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절(乾元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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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2대 황제인 순종의 탄신일.

개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궁내부(宮內府) 대신(大臣)이윤용(李允用)이 황제폐하탄신경절(皇帝陛下誕辰慶節)을 건원절로 개칭하자고 순종에게 아뢰어 실시되었다. 건원절 날짜는 처음에는 음력으로 하던 당시 풍습을 따라 2월 8일이었으나, 이듬해인 1909년(융희 3)부터 국가기념일인 경절(慶節)을 모두 양력으로 바꾸게 되어 3월 2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1895년(고종 32)부터 1910년(융희 4)까지 근대기에는 경절이 총 9개가 개설되었는데,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은 조선태조의 건국, 만수성절(萬壽聖節)은 고종의 탄신,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은 고종의 황제 즉위, 천추경절(千秋慶節)은 황태자의 탄신, 흥경절(興慶節)은 고종의 등극을 기념한 것으로 고종대에 제정되었다. 건원절은 황태자였던 순종이 황제가 되자 탄신일의 명칭을 개칭한 것이었다. 그밖에 순종대에는 황후의 탄신일인 곤원절(坤元節), 순종황제즉위기념일, 순종이 황위에 등극했음을 종묘와 사직에 고한 날인 묘사서고일(廟祠誓告日) 등의 경절이 제정되었다. 이 경절 가운데 개국기원절을 제외한 다른 경절인 생신과 등극 관련 기념일은 조선시대의 전통 전례에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근대적인 제도로 바뀐 것이었다. 건원절은 처음에는 음력 날짜인 2월 8일로 제정되었으나 제정 이듬해인 1908년(융희 2)부터는 양력을 사용하게 되어 1908년에는 2월 8일의 양력 날짜인 3월 10일에 경축 행사를 치렀으며 1909년과 1910년에는 양력으로 환산한 3월 25일로 날짜가 변경되어 실시되었다.

절차 및 내용

건원절에는 각종 경축 행사를 벌였다. 건원절 당일에는 궁중에서는 폐현례(陛見禮), 덕수궁 문안, 함녕전(咸寧殿) 사찬(賜饌), 돈덕전(惇德殿) 사연(賜宴) 등 여러 가지 행사를 벌였다. 먼저 여러 관원은 물론 외국인들도 순종황제에게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알현하는 폐현례를 거행하고, 폐현례를 마친 뒤 순종이 태황제인 고종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창덕궁을 나와 덕수궁으로 행차하였다. 덕수궁 문안에는 순종황제뿐 아니라 황후도 함께 참석하였다. 이때 황제와 황후의 시위는 대한제국의 근위대 기병이 맡았다. 고종은 문안에 대한 답례의 일환으로 함녕전에서 사찬을 베풀었으며 이는 순종황제를 배종한 관리들에게 이루어졌다. 오후 8시 반에는 덕수궁 돈덕전에서 내외국 고등관 이상이 참여하는 건원절 기념 연회가 베풀어졌다. 돈덕전 연회에서 문관들은 연미복(燕尾服)을, 무관들은 소례복(小禮服)을 착용하여 서양식 복식을 갖추었다. 건원절 행사를 치른 뒤에는 문무백관과 외교관들을 초청하여 창덕궁 후원에서 원유회를 개최하여 행사가 성대히 치러진 것을 축하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건원절은 민간에서도 경축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는 한편 각종 예식과 연회를 성대히 베풀었다. 학부(學府)에서는 건원절을 각급 학교의 휴업일로 제정하였으며, 각급 학교 학생과 직원이 주축이 되어 서울의 동서남북 각지에서 제등행렬(提燈行列)을 벌였다. 제등행렬에는 10,000개의 등을 준비하여 10,000명이 참여하도록 하였으며 호위대 기수와 군악대, 무동과 기생도 참여하고, 황제도 관람하여 민간과 황제가 함께하는 행사가 되었다. 제등행렬에 참여한 생도들은 함께 만세 삼창을 하고 국기(國旗)와 축수등(祝壽燈)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사는 지방에서도 이루어졌으며 하와이의 국민회 등 해외의 한인 단체에서도 경축 행사를 벌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
  • 『황성신문(皇城新聞)』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이정희, 「대한제국기 건원절 경축행사의 설행양상」, 『한국음악사학보』4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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