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사(華藏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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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의 능침사로, 개성보봉산에 있는 절.

개설

화장사(華藏寺)는 고려말 인도에서 온 지공(指空) 화상(和尙)이 머물렀으며 서축패엽경(西竺貝葉經)이 조선후기까지 전해졌다. 태조 이성계는 지공 화상의 부도를 조성하였고, 정종은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세종은 화장사의 전지(田地)를 정종의 능침사인 흥교사(興敎寺)로 옮겼다. 화장사에는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 선조의 아들 영창대군, 인조의 아들 용성대군(龍城大君)의 위패가 차례대로 모셔져 매년 재(齋)를 설행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시대

개성보봉산에 소재한 화장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고려말 인도에서 온 지공 화상에 의해 크게 중창되면서 화장사라고 불렀다고 하며, 그 이전에는 계조암(繼祖庵)으로 불렸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1115년(고려 예종 10)에 묘응(妙應) 선사(禪師)가 화장사에 왕래하였고, 1216년(고려 고종 3)에 정각(靜覺) 국사(國師)가 주석하였다. 1353년(고려 공민왕 2)에 조정에서 계조암을 크게 증축하고 지공 화상이 주석하도록 하였다. 당시 지공 화상이 인도에서 가져온 서축패엽경이 조선후기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패엽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패다 잎의 길이는 옛 자[尺]로 1자 반에 너비는 4촌쯤 되며 색깔은 하얗고 나뭇결은 벚나무 껍질처럼 생겼으며 두께도 그와 같다. 패다 잎마다 모두 범자(梵字) 도장이 찍혀 있고 한 잎에 6~7항씩 파리 머리만 한 글씨가 씌어 있어 약 1,000여 잎 정도 되는데, 패다 잎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실로 꿰매고 겉은 널빤지를 대어 결책하였다. 그리고 패다 잎을 구하여 몸에 지니면 온갖 귀신들이 공경하고 복종한다고 한다."

(2) 조선전기

조선시대에는 1393년(태조 2)에 태조가 지공 화상 부도를 화장사에 세우도록 명하였다. 1400년(정종 2)에는 내탕고(內帑庫)의 재물로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과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만들어 봉안하였다(『정종실록』 2년 3월 8일). 이로써 화장사는 정종의 원당이 되었다. 정종은 몰래 화장사를 방문하여 자신이 봉안한 불상을 보기도 하였고(『정종실록』 2년 10월 6일), 상왕이 되어서는 화장사에 행차하여 나한재(羅漢齋)를 베풀기도 하였으며(『태종실록』 2년 1월 16일), 자신의 병이 낫지 않자 인보(印寶)를 화장사에 시주하려고까지 하였다(『태종실록』 9년 4월 30일). 그러나 세종은 즉위한 후에 정종을 모신 후릉(厚陵)의 능침사(陵寢寺)인 흥교사에 화장사의 전지 300결을 옮겨 주었고, 화장사를 혁파하면서 나머지 100결도 흥교사에 지급하였다(『세종실록』 6년 9월 8일).

성종대에는 화장사 주지 지성(至誠)이 태조와 태종의 인장을 위조하려다 발각되어 처벌된 일이 있었다. 지성은 불사(佛事)를 위해 승려 상명(尙明)에게 권선문(勸善文)을 짓도록 하였다. 상명이 남의 권선문을 훔쳤는데 효령대군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에 지성과 상의하여 태조와 태종의 인장인 것처럼 모사하여 권선문을 완성하고 돌리다가 발각된 것이다(『성종실록』 15년 2월 12일). 중종대에는 화장사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킨 것에 대해 대신들의 비판 여론이 멈추지 않았다. 검토관(檢討官)이원손(李元孫)은 화장사의 불사는 이단이 다시 흥하게 하는 기틀이 될 것이라고 하였고, 홍문관 부제학성윤(成倫)은 위에서 숭상하면 아래에서 그림자처럼 따르는 것이니 이단에 대한 신봉을 멈추어야 한다고 하였다(『중종실록』 32년 2월 20일) (『중종실록』 32년 2월 20일). 1539년(중종 34)에는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과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위패를 화장사에 봉안하고 매년 재(齋)를 설행하였다. 또 화장사에 안치되어 있던 정종과 그의 왕비 정안왕후의 영정을 모셔와 궁궐의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하였는데(『중종실록』 34년 8월 14일), 그 진위가 문제되어 다시 돌려주었다(『중종실록』 35년 10월 16일).

(3) 조선후기~근대

1652년(효종 3)에는 숭해(崇海) 장로(長老)가 8년에 걸쳐 사찰을 중창하였는데, 중창을 마친 바로 그 해에 화재가 나서 새로 지은 전각이 모두 불탔다. 숭해 장로는 다시 중창 불사를 하여 다시 8년 만에 전각을 완성하였다. 1674년(현종 15)에는 장단(長湍)에 사는 유생 정탁(鄭鐸)이 상소를 올려, 왕실에서 거행하는 왕대비를 위한 화장사의 수륙재(水陸齋)에 대해 중지를 요청하자 대신들도 왕에게 강력하게 간언하였다. 왕은 처음에 윤허하지 않았으나 3일 동안 잇따라 간언하자 어쩔 수 없이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수륙재가 행해지고 있었다(『현종실록』 15년 6월 3일).

또한 1692년(숙종 18년)에 인조의 아들 용성대군이 후사없이 죽자 다른 대군의 위패와 함께 모셨다. 1706년(숙종 32)에 화장사사적비를 중수하여 세웠다. 1779년(정조 3)에 대웅전 후불탱화를 조성하였다. 1878년(고종 15)에 승려 우담(藕潭)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명부전을 지었으며 학림사(鶴林寺)로부터 시왕상[十王像]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그리고 1908년(순종 2)에 승려 지영(智永)이 중건하였고, 1927년에 화재가 나서 모두 불탔으나 승려 초암(楚庵)과 경화(鏡華) 등이 7년간 중창하였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모두 파괴되었는데, 1980년 초에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등이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 朝鮮總督府, 『(增補校正)朝鮮寺刹史料』上 , 경성인쇄소, 1911.
  • 韓國學文獻硏究所 編, 『傳燈本末寺誌』, 亞世亞文化社, 1978.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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