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기(甲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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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발(匣鉢) 속에 넣어 구운 그릇.

개설

조선시대에는 사옹원의 분원인 관요에서 왕실 전용 그릇들을 제작하였다. 분원은 연중 예번(例燔), 사번(私燔), 별번(別燔) 등으로 구별되어 요업 활동을 이어갔다. 합 형태를 띤 작은 기물인 갑발을 사용하여 구운 갑번(匣燔)의 경우 조선후기로 갈수록 사번에 해당되는 경향을 보였다. 갑기(甲器)는 통칭 갑번기(匣燔器)라고 불리며 『홍재전서(弘齋全書)』,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는 대략 정조 연간에 이르러서야 그 명칭이 등장한다. 이 무렵 갑발을 사용하여 구운 갑기는 진상 이외에 사적인 용도로도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이에 사옹원 감번관(監燔官)으로 하여금 분원의 폐단을 고지하게 하고 제작이 적발되면 생산품을 모조리 몰수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그럼에도 종친이 사옹원의 제조 일체에 관여하는 입장이어서 이러한 폐단은 쉽사리 사라지지 못했다.

내용 및 특징

갑기는 요도구인 갑발에 넣어서 번조한 그릇을 총칭한다. 갑기의 번조법인 갑번은 갑발 속에 넣어 굽기 때문에 가마 안에 떠다니는 재 가루와 연기, 이물질 등으로부터 그릇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형태의 뒤틀림과 유약의 흐름 등을 방지할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초벌구이와 재벌구이, 재임 등을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백자 생산 공정에서 예민한 온도 변화로 인한 변질과 요변(窯變)을 방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조선시대의 갑기는 대체로 품질이 우수하여 고급 자기라 일컬어졌는데, 왕실용 백자가 이에 해당하였다. 왕실용으로 생산된 질 좋은 백자들이 갑발을 사용한 흔적은 일부 가마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갑번은 정교한 고급 자기를 제작할 때 높은 성공률을 보여 왕실용 백자 제작에 주로 이용되었다.

관요 일대에서 갑기를 제작한 가마터로는 경기도 광주 초월면 무갑리와 퇴촌면 관음리 등지를 들 수 있다. 이들 요지에서는 정교하게 번조된 갑기가 출토되어 고급 백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갑기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갑기와 관련된 기록은 정조대에 등장하는데, 정조가 장식적이고 화려한 백자 제작이 과열되자 이를 규제하고자 금지령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정조는 당시 사치스럽고 장식이 기교적인 백자 제작을 금하면서 검소함을 강조하였는데(『정조실록』 15년 9월 24일) (『정조실록』 17년 11월 27일), 이러한 조치는 사회 전반에 걸쳐진 위계질서를 바로잡고자 취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 인해 정조 말년에는 갑기나 청화백자 생산이 다소 위축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영향으로 화훼를 양각으로 장식한 후 번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 머지않아 다시 청채(靑彩)가 대중적으로 사용되어 갑기 사용이 활발해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김영원, 『朝鮮前期 陶磁의 硏究―分院의 設置를 中心으로』, 학연문화사, 1995.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조선 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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