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黃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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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1년(선조24)∼1612년(광해군4) = 22세]. 조선 중기의 선조~광해군 때 문신. 자는 용장(用章)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곤후(黃坤厚)이고,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부윤(府尹)남언경(南彦經)의 딸이다.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황정욱(黃廷彧)의 증손자이고, 황혁(黃赫)의 손자이다. 선조 아들 순화군(順和君)의 처조카이고, 우의정장유(張維)의 매형이다.

임진왜란 때 가족의 수난

황상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황곤후가 죽었다. 그 다음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조부 황혁과 증조부 황정욱은 선조의 명(命)에 따라 순화군이두(李)를 모시고 근왕병을 일으키러 강원도로 갔는데, 이 때 가족이 모두 따라갔다.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함경도로 북상하자, 이들은 왜적을 피해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갔다. 회령에는 이미 임해군(臨海君)과 그 장인 김귀영(金貴榮)이 근왕병을 일으키려 와 있었다. 그러나 순화군과 임해군은 근왕병을 모집하면서 민간에서 물건을 노략질하고 수령들을 핍박하는 바람에 민심을 크게 잃었다. 이때 회령부 아전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황정욱 · 황혁과 김귀영 등 수십 명을 잡아 함경도 안변(安邊)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겼다. 가토 기요마사는 황혁과 황정욱에게 선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이들이 완강히 거절하자 가토는 당시 8세인 황혁의 맏손자의 목숨을 담보로 위협했다. 황혁은 동요하지 않았으나 이 일로 황상의 맏형은 목숨을 잃었다.

광해군 때 <김직재의 옥사>

1611년(광해군3) 황혁은 김직재(金直哉)와 함께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晉陵君)이태경(李泰慶)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무고를 당하였다. 이는 봉산군수(鳳山郡守)신율(申慄)이 그가 체포한 도적떼 유팽석(柳彭錫) 등을 사주하여 황혁과 김직재를 고발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황혁의 아버지 황정욱은 신율의 조부인 신점(申點)과 오래된 원한[舊怨]이 있었고, 대북파 이이첨(李爾瞻)과는 선조 때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이첨은 광해군 즉위 후에 권력을 잡자 친척인 신율과 결탁하여 옥사(獄事)를 거짓으로 날조해서 황혁에게 죄를 씌웠다. 이이첨 · 신율 일당은 황혁과 그 자손들에게 자복(自服)을 강제로 받아내려고, 집안사람들을 모두 옥에 가두고 혹독하게 심문하는 바람에 죽은 자들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황상도 황혁과 황곤건(黃坤健) 등과 함께 심문을 당하다가 죽었는데, 이 때 나이가 겨우 22세였다. 이의현(李宜顯)은 황상의 묘표 (『도곡집(陶谷集)』 권20)에서 “보통 사람들은 형틀을 보기만 하여도 벌벌 떠는데, 황상은 약관(弱冠)의 나이에 감옥에서 몇 차례의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형구(刑具)를 마치 편안한 침실처럼 보았으며, 심문을 받을 때에 고통을 참으면서 말씨가 점잖고 차분하여 끝까지 흔들리거나 굽히는 바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황정욱 집안과 신점 집안의 원한 관계

<김직재의 옥사>는 황정욱과 신점의 구원(舊怨)에서 비롯되었다. 황정욱과 신점은 이웃에서 살았는데, 1589년(선조14) 여름 퇴청하던 도승지황정욱이 탄 수레가 화살에 맞는 사건이 있었다. 갈도(喝道)하는 나졸들이 달려가서 화살을 쏜 사람을 찾아내었으나 오히려 봉변을 당하였다. 화살을 쏜 이는 형조 판서신점의 손자인 신열(申悅)이었다. 황정욱이 형조에 고발하여 그 죄를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신열이 숨어버렸기 때문에 송사가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에 황정욱의 집에서 고용한 노비가 몰래 황정욱을 저주(詛呪)하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다. 그 노비는 신열의 아버지인 신순일(申純一)이 신열의 일로 원한을 품고 자신을 몰래 황정욱의 집에 고용 노비로 보내 황정욱을 저주하게 했다고 말하였다. 황정욱이 노하여 그 노비를 형조에 송치하였으나, 옥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옥에 갇힌 사람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판서신점은 이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두 집안 사이는 나빠졌다. 또 신열의 아우인 신율은 선조 때 청요직(淸要職)에 진출하려 애쓸 때마다 황혁의 공격과 탄핵을 받았다. 그래서 광해군 때 신율은 이이첨과 결탁하여 황혁을 모함했던 것이다.

황혁이 체포되어갈 때 친구들은 두 집안 사이의 원한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를 대고 사건의 전말을 논리적으로 진술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황혁은 공손한 말로써 응대하여 죽음을 면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이항복(李恒福)과 심희수(沈希壽) 등은 모두 황혁이 솔직하게 구원 관계를 공초(供招)하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때 민하서(閔河瑞)가 그 옥사가 무함한 것이 명백하다고 상소하였으나, 대신들은 광해군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그를 구원해주지 못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교하(交河) 북쪽 금승리(金蠅里)의 선영에 있는데, 이의현이 지은 묘표가 남아 있다. 부인 덕수장씨(德水張氏)는 이조 판서장운익(張雲翼)의 딸이고, 우의정장유(張維)의 누이다. 황상이 죽자 그의 어린 아들 황이징(黃爾徵)을 계곡(谿谷)장유가 데려다 길렀다. 황이징은 정산현감(定山縣監)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황이징이 <김직재의 옥사>의 원통함을 인조에게 호소하자, 인조는 황상과 황혁의 죽음을 설원(雪冤)하고, 황상에게는 사헌부 지평을, 황혁에게는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도곡집(陶谷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