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적진(德積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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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숙종 때 덕적도에 설치한 만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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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덕적진은 덕적도 진리(鎭里)에 입지한다. 진리는 중국으로 항해하는 선박이 통과하는 해로에 위치하여 바다를 방비하기에 용이하다. 조선전기에 덕적도 인근 바다에 왜적이 자주 출몰하자,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京畿左道水軍僉節制使)가 방비하였다(『세종실록』1년 8월 11일). 그럼에도 왜구 출몰이 더욱 극심해지자, 조선 숙종 때 중앙정부는 덕적도 주민들의 섬에서의 거주를 금하고, 수군진영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덕적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있다. 일명 ‘덕적군도(德積群島)’라 칭한다. 고려시대에 덕물도(德勿島)라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인물도(仁物島)로 불렸다. 또 구전에 ‘물이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라 하여 ‘큰 물섬’이라 불렀다.

조선전기 덕적도에 국영 목장을 설치하고,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에게 말을 관리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18년 7월 25일).

1709년에 경기도의 방수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수군진이 덕적도에 개설되었으나, 1725년(영조 1)에 어영대장 이봉상(李鳳祥)이 덕적도의 토지가 척박하고, 수군 주둔에 필요한 경비를 섬 주민들에게 부과하는 폐단을 줄이기 위해 덕적진을 혁파하였다. 그 후 1739년(영조 15)에 강화유수 권적(權𥛚)과 지사 조현명(趙顯命) 등이 ‘덕적도에서 한양까지 반나절이 걸리고, 중국산동성(山東省)등주부(登州府)와 마주 바라보고 있으니, 수군진을 복설하여 한양을 방어하는 것이 시급하다.’라고 상소하였다(『영조실록』15년 5월 30일). 이듬해인 1740년(영조 16) 8월, 덕적도에 수군진이 설치되고, 수군첨사가 파견되었다(『영조실록』16년 8월 2일).

조직 및 역할

조선후기 덕적진에 수군첨사 1명을 비롯하여 별무사 112명이 주둔하였다(『고종실록』9년 8월 1일). 당시 덕적진은 한양으로 올라가는 세곡선을 보존하고, 관할 섬 주민들의 호구·인구·자연촌 등을 파악하여 세금 부과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변천

조선전기에 덕적도는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의 관할지로, 국영 목장이 설치되어 말 257필이 방목되었다. 조선 숙종 때 덕적도는 한양 방비를 목적으로 종4품 수군만호가 파견되었으나, 곧 없어졌다. 1740년(영조 16)에 중국 등주로 연결되는 바닷길을 방어하기 위해 수군진을 다시 설치하고, 수군첨사를 파견하였다.

1872년(고종 9) 덕적도에 외국인이 자주 표류해오자, 별무사 100여 명을 모집하여 방비하도록 하였다. 1895년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되면서 덕적진이 폐진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해동지도(海東地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