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옹주(靜惠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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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9년(성종 21)~1507년(중종 2) = 19세]. 조선의 제9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정귀인(鄭貴人)이다. 부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청평위(淸平尉)한기(韓紀)이다. 정귀인에게 불만을 품은 연산군(燕山君)으로 인하여 연산군 대에 옹주 작위를 박탈당하였다가, 중종(中宗) 대에 복작되었다.

출생과 혼인생활

1489년(성종 20) 성종과 정귀인의 2남 1녀 가운데 1녀로 태어난 정혜옹주(靜惠翁主)는 12세가 되던 1500년(연산군 6) 형조 판서(判書)한형윤(韓亨允)의 아들 한기(韓紀)와 결혼하였으며, 부마 한기는 청평위에 봉해졌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한편 정혜공주의 어머니 정귀인은 성종의 또 다른 후궁인 엄귀인(嚴貴人)과 함께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尹氏)를 폐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당시 이것이 문제가 되어 연산군은 정귀인과 엄귀인을 때려죽이고,(『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정혜옹주는 옹주의 작위를 박탈한 후 배천(白川)으로 유배를 보냈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7일) 이어 부마 한기 또한 안산(安山)으로 유배를 갔는데, 이후 한동안 정혜옹주는 한기의 처로 불렸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7일),(『연산군일기』 10년 윤4월 10일)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정혜옹주의 작위는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07년(중종 2) 정혜옹주는 아기를 출산하다가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중종은 공사와 저자를 정지하고 연은(延恩·문소(文昭) 양전(兩殿)에 친히 제사지내는 일을 정지하였다.(『중종실록』 2년 8월 6일)

묘소와 후손

정혜옹주의 묘소는 남편 한기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있었으나, 1971년 3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54-2번지로 이장하였다. 봉분 옆 신도비는 송인(宋寅)이 지은 것이다.

정혜옹주는 한기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지두환, 『성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