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대동(京大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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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군현이 중앙 각사에 납부하는 공물[京貢物]을 현물 대신 쌀과 포목으로 납부하던 제도.

개설

경대동은 각 군현을 제외하고 서울에서만 실시한 대동법(大同法)이었기 때문에 반대동(半大同)이라고도 불렀다. 경대동의 논의는 1623년(인조 즉위년)에 시작되어 만 2년을 못 채우고 1625년(인조 3) 2월 7일에 종결되었다.

내용 및 특징

경대동의 첫 단계는 인조 즉위 직후부터 법 시행이 결정되는 원년(인조 1년) 9월 말까지였다. 이 단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대동법 논의는 그 당위성만 주장되었을 뿐 실제 실시를 전제로 해서 논의되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와 실제로 그것을 현실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실제로 대동법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왕과 관료들에게 정책 효과에 대한 더 큰 확신이 필요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인조 원년 9월부터 인조가 대동사목(大同事目)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하는 인조 2년 8월까지였다. 다양한 반대론에도 불구하고 조익(趙翼)의 상소 후 경상도를 뺀 강원도·충청도·전라도를 대상으로 삼도대동청(三道大同廳)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경상도가 빠진 이유는 경상도 재원의 상당 부분이 왜관(倭館)의 경비로 소용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에 실시된 대동법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게다가 법 시행과 동시에 극심한 흉년까지 겹쳤다. 이 때문에 현물 대신 가을에 토지 1결(結)당 쌀 8두(斗)씩 거두는 대동미를 수취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정부는 8두 중에서 서울에서의 수요를 위한 몫으로 절반만 거두고, 각 군현의 수요는 종전의 관행대로 쌀 대신 공물로 내도록 하였다. 가뭄으로 인한 쌀값 상승을 고려한 조치였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처음부터 대동법을 혼란으로 몰아간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 삼도 (三道) 대동법의 정책 목표와 규정에 대한 수정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인조 즉위년 가을, 위와 같이 서울에 바치는 공물에 한해서만 쌀을 수취하도록 정한 후에 삼도대동법은 경대동으로 바뀌었다. 경대동의 방안은 얼핏 보면 설득력이 있었다. 흉년에 공물을 사들이거나 혹은 제작하는 공가(貢價)·역가(役價)를 한 번에 거둬서 서울까지 옮기는 것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삼도대동청이 말했듯이 민결(民結)에 부과되는 역(役)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공물이었다. 만약 경대동을 통해 중앙 각사의 방납(防納)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백성들이 혜택을 입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경대동은 방납이라는 현물 공납제의 핵심적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중앙의 정책적 대응으로서, 개선의 내용은 경공물로 제한되었지만, 그 효과는 수취제도면에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논자들 사이에서는 공납제 폐단의 본질을 놓고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하나는 공납 폐단의 핵심이 방납이라고 보는 시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물 부담의 다양한 불균등이라고 보는 시각이었다. 경대동이 미흡한 대로 대동법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자의 맥락에 닿아 있었다. 즉, 경대동을 통해서 중앙 각사에서 이루어지는 방납을 막는다면 공납 폐단의 상당 부분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쪽이 있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경대동은 전혀 공납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각 군현에서는 경대동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불만의 소리가 높아졌다. 경대동이 실시되었지만 이중으로 공물가(貢物價)를 부과하는 첩징(疊徵)과 공물 부과의 불균등은 계속되었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대동법이 실시되면 손해를 볼 것이 분명한 지역과 계층이 대동법을 격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도 재정 문제의 대책을 놓고 대동법 이외의 방법들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양전론과 호패법(號牌法)이었다.

한편 조익을 중심으로 하는 극소수 대동법 실시론자들은 경대동의 문제점을 파악한 후, 경대동을 대동법으로 확대시킬 대책을 마련하였다. 경대동의 실패를 통해서 대동법이 각 군현의 수요를 포괄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 제도임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각 관의 수요를 위해 결당 5두를 추가로 거두자는 안이 나왔다. 이때 조익이 1결당 13두 수취안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전라도에서 실시되는 대동법의 결당 수취액과 같은 액수였다.

변천

인조 초 삼도대동법은 파행으로 시작되어 결국 원래 실시하기로 했던 내용대로는 한 번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채 폐지되고 말았다.

이 시기 대동법 실패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양입위출(量入爲出)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양입위출이란 백성에게 미리 정해진 몫만큼만 거두고 어떤 일이 있어도 추가로 거두지 않고 이미 거둔 세금으로 지출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이 법을 추진하는 주체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정책 담당자들은 경대동과 대동법의 정책적 함의의 차이를 명백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경대동으로는 양입위출을 핵심으로 하는 대동법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결국 삼도대동청의 실패는 경대동의 실패였다.

비록 삼도대동법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이후 대동법에 대한 논의가 조정의 틀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삼도대동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마련된 문서들이 이후에 대동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참조되었다는 점이다. 대동법 실시를 위한 논의의 문서적 기초가 확보되었던 것이다. 1645년(인조 23), 1646년의 재생청(裁省廳) 공안 개정의 기초 자료는 바로 인조 초 삼도대동법 실시 과정에서 마련된 것이고,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역시 이를 기초로 작성되었다.

참고문헌

  •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 이정철, 「인조 초 삼도(三道) 대동법 논의와 경과」, 『한국사연구』 121, 2003.
  • 이정철, 「정묘호란 후 인조대 공물변통 논의」, 『사총』 56, 2003.
  • 이정철, 「조선시대 공물변통론에서 포저(蒲渚) 조익(趙翼)의 위치와 역할」, 『대동문화연구』 70, 2010.
  • 지두환, 「인조대의 대동법 논의」, 『역사학보』 155,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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