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삼(包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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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가 청나라와 무역을 공인한 홍삼.

개설

포삼은 1797년(정조 21) 포삼제의 실시와 함께 나타난 역사 용어이다. 조선 정부가 공인한 수출품 홍삼을 지칭하거나 그것을 세는 칭량 단위로 쓰였다.

연원 및 변천

포삼제 실시를 전후하여 자료상에는 인삼(人蔘), 삼(蔘), 가삼(家蔘), 홍삼(紅蔘)이란 용어가 섞여 나타난다. 인삼은 지금까지도 자연 인삼인 산삼(山蔘)과 재배 인삼인 가삼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하지만 조선 사회가 인삼의 채취 단계에서 생산 단계로 전환하는 18세기 이후부터는 문맥에 따라 용어를 엄격히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

17세기 산삼의 대량 채취와 청국과 일본으로의 대량 수출이 지속되자, 18세기 초 조선 사회는 산삼의 품귀 현상에 직면했다. 인삼 위조사건이 터지고, 청국산 인삼을 수입하자는 논의도 일어났다. 이에 조선 사회는 1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가삼이 중앙의 내의원으로까지 상납되고, 경상도·강원도는 물론 평안도 강계 지방에서도 삼포(蔘圃)가 권장될 정도로 가삼 재배가 성행하였다.

가삼 재배가 성행하자 그에 대한 가공기술이 발전했다. 4~5년 된 가삼을 밭에서 뽑은 것을 수삼(水蔘) 혹은 생삼(生蔘)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삼은 수분을 포함하고 있어 오래 보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를 자연 건조시켰는데, 이를 백삼(白蔘) 혹은 건삼(乾蔘)이라고 했다. 하지만 건삼은 시간이 오래 지나면 부서지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에 인삼을 끓여 말리는 파삼(把蔘)이 생산되었다.

그런데 인삼 재배가 시작되면서, 생삼 건조는 끓여 말리는 방식에서 쪄서 말리는 증조(蒸造)의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즉 빈 공간에 시렁을 만들어 그 위에 생삼을 얹은 다음 시렁 밑에서 숯불을 피워 말렸는데, 이를 홍삼이라 하였다. 그리고 홍삼을 만드는 장소를 증포소(蒸包所)라 하였다.

조선에서는 양각삼(羊角蔘)이라 하여 몸체는 작으나 색깔이 희고 품질이 좋은 자연삼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청국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파삼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장기 보존을 위해 가공된 홍삼은 대청무역으로 이익을 보려는 역관과 상인들에게 무역 결제 수단으로 급부상하였다. 가벼우면서도 은을 대신할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8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청국 사행에 들어가는 제반 비용과 역관들의 생활 부양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여기에 정조가 화성에 행궁을 건립하면서 화성부를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때 떠오른 방안이 모자 수입 무역과 인삼 수출 무역의 특권을 화성부로 이전하는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국가가 부호에게 이익의 독점권을 주는 것이라는 반대에 부딪히며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는 역관에게 가삼을 채워가도록 한 규정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홍삼의 밀무역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역관에게 홍삼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하고, 그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여 외교 비용과 역관 부양을 위한 방안으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포삼제(包蔘制)였다.

포삼은 공인된 홍삼 혹은 그 칭량 단위로 사용되었다. 처음 허가된 무역량은 포삼 120근이었다. 그러나 홍삼의 무역길이 열리자 포삼 무역량은 불과 50여 년 만에 4만 근까지 크게 늘었다. 19세기 초 조선에서 포삼 1근의 공식 가격은 천은(天銀) 100냥이었다. 조선 정부 공식 쌀값으로 따져 60~80석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그런데 이것이 청국으로 넘어가면 적게는 은 350냥에서 많게는 은 700냥에 팔려 나갔다. 3.5배에서 7배 정도의 이윤이 남는 장사였다. 포삼무역으로 정부가 거두는 세금만도 20만 냥에 이르렀다.

청국에는 1715년경부터 이미 막대한 양의 미국산 인삼이 수입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홍삼의 명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1840년대 영국산 아편으로 골머리를 앓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조선 홍삼이 아편 해독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홍삼 수출량은 1840년대와 1850년대에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서해상에서 이양선과의 홍삼 밀매가 성행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대원군 집권기에도 취약한 재정을 확충하는 방편으로 포삼제를 적극 활용하였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중경지(中京誌)』
  • 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책 연구』, 서울대출판부, 2001.
  • 유승주·이철성,『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 이철성, 「조선후기 무역상인과 정부의 밀무역 대책」, 『사총』58, 2004.
  • 이철성, 「대원군 집권기 포삼무역정책과 해상 밀무역」, 『조선시대사학보』3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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