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시(詠史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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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하는 시.

개설

영사시(詠史詩)는 영사(詠史)·사시(史詩)·역사시라고도 한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자체를 계기로 삼아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을 빗대어 표현하거나 당대의 현실을 풍자 또는 경계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영사시는 중국 한나라 시대 반고(班固)의 「영사(詠史)」에 와서 성립되었고 소통(蕭統)이 편찬한 『문선(文選)』에 이르러 시의 한 유형으로 인식되었다.

영사시는 역사를 읊는다는 보편적인 개념 위에 하위 개념의 형식을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역사 사실의 전승에만 충실한 사전형(史傳型), 작가의 정회에 치중한 영회형(詠懷型), 작가의 역사 비평이 중심인 사론형(史論型), 비평과 영회가 중심인 의론형(議論型), 역사 회고에 중점을 둔 회고형(懷古型)과 역사를 노래의 관점에서 읊은 악부시형(樂府詩型)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이들 형식이 혼합적으로 나타난 경우도 적지 않다. 비록 작품의 제목에 ‘영사’와 관련된 언급이 없더라도,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역사를 읊은 것이라면 영사시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영사시는 역사를 시적으로 형상하기 때문에 일반 서정시에 비해 개인의 순수한 서정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역사를 소재로 하여 작자의 뜻을 읊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 의식이 다른 작품에 비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중종은 「영사」라는 시를 신하들에게 내리며 시를 짓도록 명하였고(『중종실록』 23년 4월 25일), 현종대에는 이단하(李端夏)가 중국 초나라의 역사를 제재로 한 정문부(鄭文孚)의 영사시를 소개하면서 그의 죽음이 억울함을 밝혀 그를 추증하도록 상소를 올렸다(『현종실록』 7년 5월 23일).

변천

동한시대부터 위진시대까지는 역사 서술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진나라 때 좌사(左思)와 도잠(陶潛) 등에 이르러서는 영사와 서정이 결합하였다. 그 뒤 당나라 때는 이러한 경향을 계승하면서 역사에 대한 반성과 자아의 체험을 그대로 기록하거나, 나아가 현실에 대한 의식을 역사에 반영하는 작품이 창작되었다. 송나라 때는 영사를 통해 현실 정치 및 사회 문제를 비판하려는 태도가 강화되어, 의론(議論)을 위주로 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후대에는 풍속과 지리까지 제재로 삼아 죽지사(竹枝詞)의 모습까지 갖추게 되었다. 영사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민병수, 『韓國漢文學槪論』, 태학사, 1996.
  • 심경호, 『한국 한시의 이해』, 태학사, 2000.
  • 김영숙, 「詠史詩의 槪念과 작품의 實相」, 『동방한문학』37권, 동방한문학회, 2008.
  • 김창경, 「唐代 詠史詩의 발전과 전변」, 『동북아문화연구』2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2.
  • 이철희, 「영사시와 회고시에 대한 시학적 이해」, 『한국어문학연구』54집, 한국어문학연구학회, 2010.
  • 『漢語大詞典』, 漢語大詞典出版社,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