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管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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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에서 군량으로 보관하고 관리하던 곡식.

개설

관향은 17세기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마련된 군량이었다.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어 가자 관향은 점차 평안도 지역의 다양한 재정 수요를 충당하는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주로 군수(軍需)나 사행(使行)에 대한 접대비로 쓰였다(『인조실록』 27년 3월 17일). 관향을 관리하는 관향사(館餉使)는 평안감사가 겸직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15년 7월 9일). 또한 관향의 보관·관리를 위하여 관향고(管餉庫)를 두었으며, 환곡을 운영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623년(인조 1) 후금의 위협이 본격화되자, 이에 대비한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관향사를 전국적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평안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지역의 관향사는 곧 혁파되었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수령 중 한 사람이 관향사를 맡도록 하였다(『인조실록』 1년 4월 21일). 1637년(인조 15)부터는 평안감사가 관향사를 예겸(例兼)하도록 하였다. 관향사는 평안도 지역의 전세 및 공물수미(貢物收米)를 바탕으로 관향을 마련하고, 이를 환곡 등의 방식으로 운영함으로써 규모를 늘려갔다.

내용

관향의 설립 목적은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두 차례 호란을 겪고 난 이후 관향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심양관(瀋陽館)에 머무는 기간 동안 심양관에서 사용하는 비용을 관향으로 충당하였다. 심양관에는 세자를 비롯하여 많은 조선인이 체류하고 있었으나, 청나라에서는 그 비용을 충분히 지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심양관에서는 각종 비용을 조선에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조선은 관향을 통해 재원을 충당해 주도록 하였다(『인조실록』 21년 9월 1일).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입국하는 사신 일행에 대한 접대비 역시 관향에서 지출하도록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지나가는 평안도와 황해도, 경기 북부는 본래 사신 일행을 위한 비용 지출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부담을 평안도 관향을 통해 해결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신이 청나라로 들어갈 때 드는 비용의 일부 역시 관향곡을 통해 해결하였다. 이 외에도 각종 군수 비용도 관향곡으로 해결하였다.

관향곡은 평안도의 전세 및 공물수미로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를 관서(關西) 지역의 고을에 환곡으로 분급하고 이자에 해당하는 모곡(耗穀)을 거두었다. 환곡 분급 시에는 전체 양의 절반만 분급하고, 절반은 창고에 남겨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향곡을 관리하기 위하여 평안도에 관향고를 설치하였다.

변천

관향곡은 본래 평안도 지역의 재정이었으나, 중앙 재정 기구였던 호조(戶曹)의 요구에 따라 중앙 재정으로 전용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본래 평안도 지역은 군량을 비축하기 위해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자체적으로 사용하고 비축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평안도 지역의 생산력이 증가하고, 평안도가 대외 무역의 창구로 발전하면서 그 세입 규모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에서도 평안도 재정을 중앙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노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 말, 19세기 초에는 호조와 평안감사 사이에 재정을 둘러싼 알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권내현, 『조선 후기 평안도 재정 연구』, 지식산업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