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전(惡錢)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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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악전 |
한글표제 | 악전 |
한자표제 | 惡錢 |
관련어 | 아안전(鵝眼錢), 협주(挾鑄) |
분야 | 경제/물가·화폐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유현재 |
용도 | 화폐 |
재질 | 구리, 납, 잡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악전(惡錢)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51년 2월 10일, 『정조실록』 22년 3월 16일, 『정조실록』 22년 5월 2일, 『정조실록』 22년 5월 2일 |
관에서 주전한 동전보다 품질이 낮은 비규격 동전.
개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동전이 주전(鑄錢)되어 유통되었다. 악전은 그 가운데 무게나 크기, 주요한 금속 함량 등이 정품 동전보다 낮은 비규격 동전의 통칭이다. 1678년(숙종 4)에 상평통보가 대규모로 주전되기 시작하면서 악전 유통량도 더불어 증가하였다. 상평통보는 구리를 중심으로 주석 등 비철금속을 합금한 동전이었다. 원재료였던 구리는 생활도구로도 사용이 가능했으므로 실질적인 현물 가치가 있는 금속이었다. 따라서 일정량의 철이나 구리를 넣어 만든 동전은 실질가치에 기반하여 유통되었다.
악전은 민과 관에서 정품동전보다 품질이 낮게 동전을 제작하고 그 차액만큼 이익을 얻고자 제작한 화폐이다. 하지만 악전은 대량으로 유통될수록 화폐신용도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서는 정품동전의 유통을 원활하게 유지하고자 악전 유통을 금지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영조실록』 51년 2월 10일).
연원 및 변천
전근대 시기에 유통된 화폐의 가격은 화폐의 현물가치에 기반하여 유지되었다. 동전의 경우 화폐에 투입된 금속의 가격에 기반하여 가격이 결정되었다. 조선후기 1678년(숙종 4)부터 대량 유통된 상평통보는 구리와 주석을 주원료로 2전(錢) 5푼(分)의 무게로 제작되었다. 구리는 생활용품과 무기의 재료였기 때문에 민간에서 실질적인 가치가 보장되는 금속이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상평통보를 발행하면서 무게에 따른 현물가격을 시장의 가격에 따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동전을 제작하는 장인들의 임금을 지불해주지 못하면서, 장인들에게 사적으로 주전을 허용했고 이를 계기로 액면가에 미치지 못하는 품질의 동전이 대량으로 양산되었다. 장인들이 관의 시설을 이용했지만 관에서 충분한 재료를 공급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불량 동전이 양산된 것이다. 물론 관에서는 불량 동전이 생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엄격한 품질관리를 진행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동전의 뒷면에 주전 관청을 명시해 놓고 있다. 또한 천자문과 동그라미와 반월 형태를 빈 공간에 넣음으로써 책임자를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는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여, 주전의 재료를 빼돌려 동전 품질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관에서 임금 대신 사적으로 장인들에게 허락한 주전 행위인 협주(挾鑄)를 하는 장인들이 만든 동전까지 철저하게 통제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익을 노린 사주전의 확대는 결국 악전의 확대 생산으로 이어졌다. 세금을 징수할 때는 악전이 거부되었지만, 악전의 유통은 계속 증가하여 정조대에는 당대에 유통되는 동전이 옛날 동전보다 못하다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정조실록』 22년 3월 16일).
형태
악전은 품질이 떨어지는 동전이지만 외형은 관에서 제작한 동전과 비슷하였다. 악전의 품질이 현저하게 떨어질 경우 민과 관에서 사용이 거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전의 외형은 시기별로 관에서 유통시켰던 동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제작하였다. 특히 동전의 무게도 비슷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동전의 무게가 가벼운 경우 거래 당시 수납이 거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원료인 구리의 물량이 충분하지 않고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무게를 맞추기 위해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납·연(鉛)·철(鐵)을 섞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2년 5월 2일).
상평통보의 경우 정식 규격은 무게로 규정되었다. 1678년 당시 상평통보가 주전되었을 때에는 2전 5푼이었다가 점차 1전 7푼 그리고 1전 2푼으로 가벼워졌다. 상평통보를 주전했던 기관이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었고 주전하는 주전 틀이 동일하게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에 동전의 모양 또한 제각각이었다. 따라서 육안으로 악전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남송(南宋)대에 나타났던 물에 뜰 정도로 가벼웠던 아안전(鵝眼錢)을 언급할 정도로 악전 유통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었다(『정조실록』 22년 5월 2일).
생활·민속 관련 사항
악전이 유통되면 정부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서울로 상납되는 세금 가운데 동전은 약 130만 냥이었는데, 이 가운데 악전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만큼 재정상 손실을 입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에서는 세납할 때 악전을 철저하게 배제하였으므로 민간에서는 정품 동전을 구하기 위해 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원유한, 『한국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시대까지』, 한국은행 발권국, 2006.
- 유현재, 「조선후기 鑄錢정책과 재정활용」,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정수환, 「17세기 동전유통의 정책과 실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