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악(高麗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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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궁중 악무 중 좁게는 고구려, 넓게는 한반도 및 발해에서 전래한 악무를 통틀어 일컫는 말.

개설

고려악(高麗樂)은 일본어로는 ‘고마가쿠[高麗樂]’라고 한다. 일본의 아악인 가가쿠[雅樂]는 그 연주 형태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음악만을 연주하는 간겐[管絃], 둘째는 아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우타이모노[歌物], 셋째는 아악기의 반주에 노래 없이 춤만 추는 부가쿠[舞樂]가 그것이다. 그중 부가쿠는 다시 중국 및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등의 남방계 음악에 같은 계열의 춤이 동반되는 좌방(左方)의 도가쿠[唐樂]와, 한반도와 발해 등의 북방계 음악에 같은 계열의 춤을 동반하는 우방(右方)의 고마가쿠로 구분된다. 한반도 전래의 악무는 원래 고구려악, 백제악, 신라악을 포괄하는 산칸가쿠[三韓樂]로 불렸으나, 헤이안[平安]시대 중기에 대규모 악제 개혁이 단행되면서 산칸가쿠에 발해의 봇카이가쿠[渤海樂] 및 일본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악곡이 더해져 고마가쿠로 재편성되었다.

내용 및 특징

오늘날 고마가쿠는 약 38개의 악곡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중, 고마이누[狛犬]나 고마류[高麗竜]처럼 전승이 단절된 것도 있지만, 신토리소[新鳥蘇], 고토리소[古鳥蘇], 다이소토쿠[退走禿], 신소토쿠[進走禿], 엔기라쿠[延喜樂], 기토쿠[貴德], 고초[胡蝶], 고토쿠라쿠[胡德樂], 핫센[八仙], 고마보코[狛鉾], 나소리[納曾利], 오닌테이[皇仁庭], 한나리[埴破], 신소리코[進蘇利古], 소리코[蘇利古], 아야기리[綾切], 시키테[敷手], 닌나라쿠[仁和樂], 조보라쿠[長保樂], 신마카[新靺鞨], 린가[林歌], 소시마리[蘇志摩利], 지큐[地久], 도덴라쿠[登殿樂], 호힌[白浜] 등 상당수의 악곡이 현전한다. 나소리는 두 마리의 용이 춤추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푸른색 의상에 날카로운 이를 지닌 짐승의 가면을 쓰고 손에는 은색 봉을 들고 춤을 추는데, 은색의 봉은 고마부에[高麗笛], 즉 고려 피리를 상징한다. 나소리는 1711년(숙종 37)에 정사조태억, 부사임수간을 비롯해 총 500여 명이 파견된 신묘사행 당시, 일본 막부가 통신사들을 위해 마련한 연향에서 도가쿠인 료오[陵王]와 함께 공연되기도 하였다. 춤은 1인무 혹은 2인무로 연행된다.

고마보코는 사오모치마이[棹持舞], 가초라쿠[花釣樂]라고도 한다. 사오모치마이란 문자 그대로 삿대를 들고 추는 춤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악서(樂書)인 『교훈초(敎訓抄)』에 의하면, 먼 옛날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올 때는 오색으로 채색한 삿대로 배를 저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선원들은 험난한 항해 끝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기뻐하며 삿대를 어깨에 메고 춤을 추었는데, 고마보코는 그 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고마보코라는 악곡명은 춤을 출 때 무구로 사용하는 오색의 삿대가 마치 창처럼 생긴 까닭에, 좁게는 고구려, 넓게는 한반도를 나타내는 고마[狛]에 창을 의미하는 호코[鉾]가 붙어 생겨나게 되었다.

신토리소는 『무악도설(舞樂圖說)』에 따르면, 사가[嵯峨]천황 때 한반도 출신 악사인 하춘(下春)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신토리소의 도리소[鳥蘇]는 우수리[鳥蘇里]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우수리는 고대 발해 지역의 지명이었다고 한다. 아야기리는 아이키리조[愛耆女], 고마조[高麗女], 오마카[大靺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교훈초』에 여성의 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을 모티프 혹은 주제로 하는 악곡이다. 공연을 할 때는 여성의 얼굴을 한 흰색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고초는 일본에서 고마가쿠의 양식에 맞추어 새롭게 창작한 것이다. 원래는 4명의 소년들이 공연하게 되어 있으나, 오늘날에는 소녀를 포함해 젊은 여성들에 의해 공연되기도 한다. 의상은 곱게 채색한 나비의 날개 모양을 하고 있다.

소시마리 또는 소시모리는 『무악도설』에 신대(神代)에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가 푸른 풀을 베어 삿갓을 만들어 쓰고 신라의 소시모리[曾尸茂梨]로 갔다는 내용이 역사서에 나오는데, 그것을 춤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악무이다. 소시마리란 악곡명은 한국어의 ‘소의 머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춘천의 우두산처럼 ‘우두’라는 지명을 갖는 여러 곳이 소시마리의 발생지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공연을 할 때는 어깨에 도롱이를 두르고 허리에는 삿갓을 매고 나와 춤을 춘다.

좌방의 도가쿠와 우방의 고마가쿠는 음악은 물론 의상 및 춤 동작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도가쿠가 붉은색 의상에 금색 무구(舞具)를 사용하는 데 비해, 고마가쿠는 푸른색 의상에 은색 무구를 사용한다. 춤 동작의 경우 도가쿠는 다리를 앞으로 뻗어 발바닥으로 바닥을 살짝 치는 동작을 기본으로 하는 데 반해, 고마가쿠는 다리를 앞으로 뻗어 발뒤꿈치를 일단 바닥에 세운 뒤 그다음 동작으로 진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한편 조선 인조 때는 왜의 사신 현방(玄方)이, “삼국시대에는 문인(文人)과 악사(樂師)를 일본으로 보내 혹은 문(文)도 가르치고 혹은 악(樂)도 가르쳤는데, 악의 경우 고려악이라고 칭하면서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고려악을 언급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7년 윤4월 27일).

변천

고마가쿠를 포함한 일본의 부가쿠가 가장 발달한 시기는 헤이안시대 초기로, 당시 부가쿠는 궁중의 각종 행사 및 관혼상제 등의 예식에서 공연되었으며 귀족 문화의 대표 격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외부에서 악곡이 유입되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개작과 창작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특히 사가천황, 준나[淳和]천황, 닌묘[仁明]천황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악무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0세기 말에는 악제 개편이 완료되어 악기 편성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비되는 등, 부가쿠는 고대 궁중 악무로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황실과 귀족의 세력이 약화된 중세 때는 조정 및 큰 신사와 사원의 의식악으로만 사용되었다. 권력 쟁탈 등에 따른 전란이 잦았던 까닭에 조정의 힘이 약화되어 악인들을 결집하고 관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1467년에 시작된 오닌[應仁]의 난은 조정에 큰 타격을 주어, 중앙의 악인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오닌의 난 이후, 오기마치[正親町]천황 등 후대의 천황들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악인들을 불러 모아 부가쿠를 정비하였지만, 곡의 일부가 유실되거나 춤의 전승이 단절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이후, 근세로 접어들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등의 존왕정책(尊王政策)에 힘입어 부가쿠는 다시 부흥할 수 있었으며, 메이지[明治]천황 시대에는 구나이쇼[宮內省]의 시키부[式部]에 가가쿠부[雅樂部]가 설치되면서 정책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었다. 부가쿠는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데, 고마가쿠는 구나이쇼 이외에 이세진구[伊勢神宮],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 나라의 혼간지[本願寺] 등에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 『교훈초(教訓抄)』
  • 『악가록(樂家錄)』
  • 小中村清矩 저, 서정완 역, 『가무음악략사』, 소명출판, 2011.
  • 故實叢書編輯部,『故實叢書 舞楽図及舞楽図説』, 吉川弘文館, 1930
  • 高円宮妃久子, 『宮內廳樂部 雅樂の正統』, 扶桑社, 2008.
  • 神宮司廳, 『故事類怨』, 吉川弘文館, 1909.
  • 河竹繁俊, 『日本演劇全史』, 岩波書店, 1959.
  • 박태규, 「韓日両国の比較芸能史論」, 『日本文化學報』 27, 한국일본문화학회, 2005.
  • 전덕재,「고대 日本의 高麗樂에 대한 기초 硏究」, 『동북아역사논총』 20, 동북아역사재단, 2008.
  • 三田德明, 「日本雅楽」, 『한중일 전통아악무용 국제학술포럼 논문집』, 중국 항주사범대학 음악학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