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각사(麟角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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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장소로,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화산에 있는 절.

개설

인각사(麟角寺)는 원효 또는 의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1284년(고려 충렬왕 10)에 일연(一然)의 하산소(下山所)로 지정되면서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저술되었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중심 사찰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지만, 정유재란 때 거의 폐사 상태에 이르렀다. 조선후기에 중수하기도 했지만 해방 후에는 몇 채의 전각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1960년대에 보수하기 시작했고, 1992년부터 5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하였다. 2010년부터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진행 중에 있다. 인각사지(麟角寺址)가 1992년 사적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642년(신라 선덕여왕 11) 의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온다. 절이 전설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의 형상을 닮은 화산(華山)의 자락에 있고, 그 절터가 기린의 뿔끝에 있는 것과 같아 이름을 인각사(麟角寺)라 했다고 한다. 절터에서 발굴된 유물에 의하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를 이어온 절이 분명하나 문헌상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인각사가 문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284년(고려 충렬왕 10) 일연의 하산소로 지정되면서부터였다. 하산소는 승려가 왕사로 책봉되어 주석한 곳을 말하다. 일연이 1284년부터 1289년까지 이 절에 주석하면서 나라의 후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였고, 두 번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여는 등 구산선문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특히 일연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한 곳으로 유명하다. 1362년(고려 공민왕 11) 서공(諝公)이 무무당(無無堂)을 건립하여 총림법회(叢林法會)를 여는 등 고려말에도 선종의 중심 사원이었다.

(2) 조선전기

1407년(태종 7) 12월, 의흥(義興: 현 경상북도 군위) 인각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인각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하거나 건립한 사찰로, 당시 인각사가 의흥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조선후기

1597년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에 타고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도 크게 파손되는 등 거의 폐사 상태에 이르렀다. 효종 때 한 차례 중수하였고, 1699년(숙종 25) 의흥현감(義興縣監)박성한이 증축하였다. 1721년(경종 1)에 크게 중수하였다. 1890년 일연의 승탑지에 조상의 묘를 쓰려다 실패한 황보씨(黃甫氏)에 의해 일연의 비와 전각이 파괴되는 수난을 당했다.

(4) 근현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에는 강설루, 극락전, 명부전 등 몇 채의 전각만이 남아 있는 정도였다. 1963년 향토사학자 장제명의 주도로 강설루(講說樓)를 비롯해 보각국사 비각, 미륵당 등을 보수하였다. 1978년 정부의 보조를 받아 명부전, 극락전을 보수하였고, 1991년 요사채를 이건하였다. 1992년 인각사의 절터가 사적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1992년 이후 5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마쳤고, 이를 토대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8년간 국비 등 총 113억 원을 투입하여 인각사 복원 사업을 추진 중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동화사의 말사이다.

문화재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麟角寺 普覺國師塔 및 碑, 보물 제428호)는 일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와 사리탑이다. 비는 1295년(고려 충렬왕 21) 일연의 제자 청분이 세웠다. 비문은 민지가 지었고, 글씨는 죽허가 왕희지(王羲之)의 유필을 모아 집자한 것으로 그 일부만 남아 있다. 비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되어 역시 일부만 남아 있다. 사리탑은 팔각의 탑으로 탑의 중심부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이라는 탑명이 새겨져 있다. 원래 인각사 동쪽 2㎞ 떨어진 부도골에 있었지만 몇 차례 이동되었다가 1978년 인각사 경내로 옮겨졌다. 이밖에 인각사 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 인각사 미륵당 석불좌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6호), 인각사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7호) 등의 문화재와 만월당(滿月堂), 청진당(淸眞堂)의 석종형 승탑이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문선(東文選)』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윤기엽, 『고려후기의 불교』, 일조각, 2013.
  • 이종문, 「麟角寺 연구」, 『한문학연구』15, 계명한문학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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