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민서(惠民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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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재의 관리 및 의료 업무를 관장하던 예조(禮曹)의 속아문.

개설

혜민국(惠民局)·혜민고국(惠民庫局)이라고도 하였다. 혜민서는 주로 도성민에 대한 의료 업무와 궁궐이나 각 관서에서 사용하는 약재 조달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혜민서는 1392년(태조 1)에 설치된 혜민국을 계승하여 설치된 것이다. 관서로서의 혜민서 설치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1412년(태종 12) 혜민서라는 관서 명칭이 나타나면서도(『태종실록』 12년 1월 10일) 동시에 혜민국이라는 관서명이 통용되다가, 1466년(세조 12) 혜민서로 관서명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1460년(세조 6)에는 혜민서에 제생원이 통합되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혜민국이 설치되던 1392년의 직제는 판관(判官) 4명만이 배속되었다. 1395년에는 7품의 영(令) 2명과 8품의 승(丞) 2명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1414년에 영을 고쳐서 승으로 삼고, 승을 부승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제조와 별좌, 부제조 등이 설치되거나 혁파되었다. 1466년 승과 부승이 각각 직장과 봉사로 개칭되었고, 주부와 훈도·참봉 등이 설치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종6품 아문으로 규정되면서, 종6품의 주부 1명과 의학교수 2명, 종7품의 직장 1명, 종8품의 봉사 1명, 정9품의 의학훈도 1명, 종9품의 참봉 4명과 함께 제조 2명을 두도록 규정되었다.

혜민서는 서민의 질병 치료와 약재 조달 및 의원의 교습을 담당하였다. 혜민서는 주로 도성민의 치료를 담당하였으며, 조선초에는 도성 축조에 참여한 역군들의 치료나 전옥서에 수감된 죄수의 병 치료를 담당하였다.

약재의 조달을 위해 중국에서 무역을 하였으며, 이 외에도 소속 의원 중에서 선발하여 지방에 파견하는 심약(審藥)이 있었다. 심약은 지방에 파견되어 관찰사 책임하에 지방 유생과 함께 약재를 찾아 심사하고 이를 중앙으로 진상하였다. 심약은 경기에 1명, 충청도에 2명, 경상도와 전라도에 3명, 황해도와 강원도에 1명, 영안도에 3명, 평안도에 2명씩을 파견하였다.

혜민서는 이 밖에도 생도와 의녀들을 소속시켜 이들을 교육하고, 이들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서용하였다. 관사는 한성부 남부 태평관에 위치하였다.

변천

혜민서는 1637년(인조 15)에 혁파되어 전의감에 합병되었다가 곧 다시 설치되었다. 이때 제조 1명과 문신이 담당하던 교수 1명을 감축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동서활인서를 합병하고 참봉 2명을 증원하였다. 1763년(영조 39)에 제조 1명을 다시 설치하였고 1882년(고종 19)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박인순, 「혜민서연구」, 『복지행정논총』제20집 제1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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