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朴震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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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 2)~1641년(인조 19) = 73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인조 때에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 겸 해서방어사(海西防禦使)이고, 증직(贈職)은 돈령부(敦寧府) 판사(判事)의금부(義禁府) 판사이다. 자는 실재(實哉)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증조부는 무안현감(務安縣監)박유(朴榴)이고, 아버지는 박오(朴旿)이다.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경성(李景成)의 딸이다.

선조 · 광해군 · 인조 시대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군수(郡守)유숭인(柳崇仁)과 같이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10여 년간은 이끌어준 사람이 없어 벼슬이 고을의 판관(判官)에 머물렀다. 1613년(광해군 5)에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었다. 이때 변방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워, 그 공로와 재능을 인정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었다. 1619년(광해군 11)에 순천군수(順天郡守)가 되어 우영장(右營將)을 겸임하였다. 이때 순천군은 잘 다스린 공으로 인해 2년간 더 유임하였다가 해서도방어사(海西道防禦使)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해서도방어사로 도원수(都元帥)장만(張晩)의 휘하에서 별장(別將)이 되었다. 그가 도원수를 수행하여 평양(平壤)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괄이 그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도원수 막하에 장수다운 사람은 남이흥(南以興)·박진영·유효걸(柳孝傑) 몇 사람뿐이다.”라고 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신경원(申景瑗)과 동교(東郊)에서 이괄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공을 세웠다. 논공행상(論功行賞)할 때 그는 한 품계만 올려 받고 공신(功臣)에도 봉해지지 못했으나, 그는 그의 공로에 대해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뒤에 평산도호부사로 임명되어 해서방어사를 겸임하게 되었는데, 그 해에 사직하고 향리(鄕里)로 돌아왔다. 1641년(인조 19)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신중히 예법(禮法)을 지켜 가훈(家訓)을 실추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진영은 재주와 식견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호방한 기개가 있었으나 또한 명예는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간관(諫官)김시양(金時讓)이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로 나가 해상(海上)을 순행하다가 그의 농장에 들러 말하기를, “왜 벼슬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무능한 사람이 이미 은혜를 후하게 받았는데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자, 김시양이 탄식하며 떠났다고 한다. 그는 평소 청렴하고 정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검소함을 숭상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종족과 화목하였다고 한다.

추증과 비문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허목(許穆)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그는 숭정대부(崇政大夫) 돈령부 판사 겸 의금부 판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都) 도총관(摠管)의 벼슬을 추증(追贈)받았다. 부인 함종어씨(咸從魚氏)는 어응해(魚應海)의 딸인데, 2남을 두었다. 1자는 박세룡(朴世龍)이고, 2자는 박형룡(朴亨龍)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