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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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일본 막부(幕府)의 장군(將軍)이 조선과 교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선의 왕 앞으로 보낸 사절단.

개설

1392년 60여 년간 지속되었던 남북조시대(1336~1392년)를 마감하고 통일을 달성한 일본의 실정막부(室町幕府) 3대 장군(將軍)족리의만(足利義滿, [아시카가 요시미쓰])은 오랫동안의 현안이었던 동아시아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는 1403년 명에 사자를 파견해 ‘일본국왕(日本國王)’으로 책봉을 받았다. 명으로부터의 책봉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급진전되고 체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404년에는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일본국왕의 자격으로 조선의 왕에게 국서를 보내왔고, 조선 조정은 이를 접수하였다. 이후부터 조선에서는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일본국왕으로서 접대하기로 하였고, 실정막부의 장군을 일본 외교권의 주체로서 인정하였다. 동시에 막부 장군 책봉 체제 속의 일본국왕으로서 조선의 왕과 동등한 자격으로 외교 의례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로써 조·일 양국은 600여 년간에 걸친 국교 단절 상태를 끝내고 국교를 재개하였다. 국교를 재개한 후 양국의 외교 주권자인 조선의 왕과 일본 실정막부 장군 간에는 사절단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막부에게 통신사·회례사·보빙사 등의 명칭으로 18회의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며, 실정막부에서는 조선의 왕에게 70회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실정막부에서 일본국왕사를 파견한 목적은 매우 다양하였다. 국교 재개와 수호(修好), 이를 위한 피로인 송환과 왜구 금제(禁制) 약속, 조선 왕의 사절에 대한 회례와 보빙(報聘), 조선 왕실의 경조사에 대한 문위(問慰), 명에 대한 통교 주선 요청, 삼포왜란·사량진왜변·을묘왜변 등으로 단절된 대마도와의 통교 회복 요청, 조선의 국정 탐색 등 정치적인 것이 중심적이었다.

또한 이와 함께 대장경 구청(求請), 사원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 요구 등 문화·경제적인 내용까지 포함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공식적인 사명(使命)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일본국왕사의 경우에도 공무역을 통한 교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조선전기 일본의 실정막부로부터 조선 조정으로 파견된 사절은 1399년(정종 1)부터 1592년(선조 25)까지 모두 70여 회에 달하였다. 1404년(태종 4)부터 조선에서는 실정막부 장군에 대한 호칭을 ‘일본국대장군’에서 ‘일본국왕’으로 바꾸었고, 그가 보낸 사절을 ‘일본국왕사’라고 불렀다. 그런데 70회의 일본국왕사 중에서 1470년(성종 1) 이후로는 일본국왕을 사칭한 위사(僞使)가 다수 포함되므로 이 숫자를 다 믿을 수는 없다.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 후로는 단절된 대마도와의 관계 복구를 요청하는 일본국왕사의 파견이 많았는데 이 시기의 일본국왕사도 위사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국왕사의 구성과 규모에 대해서는 이 시기 일본 측의 자료에 실상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1424년(세종 6)에 온 일본국왕사 일행의 숫자가 523명이라는 기사가 실록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경우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사절단이 파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국왕사의 경우 삼포(三浦)를 경유하여 상경하였으며 기본적인 외교 업무를 예조에서 처리하였다. 일본국왕사는 서울의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는데 상경 인원은 『해동제국기』 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의 규정에 의하면 25명으로 한정되었다.

일본국왕사의 정사(正使)는 대부분 실정막부의 보호를 받았던 경도오산(京都五山)의 승려가 임명되었다. 당시 경도오산의 고위 승려들은 불경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시문이나 유학·경전·역사를 비롯해 일본의 사서(史書)·화가(和歌) 등에도 정통하였다. 실정막부는 내정과 외교에서 고문격인 인물을 이들 선종 승려들에서 구하였다. 당시 경도오산의 선승(禪僧)들은 외교문서의 기초를 비롯해 외교에도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전까지 외교를 담당하였던 조정의 공가(公家)를 대신하는 교양 집단으로서 실정막부의 외교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대장경의 구청은 조선전기 양국 간의 문화 교류의 주요 부분을 장식하는 것이었는데, 사례가 도합 107회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일본국왕사는 1399년(정종 1)부터 1556년(명종 11)까지 27회에 걸쳐 조선 조정에 대장경을 구청하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대부분 요청을 수용하여 22회나 사급(賜給) 하였다. 한편 일본국왕사가 사찰 건립 자금이나 수리 등에 필요한 자금을 불사(佛事)의 조연(助緣)이라는 명목으로 요청한 경우가 13회에 이르는데, 조정에서는 9회에 걸쳐 동전이나 목면을 사급하였다.

변천

1. 위사 문제

1470년(성종 1)에 가짜 일본국왕사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1467년부터 발발한 응인(應仁)의 난 이후 실정막부 장군의 권력이 쇠퇴하면서 가짜 사절이 출현하였다. 또 혼란한 정세 속에서 막부의 관령(管領) 등이 왕명을 빌려 조선에 군자금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위사는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이후 다시 변질되는데 이때부터는 대마도주가 주로 파견하였다. 1511년(중종 6)부터 1591년(선조 24)까지 일본국왕사가 도합 26회 도래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대마도주의 특송사(特送使)와 동행하였다. 이 시기의 양상을 보면 임제종의 선승(禪僧), 대마도주, 구주 지역의 호족, 박다(博多)의 상인들이 결합하여 위사를 파견하였다.

최근 일본에서의 연구에 의하면, 16세기의 일본국왕사는 대부분 대마도주가 주도한 위사로 파악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조선 조정이 일본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위사를 판별하기도 어려웠고 또한 위사 파견에 대하여 미온적으로 대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반복되었다. 위사의 성행은 중앙정부 간의 통상적인 외교 관계가 허물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일 통교 체제를 더욱 형해화(形骸化)시켰다.

2. 조선후기의 일본국왕사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국왕사절단인 통신사는 일본의 강호(江戶)까지 가서 국서를 전달하고 문화 사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비하여 일본의 국왕사절단은 조선에 파견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선전기 일본 사신의 상경로가 그대로 침략로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사신의 상경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초반에는 ‘일본국왕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사행이 몇 번 있었다.

1606년(선조 39) 11월 조선의 강화 조건 요구에 의하여 덕천막부(德川幕府) 장군의 국서를 지참한 일본국왕사가 도래하였다. 한편 1609년(광해군 1) 체결된 기유약조의 제1조에서는 왜관에서 접대하는 예로 국왕사, 대마도주특송, 대마도수직인을 들고 있다. 이로써 조선후기에도 대마도의 일본국왕사 파견이 정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유약조 체결 이후 도래한 일본국왕사는 회답겸쇄환사 파견에 대한 보빙이 2회(1608년·1622년), 통신사 파견 요청이 2회(1606년·1616년), 약조 체결이 1회(1609년) 등 도합 5차례였다. 그러나 1622년(광해군 14) 보빙사를 마지막으로 일본국왕사의 도항(渡航)은 단절되었다.

조선 조정이 상경을 불허함에 따라 일본국왕사에 대한 접대 의례도 크게 바뀌었다. 부산객사의 전패(殿牌)에 대한 숙배례(肅拜禮), 연향 횟수의 감축, 선위사의 파견, 체류 일정의 단축 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교린의 의’를 배반한 침략 전쟁에 대한 징벌과 정사가 대마도인이라는 점을 고려한 결과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일본 사절의 상경을 금지한 상태에서 조선의 국왕 사절을 정권적 차원에서 이용하려 한 덕천막부가 직접 일본국왕사를 파견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막부는 조선 외교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대마도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1635년 대마도의 국서 개작이 폭로된 이후 막부가 외교권을 직접 감독하면서 대마도에 의한 일본국왕사 파견은 중지되었다. 이에 별차왜(別差倭)가 막부 관련 일을 처리하였고, 이어 1645년부터는 중앙정부 간의 외교 의례를 담당하는 대차왜(大差倭)가 그 일을 담당하였다. 즉, 일본국왕사의 형식은 사라졌지만 내용적으로는 대차왜가 일본국왕사의 역할을 하면서 조선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의의

일본 실정막부의 3대 장군 족리의만은 1403년 명의 성조(成祖)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을 받음으로써 국제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때부터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는 막부 장군을 일본국왕이라고 하였다. 조선에서도 1404년부터 막부 장군의 사절을 일본국왕사로 불렀는데, 이것은 막부 장군을 천황의 신하가 아니라 외교의 주체로 인정한 것이며, 장군을 조선의 국왕과 함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안에 편입시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족리의만은 책봉받은 이듬해인 1404년 일본국왕의 자격으로 조선의 왕에게 국서를 보내었다. 이로써 조일 양국은 600여 년간에 걸친 국교 단절 상태를 끝내고 국교를 재개하였다. 일본으로서는 8세기 중엽 통일신라와의 국교 단절, 견당사(遣唐使) 파견 폐지, 발해와의 교섭 중지 이래 쇄국 상태에 있다가 조선·명과 국교를 열게 되면서 비로소 국제 무대에 나오게 된 셈이었다.

조선시대 전반을 통하여 양국은 활발하게 사절을 교환하였는데, 조선은 국왕사절단으로서 통신사행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일본에서는 일본국왕사를 파견하였다. 일본국왕사는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실정막부 시기에 70회,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덕천막부 시기에는 5회 도래하였다.

그런데 1470년 이후로는 가짜 사절단이 등장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 사절의 상경 금지 조치로 인하여 형식이 바뀌고 1622년으로 종결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국왕사는 조선의 통신사와 함께 조선시대 조일 양국의 선린 관계를 상징하는 사절단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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