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상(丁哲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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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01년(순조 1) = ?].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가롤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주거지는 경기도 광주이다. 아버지는 정약종(丁若鍾)이고, 어머니는 이수정(李秀廷)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정지해(丁志諧)이다. 정약용(丁若鏞)과 정약전(丁若銓)의 조카이기도 하다.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한 정하상(丁夏祥), 정정혜(丁情惠)가 그의 이복동생들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경기도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난 정철상(丁哲祥)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정약종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사학징의(邪學懲義)』] 1794년(정조 18) 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자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경기도 포천의 유명한 천주교 신자인 남양 홍씨(南陽洪氏)홍교만(洪敎萬)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801년(순조 1)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면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발하였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월 10일) 이때 그의 아버지와 숙부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자 그는 당시 풍속에 따라 옥 근처에 머물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 때 관리들이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고발하면 아버지와 숙부들을 풀어주겠다고 유혹하였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정약종이 그해 2월 26일 대역죄로 처형되자 그 역시 연좌법에 따라 체포되어 형조에 잡혀 들어갔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그는 심문 과정에서 집안사람들의 만류나 조정의 금지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주교를 믿은 사실과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에 대해 당당히 진술하였다.[『사학징의』] 결국 정철상은 요서(妖書)·요언(妖言)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죄를 물어 1801년 4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였다.(『순조실록』 1년 4월 1일)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0,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