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蝤魚)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잉어목 기름종개과의 민물고기.

개설

미꾸리 혹은 미꾸라지를 말한다. 진흙이 있는 곳에 서식한다. 조선시대에는 하찮은 물고기로 인식되어 진상품의 대상이 아니었다. 추어(蝤魚)는 주로 평민들이 즐겼으며, 푹 고아서 국을 끓여 먹었다.

원산지 및 유통

미꾸리와 미꾸라지는 진흙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물고기였다. 그 때문인지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조선시대 문헌에는 이들 서식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보이지 않는다. 미꾸리와 미꾸라지는 물이 고여 있는 늪이나 연못·저수지·논에 주로 서식하지만, 미꾸라지는 진흙이 깔린 시냇물이나 하천 하류에서도 살았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농촌 지역에서 부업으로 추어를 양식하기 시작하였다. 모내기를 하고 나서 약 일주일이 지난 뒤 추어 새끼를 논에 방생한 다음, 늦가을이나 초겨울 즈음 논에 물이 마르면 진흙을 파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추어를 잡으면 되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뱀이나 개구리에게 잡아먹히는 추어 수가 상당하였다. 그래서 1960~1970년대부터는 아예 콘크리트로 인공 못을 조성하여 추어를 양식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연원 및 용도

추어는 다양한 이칭(異稱)을 가지고 있다. 허준(許浚)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항상 진흙 속에 있다 하여 추어(鰌魚) 혹은 추어(鰍魚)라고 부르면서 한글로 믜꾸리라고 적었다. 서유구(徐有榘)는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한자로 이추(泥鰍)라 적고, 한글로는 밋구리라고 기록하였다. 이외에도 추어는 미꼬리, 미꾸리, 미꾸라지 등의 별칭으로 불렸다.

미꾸리와 미꾸라지는 둘 다 추어(鯫魚)로 통칭되지만, 분류학상으로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민물고기다. 미꾸리는 몸이 원통형이고, 미꾸라지는 몸이 옆으로 납작하다. 그래서 미꾸리는 동글이, 미꾸라지는 납작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미꾸리와 미꾸라지는 모두 추어탕의 주재료로 쓰이지만, 미꾸리가 더 맛이 좋다고 한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추어는 살에 지방분이 많고 맛이 있다고 하면서, 평민들이 이것을 잡아 푹 고아서 국을 끓여 먹는데 별미라고 적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음식은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먹는 추어탕일 듯하다. 하지만 추어는 평민들이 즐기는 음식이었을 뿐, 왕실에서는 즐기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추어 관련 기록은 실려 있지만, 음식과 관련한 기사가 아닌 진흙에 사는 하찮은 존재를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숙종실록』 6년 2월 25일).

조선시대 문헌 기록을 통해 자세하지는 않지만 추어를 이용한 음식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추어 삶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지느러미를 잘라 버리고 머리가 아래로 향하게 추어를 매달아 놓으면 진흙과 타액이 저절로 흘러나와 비린내를 없앨 수 있고, 삶을 때 등심초를 쓰면 아주 좋다고 하였다.

또한 당시 한양의 반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음식인 추두부탕(鰍豆腐湯)이라는 미꾸라지 요리법을 소개하였는데,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6일간 추어를 맑은 물에 넣어 해감을 시킨다. 추어가 진흙을 다 토하고 나면, 두부와 물을 넣은 솥에 추어 50여 마리를 풀고 불을 땐다. 물이 뜨거워지면 추어가 열기를 피하려 두부 속으로 기어들어 가게 되고, 결국 두부 속에서 죽는다. 두부를 꺼내서 자르고, 참기름으로 지져 탕을 끓인다. 이와 같이 추어를 통째로 삶는 방법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저항감을 불러 왔다. 그래서 최근에는 추어를 삶아서 살만 발라내 양념하여 끓이거나, 추어를 삶아 머리와 뼈를 모두 으깨서 끓이는 법을 선호한다.

참고문헌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최기철, 『민물고기를 찾아서』, 한길사, 1991.
  • 최기철, 『우리 민물고기 백가지』, 현암사, 2006.
  • 주영하, 「가을 식객을 사로잡은 추어탕」, 『식탁 위의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3.