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재(樂善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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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와 함께 일곽을 이루어 조영된 궁궐 내 반가(班家) 형식의 집.

개설

헌종이 사랑했던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를 위해 1847년(헌종 13)에 마련한 건축물이다. 1756년(영조 32) 사도세자(思悼世子)에 의해 일어난 화재로 소실된 낙선당과 연관해 거론되는 집이기도 하다. ‘낙선(樂善)’은 『맹자(孟子)』에서 “인(仁)·의(義)·충(忠)·신(信)으로 선(善)을 즐거이 여기고[樂] 게으르지 않는 것을 천작(天爵)이라 한다.”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국왕에게 삶의 방식을 깨우쳐 주는 의미를 지녔다. 원래 낙선당은 동궁의 영역에 있어 세자가 강연하는 장소였다.

영조대에 낙선당이 불에 타 없어진 후, 약 90여 년 만에 헌종대 ‘낙선’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렇지만 같은 집, 같은 제도대로 복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옛 낙선당의 자리에 세워진 것도 아니라 여겨진다. 이때의 수강재 중수 역시 낙선재와 수강재를 함께 들여놓기에 협소했던 터를 넓게 잡기 위해 옆으로 이전되었다고 판단된다. 「동궐도(東闕圖)」와 「동궐도형(東闕圖形)」에 나타난 우물 등을 기준으로 비교해 보면, 1848년(헌종 14)에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가 일곽을 이뤄 한자리에 놓였다. 이렇게 조성된 낙선재는 헌종이 책을 읽으며 편안히 쉬는 집으로 마련하려 했던 건축 의지를 “포죽남산곽거안지심댁(苞竹南山廓居安之心宅)”이라고 상량문에 쓰고 있다.

위치 및 용도

낙선재는 창덕궁의 동남쪽에 있으며, 궁궐의 전각답지 않게 단청이 없다. 「동궐도」상에서는 연영합(延英閤)의 남쪽 수강재의 서쪽에 있다. 지금은 인정전(仁政殿)의 숙장문을 지나 어차고에서 바라보았을 때, 동쪽에 놓여 있다. 원래 창덕궁의 동궁 영역에 놓여 있는 셈이다. 낙선재를 가장 먼저 짓고 석복헌, 수강재를 동시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변천 및 현황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에 조영되어 약 2년간 사용되다가 이후 30년 이상 방치되었다. 그러다 갑신정변 이후인 1881년(고종 18)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이곳을 주요 시어소로 사용하였으며(『고종실록』 21년 10월 23일), 일제강점기 이후 왕실 주요 인물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순종실록부록』 5년 6월 14일). 1910년(융희 4) 8월 일본에 국권을 넘겨준 순종은 창덕궁에서 생애를 보내는데, 1912년부터 1919년까지 낙선재와 창덕궁의 여타 전각을 오가며 거처를 옮겨 지냈다. 1926년 순종이 대조전(大造殿)에서 생애를 마감하자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가 낙선재에 머물러 살았다. 이후 낙선재가 좁아 불편하다고 하여 1929년 3월 증축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피난했다가 이승만이 낙선재에 귀가하는 것을 거부하자 정릉에 임시로 살았다가 1960년 5월 박정희에 의해 돌아왔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 낙선재에서 승하하였다. 그리고 1963년 귀국하여 순정효황후와 함께 거처하던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1989년, 1962년 귀국한 덕혜옹주(德惠翁主)가 1989년 낙선재에서 영면하였다.

현재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일곽을 통틀어 낙선재라고 부르고 있다. 낙선재 현판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깊이 교유했던 청나라 사람 섭지선(葉志詵)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대청 앞 주련에는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의 글씨가 있다.

형태

낙선재 일곽은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행각으로 연결되어 연이어 배치되어 있다. 낙선재 본채는 세벌대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웠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에 건물의 양쪽 끝이 앞뒤로 돌출된 형태이다. 서쪽 끝 1칸이 전면으로, 동쪽 끝 2칸이 후면으로 돌출되었고 부속칸이 연결채로 석복헌과 연이어 있다. 건물의 서쪽 끝은 두 칸의 누마루와 한 칸 방으로 구성되었고 그 동쪽으로 대청 두 칸, 방이 세 칸, 후면으로 두 칸의 방이 덧달려 있다. 건물 전면 4칸은 툇간으로 마루를 놓았고 마지막에 부엌이 달려 있다. 익공집으로 부연을 단 겹처마에 막새기와로 마감한 팔작지붕이다. 파련대공과 초각 등을 써 집의 섬세한 꾸밈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앞마당을 행각이 둘러싼 ‘口’ 자형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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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은 중전에게서 후사가 없자 경빈김씨를 맞아들이고 다음 해에 영건 역사를 시작하여 석복헌을 조성했다. 낙선재를 조성한 다음 해에 마련된 석복헌 상량문에는 “오색 무지개 용마루에 걸려, 상서로운 기운이 있고, 꿈을 점치니 하늘이 장차 난실에 대인을 주려는 것[文虹繞棟, 卽生祥下瑞之期, (중략) 天將啓於蘭室, 大人占之夢態)]”이라는 내용으로, 내조 잘하는 후비(后妃)와의 금슬을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마련된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았고 마치 사대부 집의 안채와 사랑채를 옮겨놓은 듯 소박하고 섬세하게 꾸며 놓았다.

관련사건 및 일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인 순정효황후, 이방자 여왕, 덕혜옹주, 이구 등이 생활하였던 곳이며, 그들과 영친왕의 장례가 치러진 장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원헌고(元軒稿)』「동궐도형(東闕圖形)」
  • 문화재청, 『궁궐 현판의 이해』, 문화재청, 2006.
  • 창덕궁 관리소, 「창덕궁 안내 책자」
  • 서우학회, 『서우(西友)』제13호, 서우학회,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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