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교(白蓮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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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기원한 중국의 민간 종교.

개설

백련교(白蓮敎)는 원·명대에 걸쳐 유행한 미륵하생신앙을 핵심으로 하는 민간 종교 결사였지만, 중국에서 발생한 이단적인 민간 종교 결사를 통칭할 때 쓰이는 말이기도 했다. 민간 종교 결사의 대명사인 백련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백련교도의 정치적 반란이었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과 청나라 때 백련교도의 난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연원

백련교는 남송(南宋, 1127~1279) 때 모자원(茅子元)이 창시한 백련종(白蓮宗)에서 기원한다. 원·명대에 걸쳐 민간에서 성행한 신흥 종교로 백련종과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을 기반으로 하여 정토신앙, 마니교, 토속 신앙이 결합되어 백련교가 성립했다. 중국이 몽고의 지배를 받던 13세기에 이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상과 미륵신앙이 합쳐져 세력을 확장해 간 것이다.

백련교에서 최고의 신은 우주와 인간의 창조자인 무생부모(無生父母)이다. 무생부모는 인간이 타락하자 미륵불(彌勒佛)을 속세에 파견하여 흩어진 자녀들을 거두어들이고 천년왕국을 인간세계에 실현시킨다고 하였다. 현세에 하생한 미륵불은 피폐하고 부조리한 이 세상을 개벽하고 새로운 이상향의 세상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륵불신앙은 당시 생활난에 허덕이던 서민층에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백련교는 체계 있는 조직이 아닌 개인적인 사제 관계에 의해서 이어져 왔고, 입교 시에 주어지는 주문인 팔자진언(八字眞言), 즉 ‘진공가향(眞空家鄕) 무생노모(無生老母)’를 신비한 힘을 지닌 것으로 믿었다. 백련교도들은 불교식으로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며, 도래하는 왕국을 대비하여 무술 수련도 하고,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정부에 저항하였다.

변천

백련교도는 탄압하는 정부에 저항하여 반란을 자주 일으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원대의 홍건적(紅巾賊)의 난과 청가경제(嘉慶帝) 때의 백련교도의 난이다. 몽골족이 건국한 원나라의 통치 세력이 약화되고 자연재해가 빈발하자 1351년(원 지정 11) 백련교도 한산동(韓山童), 유복통(劉福通) 등이 주축이 되어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한족(漢族)의 농민 반란군이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다고 하여 홍건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홍건적의 난은 화북(華北)·화중(華中) 일대에 미쳤으나 결국 내부 분열로 원나라 군대에 쫓기고 고려를 2차에 걸쳐 침입하다가 격멸되었다.

다만 안휘(安徽)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백련교도 주원장(朱元璋)은 세력을 키워 남경(南京)을 근거지로 하여 1368년 명(明)을 건국하고 한족(漢族) 왕조를 복원시켰다. 그가 명의 태조 홍무제이다. 백련교도가 주축이 되어 일어난 홍건적의 난은 실패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 건국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명이 건국한 후에도 백련교도들은 일부 잔존해 사천성 등 남쪽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566년(명종 21) 명의 가정제(嘉靖帝) 치세에 북경에 다녀온 성절사(聖節使)박계현(朴啓賢)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명에서는 남쪽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인 몽골의 기세가 창궐하고 있는데다 보정과 사천 등지에서 백련교가 더욱 성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박계현은 또 백련교도는 맨밥을 먹고 경(經)을 외는 자들이라고 소개했다(『명종실록』 21년 10월 13일).

청나라 때 발발한 백련교도의 난은 1796년 호북성(胡北省)에서 백련교도인 왕총아(王聰兒)와 요지부(姚之富)가 주동하여 난을 일으킨 뒤 하남성(河南省), 사천성(四川省), 섬서성(陝西省), 감숙성(甘肅省) 등 각 성으로 번져 1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난이 일어난 지역은 이른바 신개척지로서, 청조와 특권 관료 지주에 의한 비인도적 수탈이 횡행하여 농민들의 불만과 원성이 큰 곳이었다. 이때의 반란군은 부랑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뚜렷한 정치적 목표나 계획이 없었다. 이들은 통일된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하여 오직 게릴라전만을 수행하였음에도 부패한 정부군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정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많은 자금을 거두었지만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던 탐관 화신(和珅)의 일당들이 착복하였다.

1799년 건륭제가 죽고 화신이 제거된 후 비로소 조정과 반란군 간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는데, 이때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운 것은 중앙정부의 정규군이 아니라 지방의 향용(鄕勇)이었다. 향용은 청나라 말기에 지방에 조직된 향토방위군 개념의 지방 자위 군대이다. 1801년 난을 주도한 유지협(劉之協)이 체포되면서 백련교의 교세는 약화되었고, 1805년에 이르면 반란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백련교도를 비롯한 청의 농민 반란은 워낙 규모가 크고 청조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기 때문에 조선에도 사신단을 통해 수차례 보고가 되었다(『정조실록』 24년 2월 6일).

결국 청조는 반란의 진압에 약 1억2천만냥이라는 막대한 전쟁 비용과 10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함으로 인해 이후 청은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았다. 백련교도의 난은 14세기 홍건적의 난과 마찬가지로 한족을 중심으로 이민족의 지배에 대항한 반란으로서 청나라가 쇠퇴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 와덕충·서순장 엮음, 조성을 옮김, 『중국종교사』, 대수관서점, 1967.
  • B. J. Ter Haar 지음, 송요후 옮김, 『중국역사상의 민간종교운동: 백련교의 실체와 박해』, 신서원, 2007.
  • 최갑순, 「중국근세 민간종교연구: 백련교 전통의 구성」,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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