편, 백가제서(百家諸書)를 겸수(兼修)하여 곳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되, 그 연마한 묘용(妙用)이 종횡 무애하였다. 무려 50년 동안 닦은 법도(法道)가 고매하여 있는 곳마다 서로 다투어 경모(景慕)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스님의 당하(堂下)를 참방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비록 저마다 괴걸(魁傑)이라 자부하던 자라도, 다만 스님의 유방여윤(遺芳餘潤) 곧 법문을 들으면, 모두 심취하여 망연자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머님을 봉양하는 지극한 효심은 목주(睦州) 진존숙(陳尊宿)의 가풍을 흠모한 것이다. 자호(自號)를 목암(睦庵)이라 하였고, 나이 모기(耄期)에 이르러서도 총명은 조금도 쇠퇴하지 아니하여, 학인을 가르침에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아니하였으니, 지덕(至德)과 진자(眞慈)를 갖춘 이가 아니면 누가 능히 이와 같으랴!

처음 용일(龍釰)이 인각사를 중수하라는 명을 받고 오는 도중 마산역리(馬山驛吏)의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천사(天使)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의 주처(住處)를 보수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 날 과연 지나갔으니, 스님의 덕행(德行)이 이미 사람들을 이롭게 한 것으로 관(觀)하건대, 김용일(金龍釰)의 꿈이 허황되지 않음을 알겠도다. 그 나머지 이적(異跡)과 기몽(奇夢)이 매우 많으나, 어괴(語怪)하다고 여길까 염려되어 이들은 모두 생략하는 바이다. 저서는 『語錄』2권·『偈頌雜著』3권이 있고, 그 편수(編修)한 바로는 『重編曺洞五位』2권·『祖派圖』2권·『大藏須知錄』3권·『諸乘法數』7권·『祖庭事菀』30권·『禪門拈頌事菀』30권 등 백여권이 세상에 유행(流行)하고 있다. 문인(門人) 운문사(雲門寺) 주지(住持) 대선사(大禪師) 청분(淸玢)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엮어 임금께 주문(奏聞)하였다. 행장을 전해 받은 임금께서 저로 하여금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시었으나, 신(臣)은 학식이 황천(荒淺)하여 스님의 지극한 도덕을 제대로 드날릴 수 없어 미정 미정 미루어 수년이 지났지만, 문도의 간청이 계속될 뿐아니라, 왕명 또한 끝까지 거역하기 어려워서 부득이하여 삼가 비문을 짓고 송명(頌銘)하여 가로되


서천(西天)에서 깃발을 높이 세우고, 대천세계(大千世界) 두루한 광장설(廣長舌)이여! 제법(諸法) 중(中)에 으뜸인 심인법(心印法)이여 이심전심(以心傳心) 비밀(秘密)히 단전(單傳)하였네! ① 축건(竺乾)엔 이십팔수(二十八宿) 별과 같으며 중하(中夏)엔 오조(五祖)까지 전(傳)하였으니 시간(時間)은 전후(前後)이나 사람은 같아 법등(法燈)의 그 광명(光明)은 상접(相接)하였다. ② 육조(六祖)의 가풍(家風)이신 조계일파(曺溪一派)가 동쪽나라 부상(扶桑)에 유입(流入)한 이후(以後) 혁혁(赫赫)한 지일(智日) 성천(性天)에 떠오르니 우리 스님 그 광명(光明) 융창(隆昌)시켰네! ③ 불타(佛陀)께서 열반(涅槃)한 말법세상(末法世上)에 각박(刻薄)한 세상인심(世上人心) 흉악(凶惡)만 하니 덕(德) 높으신 지인(至人)이 있지 않으면 불쌍한 중생(衆生)들 의지(依支)할 곳 없다. ④ 국존(國尊)께서 세상(世上)에 출현(出現)한 것은 서원(誓願)코 모든 중생(衆生) 구(救)함이었네! 학문(學問)은 깊고 깊어 백가(百家)에 정통(精通) 천차(千差)의 방편(方便)으로 제도(濟渡)했도다. ⑤ 남김없이 섭렵(涉獵)한 제자(諸子) 백가(百家)의 현묘(玄妙)한 그 진리(眞理)를 탐구하여서 반근착절(盤根錯節) 그 의심(疑心) 풀어주시니 밝은 거울 비추듯 명석(明晳)하도다. ⑥ 선림(禪林)에선 그 조령(祖令) 호소(虎嘯)와 같고 교해(敎海)에는 그 변재(辯才) 용음(龍吟)과 같네! 갑자기 일어나는 구름과 같이 학인(學人)들은 침침(駸駸)히 모여 들도다. ⑦ 고해(苦海) 중생(衆生) 모두를 구제(救濟)하시니 빛나는 그 공덕(功德)은 영원(永遠)하리라. 오십년간(五十年間) 온 국민(國民)의 추앙을 받아 국존(國尊)으로 불교(佛敎) 위상(位相) 크게 높혔네! ⑧ 임금께서 정성껏 법(法)을 청(請)하니 백성(百姓)들도 모두가 뜻이 같도다. 여러 차례 청(請)하여 국존(國尊)이 되니 높고 높은 그 도덕(道德) 국중(國中)에 제일(第一) ⑨ 개발(開發)한 귀(貴)한 보물(寶物) 높이 쳐들고 자항(慈航)으로 고해(苦海) 중생(衆生) 건지시도다. 방황하는 궁자(窮子) 고향을 찾게 하니 미(迷)한 길 어찌 다시 걸어 가리요! ⑩ 고요한 한 밤중 방장실(方丈室) 뒤쪽에 떨어진 별의 크기 한 자나 되고 웅장(雄壯)한 큰 법당(法堂)이 무너지시니 오고 감에 자유(自由)한 스님의 경지(境地)! 진공(眞空)이란 그 공(空)은 공(空)이 아니고 묘유(妙有)라는 그 유(有)는 유(有)가 아닐새 자취와 명상(名相) 모두 없어지고야 영원(永遠)한 열반상(涅槃床)에 오를 수 있네! 박촉(迫促)하신 왕명(王命)은 갈수록 지엄(至嚴) 신하(臣下)된 입장에서 피(避)할 길 없어 마지 못해 귀모필(龜毛筆) 손에 잡고서 무형(無形)의 몰자비문(沒字碑文) 쓰게 되었다. 괴겁(壞劫)의 맹화(猛火)가 대천계(大千界)를 태워 산하대지(山河大地) 모두가 소진(燒盡)하여도 위대(偉大)한 이 비석(碑石)만 홀로 남아서 이 비문(碑文)도 영원(永遠)히 남아지어다

원정(元貞) 원년(元年) 을미(乙未) 8월 일에 문인(門人) 사문(沙門) 죽허(竹虛)가 왕명을 받들어진(晋)의 우군(右軍)이었던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하고, 문인 내원당(內願堂) 겸 주지 통오(通奧) 진정태선사(眞靜太禪師) 청분(淸玢)은 비석을 세우다.


【陰記】

보경사(寶鏡寺) 주지(住持) 통오진정대선사(通奧眞靜大禪師) 산립(山立)이 짓고,

인각사(麟角寺) 보각국사(普覺國師) 정조탑비(靜照塔碑) 음기(陰記)

신천자(新天子)가 즉위한 원년(元年) 을미(乙未) 초여름 4월 초에, 인각장로(麟角長老)가 나를 찾아와 부탁하기를, 선사(先師)께서 열반하신지 홀연히 이미 6·7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국조(國朝)의 은례(恩禮)는 조금도 변함이 없어서 중신(重臣)에게 명하여 일연(一然) 선사의 비문을 지어 완염(琬琰)에 새겨 본원(本院)에 세우고, 또한 칙조(勅詔)하여 문도들이 체대(替代)로 사자상승(師資相承)하여 향사(香祀)를 받들게 하는 것으로 식종(飾終)의 예(禮)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스님의 공도(公徒)를 비(碑)의 음면(陰面)에 열거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낙송(絡誦)과 부묵(副墨)이 원래로 그 유서(由緖)가 있음을 알게 하려 하오니, 이 일은 오직 스님만이 오배(吾輩)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나는 이를 좋다 하고 받아 들였다. 국존께서 살아 계실 때, 산립(山立)은 인연(因緣)이 차탈(差奪)하여 스님의 문도열(門徒列)에 참예하지 못한 것을 항상 회한(悔恨)하였는데, 다행히 불후(不朽)의 부촉을 받았으니, 또한 당래(當來)에 반부(攀附)할 인연이 맺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라, 어찌 감히 하명(下命)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삼가 계수(稽首)하여 배수(拜手)하고 이르되, 화상(和尙)의 문풍(門風)이 광대(廣大)하여 모든 것을 갖추어 어떠한 말과 생각으로도 사의(思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언이폐지(一言以廢之)하고 나라가 존경하고, 모든 사람이 스스로 추앙한다라고 함이 가할 것이다. 그러나 존경하고 추앙하는 그 인유(因由)를 살펴보면, 마치 바구미가 해혜(醢醯)의 냄새를 인(因)하지 않고 모여드는 자가 없는 것과 같다. 그 중요한 원인은 스님께서 상구보제(上求菩提)인 실천 수행의 도덕이 고매하여 생사거래(生死去來)가 마치 몽환(夢幻)과 같음을 증득(證得)한 후, 하화(下化) 중생(衆生)인 지(智)·비(悲)·행(行)·원(願)으로 감득(感得)한 결과인 것이다. 국존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그가 임종(臨終)할 때, 대중을 모아 놓고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기(氣)도 다 끊어지고 많은 시간이 흘러간 후, 선원(禪源) 정(頂)스님이 어찌할 바를 몰라 실성하여 울부짖으면서 황망 중에 입탑(立塔)할 장소를 물어볼 겨를도 없이 이미 입적하시었으니, 후회막급이라면서 대중과 함께 탄식하였다. 이때 스님께서 적정(寂定) 삼매(三昧)로부터 조용히 깨어나, 대중을 돌아보고 이르되, 여기서 동남쪽으로 약 4·5리(2㎞) 쯤 지나서 임록(林麓)이 있는데, 지형의 기복이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등이 제대로 짜이고 안은(安隱)한 곳이 있는데, 마치 고총(古塚)과 같다. 이곳은 길상지(吉祥地)인 명당(明堂)이니, 탑(塔)을 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라고 하고는, 다시 처음과 같이 눈을 감았다. 제자들이 곁에 가서 흔들어 보니, 이미 서거(逝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까 생각되어 비문에는 모두 생략하였다. 옛날 광복(廣福) 선(禪)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입적하여 다비(茶毗)를 하기 위해 영구(靈柩)를 화장 섶나무인 시붕상(柴棚上)에 놓고 거화(擧火)를 하려는 순간, 곽을 뚫고 다시 일어나 유나(維那)에게 당부하되, 남행자(藍行者)로 하여금 남겨 둔 쌀과 돈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와 같은 신비와 이적(異跡)을 어찌 감히 의심할 수 있겠는가? 다비를 마치고 장차 입탑(入塔)하려는 때, 운흥사(雲興寺) 인공(印公)이 암자에 있을 적에 마침 꿈에 일연 스님이 찾아옴을 보고, 맞아들여 묻기를. “다비를 하려는 순간 다시 일어났으니, 이는 무슨 도리입니까?” 스님이 대답하되, “죽지 아니한 이치이니라.” 또 묻되 “그렇다면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하는 것입니까?” 대답하되, “그러하느니라.” 또 묻되, “그러시다면 명일(明日)에 탑을 세우는데, 스님께서 다시 들어가시렵니까?” “다시 들어갈 것이니라.” “그러시다면 탑이 문득 스님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너무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또 묻기를 “▨▨▨▨▨ 그렇다면 꿈과 생시가 같은 동열(同列)인 것입니까?” 대답하되 “같은 것이라.” 하였다. 운흥사 인공이 꿈을 깨어나, 이상하게 여겨 말하되, “다비한 다음 다시 탑을 세움에 곧 탑 속으로 들어간 것이 마치 청풍(淸風)이 소요(逍遙)하게 거래(去來)하고, 백운(白雲)이 자재(自在)히 출몰(出沒)하는 것과 같으니, 그 어찌 지인(至人)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하고, 곧 찬사를 지어 스님을 추경(追敬)하였다. 또 산립이 일연이 학인(學人)을 제접(提接)한 기연(機緣)이 자못 기이한 점을 보고, 범부(凡夫)의 위치에서는 도저히 이러한 이적을 나타낼 수 없으니, 그는 55위(位) 중 어느 위치에 이르렀는가 하고, 항상 의심이 풀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한 고찰(古刹)에 이르니, 당시 그 절에 보연화좌(寶蓮花座)를 베풀고 스님께서 그 위에 앉아 있다가 잠시 후 하좌(下座)하여 늦은 걸음으로 주변을 지제(遲際)하므로, 산립이 인흥사(仁興寺)의 선린(禪麟) 스님과 함께 뒤를 따랐다. 이때 인흥(仁興)이 나에게 이르기를, 스님은 우리 스님의 행적을 보십시오. 이미 성과(聖果)를 증득한 까닭에, 맨발로 칼을 밟고 지나가도 발바닥이 전혀 상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산립이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돈독하여지고, 전에 가졌던 모든 의심이 마치 얼음 녹듯 풀렸다. 이상과 같은 수단(數段)의 최후 입적할 때의 인연(因緣)에 의거하건대, 비록 부자(夫子)의 원장(垣牆)이 높아 몇 길이나 되더라도 그 집안의 상황을 거의 엿볼 수 있다는 말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한 번 왔다 가는 것을, 마치 몽각(夢覺)와 같다고 하였다. 또한 신장(神將)이 부병(府兵)이라 자칭하고 스님을 맞이하여 호위하고, 산령(山靈)이 신도(信徒)에게 현몽하여 스님에게 식량을 보내도록 한 것과, 화장(火葬)할 때 시붕상(柴棚上)에 앉아 있으니, 화염이 반대쪽으로 불었고, 임종(臨終)할 때 오색 광명의 줄기가 금당(金幢)과 같이 솟았다가 스러진 등등 이러한 영종(靈蹤)과 이서(異瑞)는 모두 성인(聖人)의 분상(分上)에는 쓸데없는 말변사(末邊事)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들은 모두 인기(引記)하지 아니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위의 수단인연(數段因緣)은 모두 세상 사람을 현혹시키는 일이라고 부정하여 혹자는 불자(拂子)를 들고, 주장자로 때리며, 고성(高聲)으로 갈(喝)을 하면서 부정하기도 하였다. 평상 세계의 꿈이요 50일에 한 번 깨어나는 각시(覺時)로써 허(虛)를 삼고, 몽시(夢時)를 실(實)이라 하였은 즉 스님의 입장에서는 이 성시(醒時)와 몽시가 뒤바뀐 허와 실도 또한 가정(可定)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 국존께서는 삼세(三世)가 환몽(幻夢)과 같은 경지를 증득(證得)하여 출생과 입사(入死)에 항상 몽환불사(夢幻佛事)를 시행(施行)하였으니, 이 또한 스님께서 자비로 ▨▨▨▨▨ 누구나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이에 대하여 무슨 의심(疑心)을 품을 것이 있을 것이며 어찌 감히 그에 대하여 왈가 왈부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스님의 분상(分上)에 있어, 국존의 도덕의 고매함을 애모(愛慕)하여 흑백(黑白)인 많은 승속(僧俗)들이 귀부(歸附)하는 것이니, 하지 못하도록 아무리 구책(驅策)하더라도 능히 막을 수가 없다. 항상 스님을 따르고 친부(親附)하여 피부(皮膚)를 얻거나, 골수(骨髓)를 얻었으며, 종지(宗旨)의 천양(闡揚)을 도운 모든 스님과 외호(外護)의 일을 맡은 재가(在家) 제자(弟子), 그리고 스님의 법유(法乳)를 받은 경사(卿士)와 대부(大夫) 등을 모두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대선사(大禪師) 영각사(靈覺寺)의 굉훈(宏訓) 보경사(寶鏡寺)의 신가(神可) 가지사(迦智寺)의 혜림(慧林) 마곡사(麻谷社)의 수예(守倪) 법흥사(法興寺)의 한운(旱雲) 인흥사(仁興社)의 선린(禪麟) 가지사(迦智寺)의 월장(月藏) 운흥사(雲興社)의 동우(洞愚) 주륵사(朱勒寺)의 영이(永怡) 용암사(龍巖寺)의 연여(淵如) 화장사(花藏社)의 육장(六藏) 사자원(師子院)의 지우(志于) 심산사(深山寺)의 충연(冲淵) 무위사(無爲寺)의 보정(寶精) 보연사(普淵寺)의 법열(法悅) 해룡사(海龍寺)의 경분(勁芬) 천룡사(天龍社)의 곡지(谷之) 인각사(麟角寺)의 청분(淸玢) (입비(立碑)를 주선 감독한 스님) 운주사(雲住寺)의 혜여(惠如)

수좌(首座) 홍화사(弘化寺)의 선인(宣印) 법연사(法緣寺)의 인서(印西) 월성사(月星寺)의 입기(立其) 향산사(香山寺)의 천이(天怡) 용화사(龍華寺)의 여환(呂桓) 오어사(吾魚寺)의 계잠(戒岑) 도봉사(道峯寺)의 수침(守琛) 중령사(中嶺寺)의 충담(冲憺) 인각사(麟角寺)의 정생(定生) 지론사(智論寺)의 현안(玄安) 운주사(雲住寺)의 청원(淸遠) 불일사(佛日寺)의 영숙(英淑)

선사(禪師) 견암사(見巖社)의 각령(覺靈) 도원사(桃源社)의 장리(慈一) 조암사(祖嵓社)의 지순(之純) 등억사(登億寺)의 대인(大因) 묘덕사(妙德寺)의 선연(禪演) 재악사(載岳社)의 선염(禪燄) 경암사(瓊嵓寺)의 수연(守淵) 형암사(兄巖寺)의 자인(慈忍) 청원사(淸源寺)의 인응(仁應) 형원사(瑩原寺)의 신구(信丘) 보문사(普門社)의 회희(灰喜) 거조사(居祖社)의 천과(天果)

삼중(三重) 심문(心聞) 지자(智慈) 유장(由壯) 신영(神英) 서거(西去) 경이(景伊) 인정(仁正) 찬영(贊英) 양지(良之) 몽유(夢由) 월주(月珠) 대진(大眞) 대일(大逸) 현지(玄智) 덕수(德守) 신령(信令) 도한(道閑) 홍조(弘調) 조운(祖云) 홍민(弘敏) 가관(可觀) 가열(可悅) 가안(可安) 굉우(宏右) 법상(法常) 지▨(知▨) 조순(祖詢) 내환(內幻) 신한(神閑) 원희(元希) 주환(周幻) 몽립(夢立) 선식(旋息) 형기(瑩其) 심찬(心贊) 행이(行伊) 가월(可月) 선련(禪璉) 대미(大迷) 문일(聞一) 송지(松智)

입선(入選) 천굉(天宏) 일승(日昇) 영인(英印) 마가(摩訶) 일회(日迴) 죽지(竹之) 지온(志溫) 가홍(可弘) 성회(性迴) 현지(玄智) 익현(益玄) 신일(神日) 인조(印照) 온홍(溫弘) 영월(令月) 지영(知永) 승원(昇遠) 탄홍(坦弘) 비지(庇之) ▨통(▨通)

산림(山林) 원응(元應) 심분(心賁) 선랑(禪朗) 천박(天朴) 시수(時守) 지회(知恢) 인조(仁照) 열여(悅如) 계숭(戒崇) 설기(雪其) 지인(志因) 자신(孜信) 선홍(宣弘) 조한(祖閑) 굉지(宏智) 홍령(弘令) 유기(由己) 가항(可恒)

참사(參事) 성현(性賢) 담지(湛之) 자송(自松) 태인(太印) 신찬(神贊) 수눌(守訥) 영규(令規) 인환(仁渙) 신장(信庄) 충연(沖淵) 죽허(竹虛) (왕희지(王羲之) 글씨를 집자(集字)한 스님) 백여(白如) 주열(朱悅) 영세(令世) 유엄(有渰) 지량(之亮) 유세(有世) 외우(外又) 기성(己成) 신여(信如) 인원(仁元) 지안(志安) 법기(法奇) 혜견(惠見) 현조(玄照) 학산(學山) 원선(遠宣) 유세(有世) 진안(眞眼) 한세(閑世) 효대(孝大) 회정(迴正) 선본(善本) 명계(明戒) 효총(曉聰) 가천(可千) 대휴(大休) 조송(祖松) 비환(庇桓) 묘덕(妙德) 득심(得心) 계중(階重) 가삼(可杉) 인각(印覺) 지현(智玄) 영인(令印) 지환(智桓) 도연(道淵) 조선(祖宣) 가매(可枚) 피기(彼己) 형현(瑩玄) 태의(兌宜) 중태(重太) 종자(宗資) 중계(中契) 조운(祖云) 보관(寶觀) 학생(覺生) 영숙(英淑) 법▨(法▨) 지가(志可) 온홍(溫弘) 지승(知丞) 조균(祖均) 각현(覺玄) 문일(聞一) 조남(祖南) 심체(心體) 지호(之毫) 현조(玄照) 신일(神日) 선본(善本) 득심(得心) 태사(太師) 자려(自侶)

삼품(三品)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부지밀직사(副知密直事) 감찰대부(監察大夫) 민훤(閔萱)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김군(金頵) 부지밀직사(副知密直事) 상장군(上將軍) 이덕손(李德孫) 판비서보문서(判秘書寶文署) 학사(學士) 공문백(貢文伯) 수문전(修文殿) 대학사(大學士) 임동(任銅) 지첨의사(知僉議事) 대학사(大學士) 상장군(上將軍) 김▨▨(金▨▨) 지첨의사(知僉議事) 보문서(寶文署) 대학사(大學士) ▨▨▨ 지첨의사(知僉議事) 보문서(寶文署) 대학사(大學士) ▨▨▨ 부지밀직사(副知密直事) 좌상시(左常侍) 상장군(上將軍) ▨▨▨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박▨▨(朴▨▨)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이영주(李英柱)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보문서(寶文署) 대학사(大學士) 김지(金砥) 대학사(大學士) 국자제주(國子祭酒) 지제고(知制誥) 최령(崔寧)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장군(上將軍) 박송비(朴松庇) 대학사(大學士) 상장군(上將軍) 김주정(金周鼎)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정가신(鄭可臣) 좌복사(左僕射) 참지광정원사(參知光政院事) 상장군(上將軍) 홍자번(洪子藩) 한림원사(翰林院事) 이장용(李藏用)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장군(上將軍) 송송례(宋松禮)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전현사(典現事) 원부(元傅) 참문학사(參文學士)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김구(金坵) 참문학사(參文學士) 찬성사(贊成事) 박항(朴恒)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도순문사(都巡問使) 염승익(廉承益) 추밀원(樞密院) 부성사(副成事) 김련(金璉) 상장군(上將軍) 오예(吳睿) 상장군(上將軍) 정수기(鄭守棋) 비서(秘書) 윤사재(尹司宰) 위위윤(衛尉尹) 최자혁(崔資奕)

사품(四品) 기간(己干) 김오(金吾) 전리사(典理司) 근시중(近侍中) ▨▨▨

원정(元貞) 원년(元年) 을미(乙未) 8월 일에 쓰다.

판독문

  • 출처: 가쓰라기 스에하루, 『조선금석총람』상, 아세아문화사, 1976. [2]


              翰侍講學          ▨知          賜紫金」
   ▨諸佛           ▨▨          愚望大」
    ▨                        明字晦」
                ▨而        ▨酉誕焉生」
               ▨田長老    ▨▨於是遊歷禪肆▨」
              ▨五字呪以▨感應忽於壁間文殊現身曰無」
             有悟謂▨    乃知三界如幻夢見大地無纎▨
            京住▨      牧牛和尙至至元元年秋累請南還」
            ▨主       宗趣諸家所疑師皆剖釋如流精▨」
            ▨▨      山東麓重葺涌泉寺爲佛日社 上」
            何       ▨因東征  駕幸東都 詔」
           ▨▨       勑有司館于廣明寺入院日夜       外曰」
        ▨門德大       ▨爲國師在否德獨無可乎今雲門和尙道尊德盛人所」
        ▨▨表固讓       請至三仍命上將軍羅裕等冊爲國尊號圆徑冲照冊」
           ▨又以母   還舊山辭意甚功 上重遠其志而允之命近▨」
            葺之又納土田百餘頃以賁常住師入麟角再」
             諸禪老問答移晷是夜有長▨」
             ▨掌選▨」
   (裏面)
                        山立述」
           ▨恩禮不     ▨勒諸琬琰樹于本院 仍勑門徒替」
          國尊在世時山立以因緣差奪未獲詣門徒之列常以爲恨」
           國尊之衆人師之可也然尊之焉師之馬未必不由醢▨」
          禪源頂鄕失聲曰立塔之所未暇諮稟悔將何及衆辭皆」
           逝矣事涉恠異碑文畧之昔有廣福禪者臨茶毗於」
             如何 師云不死故進之恁麽則火不能燒 師▨」
                    塔▨入淸風去來白雲出沒其惟至人」
                             息頃之下座徐▨」

주석

  1. 온라인 참조: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