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주(挾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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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상평통보를 주전하던 관청에서 노임을 주는 대신 허락했던 비공식 주전.

개설

협주는 관에서 주전하는 장인이 스스로 재료를 마련해서 관의 용광로를 이용해서 주전하는 것을 이르는데, 이때 만든 동전을 협전(挾錢)이라 한다. 일종의 사주전(私鑄錢)인데, 이는 보통의 사주전이 불법적으로 몰래 주전되는 것과 달리 관에서 허가했다는 점이 달랐다. 조선 정부는 상평통보 주전을 담당했던 장인에게 줄 노임 대신 그들이 동전을 주전하여 쓸 수 있도록 한 것인데, 협주에는 관에서 쓰던 용광로가 사용되었다. 이때 사적으로 재료를 첨가하거나 관에서 주전하고 남은 재료를 이용하여 동전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장인들은 부족한 구리를 대신하여 가격이 저렴한 납이나 흑연을 더 많이 투입하였다(『정조실록』 22년 5월 2일). 구리의 함량이 적은 만큼 품질은 떨어졌지만 관에서는 협주한 동전을 유통시켜 덜 들어간 구리만큼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정부는 협주로 장인들의 임금을 충당하는 한편, 시장 유통도 병행하여 추가 이익을 거두었다.

연원 및 변천

협주가 처음 나타난 것은 상평통보의 주전을 시작한 1678년(숙종 4)이다. 관에서는 일본에서 수입한 구리를 재료로 2전 5푼 무게로 동전을 제작하여 1678년~1697년 사이에 450만 냥을 주조하였다. 상평통보 제작은 민간에 교환수단을 공급해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큰 이유는 국가재정의 확충이었다. 따라서 관에서는 최대한 주전 비용은 줄이되 이익은 최대치를 얻고자 하였다. 상평통보를 제작하는 비용은 크게 재료비, 임금, 주전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연료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구리는 동래(東萊)의 왜관을 통해 쓰시마[對馬島]에 면포나 쌀을 주고 수입하였다. 이러한 재료비는 최대 상평통보 가격의 60%를 차지하였고, 나머지는 임금과 연료비용이 차지하였다. 관은 이러한 제작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고안해냈다. 이에 관에서는 임금을 지급하는 대신 협주를 통해 장인들의 노임을 충당하려고 했고, 장인들은 관에서 사용한 나머지 재료로 동전을 만들어 임금을 충당할 뿐 아니라 보다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였다. 관 입장에서는 협주를 유통시킴으로써 통화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고, 또 정상적으로 주전된 동전보다 제조비용이 적었으므로 보다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협주 제작에는 재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품질이 저급한 동전이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동전은 상평통보와 비슷했지만 두께나 무게가 현저하게 낮아 민간에서는 악전(惡錢)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관서에서 정품 동전만 세납으로 선택하여 받아들이다 보니 민간에서도 악전이 아닌 정품 동전만 교환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악전이 시장에서 심각하게 거부되면서 상평통보의 유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동전의 품질이 열악하여 함량 미달의 동전이 나타나기도 하면서 조정에서는 부득이하게 1798년(정조 22) 악전 주조의 원인이 되었던 협주를 폐지하였다.

형태

협주를 통해 만든 협전은, 외형은 보통의 상평통보와 같이 둥근 모양에다 가운데에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지만 동전 주조에 필요한 재료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정품 동전보다 무게가 가볍거나 동전의 두께가 얇았다(『정조실록』 22년 3월 28일).

생활·민속 관련 사항

상평통보 제작은 관이 주도한 사업으로 임금과 노동 조건이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상평통보 주전 계획이 알려지면 시장을 이룰 정도로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정부에서 실행한 일이었던 만큼 공역가도 다른 노동보다 높게 주었고, 임금을 체불할 염려가 덜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에서는 주전 사업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임금 대신 협주를 허용해 주어 임금을 스스로 해결하게 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은 협주로 임금을 충당할 뿐 아니라 보다 많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상평통보의 주재료인 구리보다 납, 철 등을 많이 섞어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생산하였다. 재료비를 아껴 그만큼의 이익을 더 보고자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조된 동전은 크기가 기준보다 터무니없이 작거나 두께가 얇아 오히려 유통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므로, 정부는 결국 1798년 협주를 폐지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원유한, 『조선후기 화폐사연구』, 한국연구원, 1975.
  • 유현재, 「조선후기 鑄錢정책과 財政활용」,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정수환, 「17世起 銅錢流通의 政策과 實態」,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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