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德惠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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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912년(순종 5년)~1989년 4월 21일 = 78세]. 조선 제26대의 왕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딸. 봉호는 덕혜옹주(德惠翁主)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배다른 오빠가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인 순종(純宗)이다. 어머니는 덕수궁(德壽宮) 궁녀였던 귀인 양씨(貴人梁氏)로, 본명은 양춘기(梁春基)이며, 덕혜옹주(德惠翁主)를 낳고 복녕당(福寧堂)이라는 당호(堂號)를 받았다. 192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일본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1930년에 평생을 고생시키던 정신분열증이 처음으로 발병하여 치료를 받았다. 이듬해 대마도(對馬島) 번주(藩主)의 후손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을 하였으나, 불화 끝에 결국 이혼하였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둔 딸도 남편과의 불화를 겪다가 자살하는 등 순탄치 않은 생활을 하였다. 1962년에 영구 귀국하여 낙선재(樂善齋)에서 살았는데,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망국의 옹주

1800년대 후반 제국주의 열풍은 세계를 휩쓸었고, 대한제국 또한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에 휘말리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아시아의 제국으로 떠오른 일본으로부터 많은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제 속에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을,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맺으면서 결국 외교권을 박탈당하였다. 그러자 고종황제는 1907년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3명의 밀사(密使)를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상황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일본은 고종황제에게 한일협약의 책임을 지도록 강요하였고, 결국 고종황제는 순종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실권 없는 태황제(太皇帝)로서 덕수궁(德壽宮)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1910년 8월 한일병합(韓日倂合)이 이루어지면서, 대한제국의 통치권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이후 일본은 종래의 궁내부(宮內府)이왕직(李王職)으로 개편하고, 고종을 비롯한 황실 사람들 및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황실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본 황족의 예로 대우한다고 발표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실에게는 더 이상 어떠한 실권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덕혜옹주가 태어났다. 이 해는 고종이 환갑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였다. 고종은 슬하에 9남 4녀를 두었는데, 4명의 딸들 가운데 덕혜옹주를 제외한 다른 딸들은 그만 어려서 죽고 말았다. 게다가 덕혜옹주가 태어나던 시기에 고종은 일본에게 나라도 빼앗기고, 황위도 양위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고명딸인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고종의 기쁨은 매우 커서, 옹주의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옹주가 태어난 지 2달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자신의 침소 옆에 덕혜옹주의 거처를 마련하고 수시로 드나들기까지 하였다. 일제는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의 원칙에 따라 고종의 서녀(庶女)라는 이유로 덕혜옹주를 황족으로 인정하지 않다가, 덕혜옹주가 6세가 되던 1917년에야 황족으로 인정하였다. 당시 고종은 유치원에서 노는 덕혜옹주를 보는 것이 소일거리였는데, 어느 날 고종에게 인사하러 온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데리고 유치원에 가서 덕혜옹주를 자신의 딸이라고 소개하였다. 이에 데라우치 총독이 어쩔 수 없이 옹주를 황족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한편 덕혜옹주는 1921년 소학교에 입학하여 이름이 필요하게 되자, 그 해 5월 ‘덕혜’라는 봉호를 받았는데, 그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당호를 따라 복녕당 아기(福寧堂 阿只)로 불렸다.

신식 교육과 일본으로의 유학

덕혜옹주는 신식 교육을 받은 유일한 왕녀이다. 이를 위하여 고종은 1916년 덕수궁 안에 옹주가 다닐 유치원을 설치하고, 장옥식(張玉植)과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를 보모로 임명하였다. 이 유치원에는 덕혜옹주 외에 고관의 딸 7~8명이 다녔는데, 옹주는 그 가운데 나이가 제일 어렸다. 1919년 고종은 덕혜옹주를 약혼시키고자 은밀히 일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영친왕(英親王)이은(李垠)이 일본에 볼모로 가게 된 것처럼 옹주도 결혼을 빙자하여 일본으로 볼모로 가게 되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이름을 날리던 척화파(斥和派)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이자 황실의 시종으로 고종의 측근이었던 김황진(金璜鎭)의 조카 가운데 옹주와 나이가 비슷한 김장한(金章漢)을 옹주의 부마(駙馬)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일제가 알게 되면서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 고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약혼 실패와 고종의 승하(昇遐), 그리고 덕혜옹주의 성장은 옹주의 상황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오빠인 순종이 있기는 하였으나, 나날이 커져가는 일제의 압력을 막아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1921년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에 2학년으로 입학하였던 덕혜옹주는 1925년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일제의 강요로 어쩔 수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순종은 덕혜옹주의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여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조선에서 교육을 시키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으나, 일제와 이왕직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925년 3월 27일 서울을 떠나, 사흘 후인 30일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오빠인 영친왕이은의 저택에 도착한 덕혜옹주는 황족과 화족들이 주로 교육 받는 학습원(學習院) 중등과에 입학하면서 일본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학습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발랄하고 친절하다는 평과를 받았던 일출소학교 때와는 달리 거의 외톨이 생활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일본의 황녀인 내친왕(內親王)에게 인사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자신도 대한제국의 황녀인데 왜 절을 해야 하냐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만큼 급우들과도 미묘한 관계에 놓여 있었고, 이것은 급우들과의 불화로 이어졌다. 1926년에는 오빠인 순종이, 1929년에는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일본 생활에서 오는 정서적 불안과 가족의 연이은 사망 탓인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덕혜옹주는 몽유병 증세까지 나타나는 등 건강이 매우 나빠지면서 결국 1930년 ‘조발성치매’ 진단을 받았다.

정략 결혼

덕혜옹주는 영친왕이은의 별장이 있던 오이소[大磯]에서 요양을 하면서 점차 건강을 되찾아 갔는데, 1931년에는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 해 3월에는 비록 요양 등으로 결석하는 날이 많기는 하였으나, 무사히 학습원 본과를 졸업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덕혜옹주의 혼인이 진행되고 있었다. 덕혜옹주의 혼인과 관련된 얘기들은 이전부터 간간히 흘러나오다가, 1930년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였다. 영친왕이은은 덕혜옹주의 건강 상태를 이유로 혼인에 관한 논의를 거절하였으나,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일본 측의 의사대로 일은 진행되었다. 결국 덕혜옹주가 한참 병을 앓던 1930년 10월 옹주와 대마도 번주의 후손인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이 확정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1908년 출생으로 덕혜옹주보다 4살 연상이었는데, 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님을 다 잃었다.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는 각각 1917년과 1925년에 사망하였고, 양부모는 둘 다 1923년에 사망하였다. 소 다케유키는 친아버지가 사망한 이듬해인 1926년 대마도 번주인 소 시게모치[宗重望]의 아들로 입적된 후, 1923년 10월 정식으로 가문과 백작 작위를 승계하였다. 그리고 덕혜옹주와 혼담이 오고갈 때에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결혼 확정이 있은 다음 달인 1930년 11월 처음으로 얼굴을 본 그들은 1931년 5월 도쿄에 있는 소 타케유키의 저택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2년 8월 덕혜옹주는 딸 종정혜[宗正惠, 소 마사에]를 낳았다. 결혼 이후 1945년 독립 때까지 덕혜옹주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여러 소문들만이 남아 있다. 남편은 키 작은 추남에 애꾸눈이며, 남편으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바람에 딸 정혜를 낳기 전에 유산을 한 적이 있고, 계속되는 남편의 폭행 때문에 실어증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딸 정혜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대마도의 친척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여러 연구를 통하여 이것은 덕혜옹주의 결혼 전 발병 및 정혜의 출생 시기와 같은 기본 사항을 파악하지 못한 채, 옹주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언급한 것들만 가지고 잘못 추측하는 바람에 생긴 오해라는 것이 밝혀졌다. 다만 여러 사람들의 회상 등에 따르면 덕혜옹주의 병이 재발하여 저택에서 치료 및 보호를 받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한편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패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은 연합군 사령부의 주도 하에 여러 개혁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고, 1946년에는 신헌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신헌법에 따라 화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소 다케유키 또한 평민의 신분이 되었고, 재산세 등의 세금 문제로 많은 압박을 받게 되면서 살림의 폭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협소한 저택으로 이주를 하였으며, 고용인들의 수도 줄였다. 이렇게 되면서 더 이상 덕혜옹주를 집안에서 간호하기가 힘들어지자, 1946년 옹주는 도쿄의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후 각 기록들마다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1955년 덕혜옹주와 소 타케유키는 협의 이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 타케유키는 일본 여성과 재혼을 하였다. 그리고 1956년 8월 딸 정혜가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다니면서 만나 1955년에 결혼한 남편 스즈키[鈴木]와 불화 끝에 어느날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하였다가 일본의 남알프스 부근에서 사라져 버렸다. 헬기까지 동원하는 등 몇 개월에 걸쳐 수색 작업을 펼쳤으나, 정혜의 흔적은 결국 찾을 수 없었다. 일제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이뤄졌던 소 타케유키와의 정략 결혼은 이렇게 덕혜옹주에게 좋지 않은 결과만을 남기고 끝이 났다.

귀국 후의 삶

남편 소 타케유키와의 결혼 후 덕혜옹주는 양덕혜(梁德惠)라는 이름으로 호적을 창립하였다. 이씨 성이 아닌 양씨 성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다만 당시 옹주는 지병으로 입원 중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결정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1950년대 초반에 당시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었던 김을한(金乙漢)이 병원에 입원 중이던 덕혜옹주를 방문하였다. 김을한은 고종이 덕혜옹주의 부마로 내정하였던 김장한의 형이었는데, 1960년대 초반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이 귀국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이 귀국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지 않았다. 덕혜옹주는 지병으로 인하여 의사 결정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영친왕이은의 경우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당시 실권자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결국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은 일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61년 11월 김을한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朴正熙)를 만나, 병상에 있는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의 사정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귀국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은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 부부의 귀국을 적극 돕기로 결정하고, 이를 추진해 나갔다. 그 결과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유모 변복동 및 상궁들, 그리고 옛 학교 친구의 마중을 받으며 37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직후 덕혜옹주는 곧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를 방문하여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를 배알(拜謁)하고 친척들의 인사를 받았는데, 당시 실어증과 지병으로 사회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중의 예절에 대해서는 익숙한 듯 행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점심 식사 후 바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옹주의 귀국 4일 후인 1월 30일에는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한복을 선물하며 덕혜옹주를 방문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옹주의 귀국에 얼마나 많은 이목이 쏠려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에서 5년간 치료를 받은 후 왕진 치료만으로 충분하다는 소견에 따라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의 수강재(壽康齋)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로도 잠깐씩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으나, 곧 낙선재로 돌아왔다. 한편 귀국하여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덕혜옹주는 정순효황후와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 여사를 만났을 때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고 전해지며, 정순효황후에게는 가끔 서투른 글씨로 문안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퇴원 후 낙선재에서의 생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기분이 거슬리는 경우 싫다고 불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상궁들과 또는 혼자서 화투놀이를 즐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가끔 딸 정혜를 찾았다고 한다.

이렇게 혼자만의 세계에서 만년을 보낸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4월 25일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아버지 고종의 무덤인 홍유릉(洪裕陵)의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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